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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59화 (159/237)

# 159

눈먼 자들의 도시

결론적으로 두고 말해서, 최현우의 기분은 매우 좋지 않았다. 좋지 않았다, 수준이 아니라 나빴다. 하지만 그 나쁜 기분을 지금 표출 할 수는 없었다. 눈 앞에 서 있는 검은 덩어리는 지금 최현우 이상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으니까.

- 실망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오늘의 결과는 그 정도를 넘어섰고!

힘의 편린일 뿐이다. 하지만 그 외침 만으로도 최현우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거대한 방 안이 웅웅 거리는 소리를 내며 낮게 떨리고 있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 나는 이미 일어난 과거에 대한 질책 중이다. 일어나버린 일에 대한 책임을 앞으로 다가올 일로 갈음하려 드는거냐!

이미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다. 모두가 그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일애 대해서 질책을 이어가는 건, 그냥 짜증이 나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 죄송합니다."

- 말로 끝날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어쩌라는 건지. 미안하다고 해도 싫다, 다음부터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 말하는 것도 싫다. 그냥 너는 얌전히 내 화가 다 풀릴 때까지 말이나 처맞아라 그런 뜻인가. 최현우는 속으로 분을 삭히면서 이야기를 묵묵히 듣기 시작했다.

열불이 터지는 건 최현우 쪽이 훨씬 더 심각했다. 어디에서 굴러먹다가 기어들어온 건지도 모르는 녀석들이 지부로 두고 있던 도시 세 곳을 가져갔을 뿐 아니라, 그토록 찾아다니던 트리거 기어는 기어대로 냉큼 집어먹고, 막대한 가치를 가지고 있던 일곱 마리 혼돈의 자식들 중에서 남은 거라고는 고작 두 마리 뿐이다.

모든 것이 그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준비하고 있었던 일이고, 이 일로 인해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도 최현우 자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 앞에 있는 이 덩어리는, 최현우의 손에 도장 한 번 찍어줬다고 비트코인 하다가 돈 잃은 녀석처럼 길길이 날뛰고 있다.

- 이후로, 다시는 실수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와 계약을 했다. 너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듯이, 네 실패 또한 나의 실패다. 이 이상 나에게 먹칠 할 생각을 하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녀석은 돌아갔다. 최현우는 멍하니 녀석이 사라진 빈 공간을 보고 있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술잔을 벽으로 집어던졌다.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복구해야 할 텐데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 목소리는 어떻게든 침착함을 유지하는 중이었다. 손실을 복구하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넉넉한 시간.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제공 받을 수 있다면 소말리아도 벨기에가 될 수 있다.

"필요한 건 언제나 부족한 법이라니까."

시간이 부족하다. 이 기회를 녀석들이 놓칠 리가 없다. 서울을 두들기려 들 것이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최현우의 대답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현 시간부로 꼭 필요하지 않은 생존자는 전원 생포해."

최현우의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몰아넣을 만한 장소가 마땅하지 않습니다. 감시에 인원도 필요하고."

최현우가 그 말에 대답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을 생포해서 한 곳에 몰아넣으라고 했나? 생포한 생존자는 전원 사랑의 집으로 변환한다."

혼돈의 자식들 대부분을 잃어버리면서, 병력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다. 지금 당장 병력의 질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질을 대신 할 수 있을 만한 양을 채워넣어야 한다.

"하지만... 생존자들의 반발이 심할겁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는..."

그의 말에 최현우가 깊게 호흡을 한 번 하고 나서 대답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있었던 긴 전쟁인데."

최현우의 말에 남자가 잠깐 멈칫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알고 있을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 멜로스의 대화라는 것도 모르겠군."

"... 그렇습니다."

"유명한 일화야. 강대국 아테네는 자기 땅 근처에 있는 중립국, 나약한 멜로스를 점령하고 싶어했다네. 그래서 병력을 보냈지. 전쟁을 벌이기 전, 먼저 두 국가 사이에 대화가 오갔어."

최현우는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테네의 주장은 간단했지. 강대한 국가는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다, 약한 국가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멜로스는 반박했지, 정의는 항상 존재하는 것이며, 아테네가 비록 지금 강국이라 해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논리를 펼쳐 강자를 약자의 먹이로 삼으려 든다면, 언젠가 약자가 되었을 때 너희 또한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최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는 끝나고, 전쟁이 시작되었어. 아테네는 멜로스를 간단하게 점령했지. 멜로스에 살고 있던 남자는 남김없이 죽었고, 여자와 아이는 노예로 팔려나갔어. 그렇게 불쌍한 멜로스는 멸망했고, 나에게 인상깊은 교훈을 하나 남겼지."

말을 마친 최현우는 녀석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힘이 없으면 아가리를 닥치고, 시키는 데로 해야 한다."

최현우의 말에 남자가 살짝 몸을 떨었다. 그런 녀석을 보고 있던 최현우가 웃음을 흘렸다.

"자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야. 나에게도 해당되는 교훈이지. 나는 닥치고 싶지 않거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힘이라고, 알아 먹겠나?"

서울의 힘이 약해졌다. 그렇다면 그 힘부터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수단과 방법에 제한은 없다. 서울에 있는 생존자들을 죄다 사랑의 집으로 바꿔야 하는 명분이 부족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최현우가 들고 있던 물잔을 그대로 책상 위에 강하게 내려찍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물잔이 최현우의 손 안에서 박살났다.

"망할 생존자들이 뭐라고 떠들건, 어떤 불만을 가지게 되건... 중요한 건 그게 아니란 말이다! 내가 갈아넣으라고 하면, 갈아 넣어!"

말을 마치고 남자의 멱살을 잡은 최현우의 눈은 섬뜩했다. 최현우는 녀석과 눈을 마주친채로 입을 열었다.

"아... 혹시, 더 하고 싶은 말이라도?"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힘이 없으면 닥쳐라. 옛날 옛적 그리스와 스파르타가 어쩌구 하는 이야기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지만, 최현우가 그에게 했던 그 대사 만큼은 당장 그의 생명줄을 쥐고 있는 한 마디였다. 최현우는 잡고 있던 남자의 멱살을 놓고, 그가 입고 있는 옷의 옷깃을 매만져 준 다음 어깨를 몇 번 두들겨 주었다.

"지식은 부족하지만 눈치는 빨라서 말귀를 알아듣는군. 그럼 가서 시킨 일을 수행하도록."

***

요 근래, 이렇게 푹 자본 기억은 없는 것 같다. 소독해두었던 상처도 다 나았고, 잠에서 깨어날 떄도 어디 하나 불편한 곳 없이 거뜬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 잠은 잘 잤어?"

몸을 씻고 식사를 마치고 나자, 이시은이 뭔가를 짊어진채 들어와서 턱 하고 내려놓았다. 이전에도 한 번 효과를 봤었던 찌라시다.

"쉬고 나면 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법이라더니."

그 찌라시들을 살펴보던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이건 또 언제 만들어 낸 거야. 아주 그냥,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으면 여드름이 돋는 병이라도 걸린건가.

"뿌려줬으면 하는데. 효과는 이미 확인해봤잖아?"

이시은의 말에 나와 서지현은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도움이 되는 일이다. 서울은 앞으로도 계속 오가야 하니까. 가면서 뿌리면 되겠지. 준비를 마친 나와 서지현은 배낭에다가 생존자들이 만들어낸 수제 찌라시를 한 가득 담고 서울로 향했다.

괴물들을 만들어내는 생산 기지는 한강 북쪽에 있다. 가는 길에 나와 서지현은 부지런히 찌라시를 뿌리고 있었다. 물론, 그런 우리 뒤를 부지런히 쫓아오는 괴물들도 눈에 보인다. 상대하기보다는, 적당히 숫자를 줄이고, 추적을 방해하는 선을 유지하며 우리는 이동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것들은 떄려잡아도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영양가도 없고.

"이러고 있으려니 나이트 삐끼가 된 기분인데."

"그러게요."

찌라시를 뿌리면서 우리는 강남구에서 성동구 쪽으로 한강을 넘어가는 성수대교 근처에 도착했다. 이쯤에서 한 번 확인해볼까.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목걸이를 확인한 다음,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를 전부 접었다. 눈에 들어오는 성동구의 풍경. 시각을 통해 밀려들어오는, 원래는 시각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들.

그리고, 뭔가 다른 것들도 보이기 시작한다.

"뭐야 이게."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그 이상을 보여주게 된 시각는 성동구의 상황만 보이는게 아니었다. 우리가 건너온 성수대교 너머의 강남구도 보인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오는 온갖 종류의 정보들은 이상했다.

강남구에서 드문드문 피비린내가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거지. 목걸이를 발동한 채 강남구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고 있는데, 최현우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광경이 보였다. 그리고, 제한시간이 끝났다. 접혀있던 목걸이의 네 귀퉁이가 자동으로 활짝 펼쳐지고, 감각의 영역을 초월했던 시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녀석이 오고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요?"

"아까 본 속도를 생각해보면 늦어도 10분 안에는 우리가 있는 곳에 도착할 것 같아."

"서둘러야겠네요."

그래, 서두르기는 해야 하는데 아까 봤던 강남의 광경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도대체 뭐였을까. 일단 지금 할 수 있는 것 부터 하자. 우리는 성수대교를 건너 성동구에 진입했다. 괴물을 만들어내는 고치가 있는 장소는 방금 전에 확인했었다. 찾아가서 부수는 것만 남았다.

우리는 계속 우리 뒤를 계속 쫓아오던 괴물들을 적당히 처리해 가며, 고치를 부수기 시작했다. 20개 정도를 부수는데 성공한 다음, 나와 서지현은 슬쩍 서로를 바라보고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치고 빠지면서 계속 돌려 깎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차피 우리가 이득이니, 지금 무리해서 싸울 필요 없다.

서울을 벗어나는데 성공하고, 녀석은 우리 뒤를 추격하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은 성과내요. 이렇게 며칠 반복하면 서울에서 만들어지는 괴물들의 숫자는 확 줄어들거에요. 다만, 서울 위쪽에 있는 다른 도시에서 지원군을 보내는게 약간 걱정이네요."

거기까지는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와 서지현이 다른 도시의 지원을 막기 위해 성남을 떠나 의정부나 고양 같은 곳으로 향하면, 그 소식을 알게 된 최현우가 틈을 노려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니까.

"매일 일정 숫자 이상의 고치를 부수고, 서울에 모이는 괴물들의 숫자를 부지런히 줄여놓으면 될 거야."

그러다 최현우가 성남 쪽으로 괴물을 보내면 하던 일을 멈추고 성남으로 돌아와 방어전에 참가하면 된다. 성남의 다른 생존자들은 수비수 역할만 해주면 된다. 괴물의 숫자를 줄이는 스트라이커의 역할은 나와 서지현이 한다.

그것보다 마음에 걸리는게 있다. 나는 서지현에게 아까 강남에서 본 장면에 대해서 말해줬다.

"... 이상하네요. 그 목걸이가 있지도 않은 걸 만들어 내서 보여주지는 않았을테고. 하지만, 애초에 이런 세상이면 제 아무리 강남이라고 해도 피비린내 같은 건 나지 않는 편이 이상한게 아닐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치고는 피 냄새가 너무 많았어. 못 해도 150명은 넘어 보였으니까."

내 말에 서지현이 저런, 하는 소리를 내고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냥 치안 불안으로 인한 희생자라고 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네요."

내 말에 그 말이다. 원인을 모르는 피비린내를 본 나는 약간 마음이 불편한 채로 성남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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