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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58화 (158/237)

# 158

눈먼 자들의 도시

녀석의 입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울음 소리가 들리고, 주변의 땅이 드드드드 진동하더니 날카로운 크리스탈 덩어리들이 땅에서 마구 솟아난다.

"젠장, 뭔데 이게, 마이다스가 소로 변한건가."

크리스탈 덩어리가 옷을 스치고 지나가자, 수정에 닿은 옷 조각이 크리스탈로 변해있다. 다행인지 뭔지, 뿔은 잡아도 수정으로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본체라서 그런 모양이지.

그대로 양 손으로 뿔을 쥔 채로 물구나무를 서 쏟아지는 수정 조각들을 피한 나는 녀석의 등 위에 올라탄 채로 수확자를 휘둘렀다. 그 사이에 주변에서 틈을 노리고 있던 이런 저런 잡괴물들이 무기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순간적으로 주먹을 두 번 쥐자. 만들어진 방어막이 약간의 시간을 벌어준다.

"기대했냐, 실망시켜서 미안하다."

그리고 그 시간이면 수확자 한 번 쎄게 휘두르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녀석의 몸뚱아리를 파고 들어간다. 그 바람에 박살난 크리스털 조각 몇 개가 내 뺨을 스친다.

크리스탈을 깎아 만들어진 소는 등에 큰 상처를 입은채 비틀거리며 숨을 몰아쉰다.

이거면 충분하다. 죽일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알아서 죽을테니까. 맞은 이상 죽을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힘들 정도의 치명상이니, 저 크리스탈 소가 제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어도 오래 버티지는 못하겠지.

곧바로 녀석의 등 위에서 내려온 나는 한 번에 두 녀석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익숙한 친구 삐에로와, 새로 보는 친구 하나다. 뭐, 이 녀석들 이외에도 자꾸 나에게 달려드는 성가신 녀석들이 좀 있기는 하지만, 주의해야 할 건 저 녀석들이다.

싸우다보면 다소의 상처는 입을 수 밖에 없다. 그 정도는 각오했다. 치명상만 피하면 된다.

"몸을 좀 말려 친구야."

새로 보는 녀석은 쉬지 않고 몸이 무너지고 회복되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진흙 덩어리였다. 연기와 함께 내 앞으로 얼굴을 들이민 삐에로가 단검을 휘두른다. 저 자식 공격은 막을 수 없었지.

양 다리에 힘을 빡 줘서 소 위에 몸을 고정한 나는 녀석이 휘두르는 단검을 피했다.

"난 니가 제일 싫어, 망할 삐에로."

어쨌든 수확자로 녀석을 때려야 하는데, 맨날 방구 같은 연기를 뿡뿡 뀌면서 순간이동해버리니 맞추기가 정말 난감하다.

그 와중에 갑자기 발이 땅 아래로 쑥 빨려들어간다. 멀정하던 도로가 갑자기 질척거리는 진흙 덩어리로 바뀌어서 내 다리를 무릎까지 삼켰다.

"짜증나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수확자를 휘둘러 허공에 궤적을 남긴 다음, 그 궤적을 잡고 진흙탕에서 쑤욱 하고 양 발을 뽑아냈다.

내가 이렇게 진흙탕 싸움을 이어가는 사이, 서지현은 오르골을 든 소녀를 요리하는 중이었다. 저러면 더 이상 개수작 못 부리겠지. 나는 접어두었던 청각을 다시 복구시켰다. 그래도 뭐가 들리기는 해야지.

그 틈을 노려, 혀를 날름거리던 거대한 은색의 목도리 도마뱀이 나를 노리고 펄펄 끓는 쇳물을 소방차처럼 뿌린다.

"끓는 쇳물이라, 내 허락 받고 그런 짓 하는거야?"

서지현이 그 장면을 보고 픽 웃었다. 갑자기 그녀의 몸 주변에 확 하고 이글거리는 불꽃이 생겨나면서, 동시에 도마뱀이 마구 토해내던 쇳물이 순식간에 굳어 철덩이로 변한다. 거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식어버린 철덩어리가 녀석의 아가리를 틀어 막아버리고, 녀석이 쏟아내던 쇳물은 그대로 굳어 녀석에게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었다.

"고맙기도 하지."

그대로 굳은 철 위로 스케이트를 타던 나는 하늘에서 삐에엑,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마구 날개를 휘두르는 대가리가 둘 달린 독수리를 확인했다. 고속으로 내려찍히던 녀석이 갑작스럽게 급강하를 멈추며 나에게 마구 날갯짓을 했다.

"바람이라."

밀어내기라도 할 생각인 모양이지. 미안하지만 바람은 안 통해. 온 몸에 프릭션 컨트롤을 발동하자, 나를 밀어내려고 쏟아지는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을 무시혹 굳은 철로 만들어진 길을 타고 가자, 거대한 목도리 도마뱀이 나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아가리를 쩍 벌렸다.

"시끄러!"

청각 회복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정신 사납게 하네.

피유유웅, 하는 소리를 내면서 나와 서지현을 향해 삐에로가 만들어낸 폭죽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크게 벌어진 도마뱀의 아가리 속으로 쑥 들어간 나는 수확자를 위로 번쩍 들었다. 골통 빠개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쏟아지던 폭죽들 중 몇 개가 두개골과 뇌가 관통당해 죽은 도마뱀의 시체를 마구 후려친다.

내가 크리스탈로 만들어진 소와 도마뱀을 잡는 동안, 서지현이 오르골을 들고 있던 소녀와 방금 전에 나를 귀찮게 했었던 거대한 진흙 덩어리를 작살내는데 성공했다.

여섯 마리였고, 그 중에 네 마리가 죽었다. 그리고, 이런 성과를 내면서 보낸 시간을 생각해보면 이제 슬슬 도망쳐야 할 것 같은데. 최현우를 하루에 두 번 보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다.

남은 건 저 하늘 위에서 삐약거리는 종달새 한 마리랑 삐에로 뿐이지만, 욕심 부릴 수는 없지.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입가를 슥 훔치고는 외쳤다.

"튀자!"

이 정도면 충분하다. 우리는 다시 도망치기 시작했다. 아주 그냥, 히트 앤 런이 일상이구나. 만약에, 삐에로가 우리 뒤를 따라온다면 그 녀석까지 처리할 자신이 있다. 이번에는 서지현도 함께 삐에로 요리에 가담할테니까.

"몸은 어때."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왼 팔을 큰 강아지 몇 마리한테 씹히고, 등에 화살이 세 방 정도 박혔고... 그 오르골 인형이 쏘아내는 음파에 서너 대 얻어 맞았어요. 하지만 완전 멀쩡해요."

"저기, 비꼬는 건 아니지?"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눈치도 참 빠르네요. 뭐, 이 정도 상처는 금방 회복될 거라고 생각해요. 강물로 뛰어들죠."

우리는 강물에 몸을 던졌다. 더 이상 추격하는 건 힘들거다.

"물 속으로 달려들면, 바로 우리는 물에서 벗어나고, 제가 폭발을 일으킬 거에요."

공기 중의 폭발과 물 속에서의 폭발은 그 위력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 이미 널리 알려신 사실이니까. 하지만 녀석들이 강물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다. 서지현이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꽤 많이 쓸어낼 수 있었을텐데."

"괜찮아. 어차피 이번에 낸 성과의 핵심은 다른 거잖아."

남아있던 여섯 마리 중에 네 마리가 죽었다. 최현우에게 남은 정예병은 두 마리가 전부다.

"서울 주변에 위성 도시가 우리가 점령한 곳만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 뭐 인천도 있겠고, 고양시도 있겠고. 서울이 이렇게 되었으니, 아마 수도권 연합에 소속된 다른 위성 도시에서도 최현우를 돕기 위해 병력을 파견할 거다.

"몰려오는 숫자가 중요한게 아니잖아."

양이 아니라 질이 중요하다. 서울 시의 랜드 마크는 이제 없다. 남은 건 끊임없이 생산되는 서울과 다른 위성도시의 괴물들이다.

"성남 쪽 상황은 어떤지 궁금한데."

내 말에 서지현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곧장 대답했다.

"서울에서 꽤 많은 생존자들을 확보 할 수 있었던 모양이에요. 성남을 제외하고 안양이나 안산에서도 생존자들이 제법 많이 온 모양이고.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제 이천 명은 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싸움에 참가하기 힘든 상황의 사람들도 제법 되긴 하지만. 그래도 싸움에 참가할 인원이 적어도 천 명 이상은 될 거에요."

"잘 유지해야 할텐데."

감당할 그릇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서울이 무너지기 전까지만 그 생존자들을 쥐고 있으면 된다. 그 이후에 리더십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자기 갈 길 가는 건 괜찮다.

"문제 없을걸요. 다들 최현우나, 서울의 괴물이라고 하면 이를 갈고 있을테니."

그래, 공동의 적이 있으면 작은 리더쉽으로도 큰 인원을 통솔 할 수 있는 법이다.

"싸울 일이 생기면 최현우는 내가 상대할게."

"저는 생존자들과 함께 밀려오는 괴물들을 상대하면 되겠죠."

그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천 명이나 된다면 어지간한 규모의 괴물은 서지현이 가세한 생존자들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당장 모여있는 생존자들이 천 명이라는 거지, 서울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한 생존자들이 더 합류하기 시작하면 성남시에 모여있는 생존자들의 규모도 점점 불어날 것이다.

"뭐, 북한처럼 서울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기를 쓰고 막으려 들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방해하는게 또 우리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 아니겠어요?"

강물에서 벗어난 우리는 잠깐 주변을 살펴보다가 별 다른 이상한 점이 없다는 걸 깨닫고 성남으로 향했다.

"고생했다! 뭐 하고 온거야?"

먼저 우석진이 우리를 보고 인사를 했다.

"피곤해. 미안하지만 자세히 설명하기 힘들것 같은데."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길었다. 서지현이 약간 지친 걸음으로 의자 쪽으로 걸어가서는 그대로 풀썩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랜드 클리어를 마치고 서울에서 도망다니다가, 가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괴물들을 습격해서 힘을 확 줄였죠. 긴 이야기라서, 정 궁금하면 나중에 천천히 들으세요."

"그러지."

"다른 사람들은?"

내 물음에 우석진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용천이와 시은이는 새로 유입되는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고 신상 정보를 조사하는 중이고, 경석이는 사람들을 시켜서 뿌릴 전단지를 만들고, 물자를 재파악 중이다."

그래, 다들 바쁘겠지. 소위 말하는 지도부는 현장에서 사람들이 뛰고 있을 때보다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해야 할 일이 더 많은 법이니까. 우석진도 해야 하는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인사를 마치고 우석진이 돌아가자 나와 서지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서지현이 배낭에서 약품을 꺼내서 내 상처를 소독해주었고, 나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상처를 치료했다.

"뭐부터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배고프고, 씻고 싶고, 자고 싶은데."

그 욕구들 중에서, 뭘 제일 먼저 해결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지금은 가장 격렬한 욕구를 충족 중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욕구.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2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마침내 서지현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에서 먹을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식욕이 우선했다. 서지현이 식사 준비 하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씻기 위한 물을 방 안으로 옮겼다. 물을 쏟아넣은 다음에 나는 서지현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였더라, 스파게티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결국 못 먹었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스파게티는 무슨. 만들기 귀찮아요. 토마토 즙에 말아놓은 국수 따위."

그렇지? 나도 동감이야.

어차피 뭐 맛있는 걸 먹고 싶다는 욕구보다는, 뭐라도 퍼먹고 배를 채운 다음에 씻고 자고 싶다는 마음이 더 간절했으니까. 맛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 뭘 먹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몽롱한 식사를 마치고, 언제 씼었는지도 모르게 몸을 씻은 우리는 힘겹게 이불을 깔고 그대로 거기에 퍽 하고 쓰러져 눈을 감았다.

삭신이 쑤신다. 이렇게 피곤했던 적이 요 근래에 있기는 했었나? 눈을 감자, 기절하는 것처럼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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