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
눈먼 자들의 도시
학교에서 수많은 서류를 살펴 본 결과, 이 녀석들의 본진일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는 물론이고, 녀석들의 대장 이름 같은 잡다한 정보들을 알아 낼 수 있었다. 서류에서 필요한 정보를 확보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교를 나섰다.
"하고 많은 곳 중에 여의도라니."
너무 송파에서 여의도까지는 거리가 상당하다. 녀석들이 머무르고 있는 곳은 참 여러가지 의미로 의외인 장소였다. 어차피 여의도에 건물들은 참 많다지만, 이 장소는 그 중에서도 굉장히 특별한 장소니까.
"심지어 국회의사당이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픽 웃었다. 하긴 뭐 세상 망하기 전에도 거기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썩 정상인이었던 건 아니었지.
"이러다가 서울에 있는 어지간한 랜드 마크들은 다 돌아다니게 생겼네요."
그러게 말이다. 최현우는 남산 타워에 자리잡은 모양이고, 이 녀석들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원래 지정되었던 생존자들을 위한 안전 지대는 경복궁이었지. 나는 목록을 뒤적거리다가 뭔가를 찾아내서 흔들었다.
"한 일주일 동안은 문제 없겠는데."
"아하."
내 말에 서지현이 서류를 확인하고 작게 감탄사를 던졌다. 오늘을 포함해서 향후 일주일 간 언제 눈이 머는지 적혀 있는 서류였다. 일주일 단위로 잘라서 눈이 머는 시간을 전달받는 모양이다. 그리고 이걸 다시 이 근처에 열리는 시장에 몰래 전달해주고, 그 대가를 받는다. 대가를 받게 되면 당연히, 그 중에 일부는 국회의사당에 있는 녀석들의 본진 쪽으로 전달되겠지.
"대충 시스템은 알았어."
일단 여의도로 가야 한다. 송파구에서 영등포구로 가는 길은 제법 거리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래봤자 서울 안이고, 그래봤자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에는 나와 서지현의 육체라면 하루가 다 지나기 전에 왕복도 충분히 가능하니까.
눈이 가려지는 시간을 확인한 나는 그 서류를 배낭에 챙겨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보자고."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움직이면 아무리 늦어도 아침이 오기 전에는 도착 할 것이다. 찾아가는 길도 엄청 쉽다, 까놓고 말해서 일단 송파구에서 위로 쭉 향해서 한강에 도착한 다음, 그대로 한강을 타고 쭉 가다보면 어쨌든 여의도는 나올 수 밖에 없으니까.
"한강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서지현과 함께 한강에서 쭉 이어지는 강변의 산책로 위를 달리는 중이었다.
"좀 낡기는 했겠지만, 다 끝나고 나면 오리배라도 한 번 타는게 어때요?"
"그러던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빠르게 산책로 위를 미끄러지고 있으려니, 주변의 풍경이 확확 변하기 시작한다. 한강변에 숨어있던 괴물들 몇 마리나 누런 눈동자를 빛내면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봤지만, 녀석들이 무슨 행동을 제대로 취해보기도 전에 나와 서지현은 이미 그 자리를 자나가버린다.
그렇게 씽씽 달려서 30분 정도. 나와 서지현은 여의도에 도착했다. 정확히는 여의도 공원, 한강변 산책로에서 바로 이어지는 장소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가면 국회의사당이 나온다.
"도대체 멀쩡한 건물 위에다가 아무런 쓸 데도 없는 돔은 뭐하러 올려놓은걸까."
참 볼 때마다 웃기다니까.
"멋있으라고 올려놓은 거 아닐까요."
"글쎄다. 멋있다기보다는 그냥 병신같은데."
건물 위에 엄청 커다란 녹색 젖꼭지가 달려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한국의 성감대다, 뭐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건가.
"말 조심하세요. 이 이상 국회를 모욕하면 돔이 열리고 숨어있던 로보트가 튀어나올지도 몰라요."
"덤비라지, 어차피 저 국회의사당 만큼이나 병신같은 디자인의 로봇일텐데."
나와 서지현은 그런 농담을 던지면서 국회의사당의 밖에서 안쪽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더 이상 물이 나오지 않는 분수와, 박살난 해태상이었다. 뭐, 여기도 이런 저런 피해를 입기는 했었던 모양이다.
"몰래 들어가자고."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성한 국회에서 쌈박질 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 생각해보니 원래 국회가 싸우는 곳이었나."
요즘에도 그러나? 국회의원들이 주먹질 하며 싸우는 건 국회선진화법 도입 이후로는 영 보기 힘든 광경이 되었던 걸로 아는데.
"그 사람들은 혀로 싸우잖아. 주먹질이 아니라."
"어머, 혀로 싸우는 건 키스잖아요. 조금 있다가 저랑 혀로 싸울래요?"
나야 고맙지. 반드시 이길 수 있도록 열과 성을 다해주겠어. 대충 그런 농담을 던지던 나와 서지현은 숨을 죽이고 벽 너머에서 국회의사당 부지를 살펴보았다. 순찰 중인 녀석이 대충 스무 명 정도, 입구를 지키는게 다섯 명. 모퉁에 숨은 나는 시선을 이리 저리 돌리다가 뭔가를 파악하고 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국회의사당 본관에 자리잡은게 아닌 모양이네."
사람 사는 냄새라고 해야 하나. 창문을 판자도 다 막아놓고, 입구에는 바리케이트를 쌓아놓는 식으로 정성을 들인 건물은 이 넓은 국회의사당 부지 안에 딱 하나 말고는 없었다.
국회의원회관. 다른 말로는 국회의원들 일하는 사무실이 모여있는 건물. 녀석들이 사용하고 있는 건물은 저거인 모양이다.
"숫자가 꽤 되는 걸."
주변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꽤나 많은 편이었다. 당장 눈과 귀에 잡히는 숫자만 해도 칠십이 조금 넘을 정도니.
"아직 눈깜깜이가 되기 전까지는 2시간 정도 남았어요."
그래,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빠르게 진행하자고."
국회의사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일곱 개나 존재한다. 나와 서지현이 향한 문은 소위 정문이라고 할 수 있는, 국회의사당역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제 1문이었다. 나는 수확자에서 참령을 빼서 신발 안에 감췄다.
"멈춰. 누구냐."
당연하다는 듯이 보초가 서 있었다.
"최희석 씨 부탁으로 조희강 씨를 만나러 왔다."
최희석은 송파구에서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녀석이고, 조희강은 이 녀석들의 보스다. 내 말에 녀석이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얼굴인데."
나는 녀석의 말에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대홍이랑 창희는 요 며칠 전에 죽었어. 대신에 우리가 온 거다."
녀석이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인상을 팍 쓴 채로 대답했다.
"송파구 쪽 지부에 있는 사람들 얼굴을 다 아나보지?"
"그런 건 아니지만... 잠깐 기다려라."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른 녀석들을 우리 앞에 둔 채로 어디론가 향했다. 그 사이에 보초 몇 명이 다가와서 우리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입장할 때 무장은 금지되어있다."
그 말에 나와 서지현은 순순히 짐을 넘겨주었다. 참령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단 건네주어도 괜찮으니까. 이미 이런 식으로 일이 진행 될 것 겉아서 참령도 미리 빼두었고. 녀석이 우리에게 짐을 건네받고, 몸수색을 하기 시작했다.
"좋아, 다음 여자."
녀석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서지현 쪽으로 다가갔다.
"꼭 해야 하나요?"
서지현의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지현이 잠깐 녀석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는 양 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올렸다.
"이야, 허리 가는 거 봐."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서지현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일은 하지 말아요. 여기로 우리를 보낸 건 나름대로 한 가락 한다는 뜻이니까. 여차하면 당신 하나 정도는 데리고 이승을 하직 할 거에요."
서지현의 말에 녀석이 픽 웃고는 대답했다.
"그래 그래, 알았어. 나도 이런 일로 문제가 생기는 건 바라지 않는다. 그나저나, 가슴에는 뭐 뽕 같은 거 넣었나?"
이야, 대한민국에 아직 법정 질서가 바로 서 잇었다면 바로 판사 앞에서 잘못했다고 사정해야 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서지현이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채 다소 화를 억누른 목소리로 대답했다.
"자동차 사고 나면 에어백 대신 쓸 생각으로 키웠는데, 불만 있어요?"
서지현의 비꼬는 것 같은 대꾸에 녀석이 별 다른 말 없이 계속 몸 수색을 이어갔다.
녀석은 서지현의 팔과 다리, 엉덩이 근처 따위를 툭툭 건드려 본 다음에 수색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둘 다 이상 없군. 짐은 돌아갈 때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어차피 녀석들이 확인한 건 위협이 될 만한 무기의 압수다. 사람에게 해가 될 정도의 무기라고 하면 그 크기에 한계가 있으니, 이 정도로 끝낸 모양이다.
서지현에게 던질 말 자체는 꽤나 성희롱적인 발언이었지만 의외로 몸수색은 쓸데없는 수작질 없이 제대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우리가 이성의 끈을 놓치고 잠입 좆까, 다 죽이고 들어가면 그게 잡입이다! 라고 외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보스가 나름대로 애들 기강 관리를 열심히 하는 모양이지. 냉정하게 말해서 이 정도 수준만 되어도 요즘 세상에서 보기 드문 기강 잡힌 조직원이라고 평가해 줄 수 있겠다. 몸 수색이 끝나고 난 다음 조금 더 기다리자, 어디론가 갔었던 녀석이 다시 돌아왔다.
"조희강 씨가 오라고 하신다. 아, 무기 소지는..."
녀석이 하는 말을 방금 전에 몸수색 한 녀석이 제지한다.
"몸 수색은 내가 미리 끝냈어."
그 놈의 말에 녀석이 아쉬운 표정으로 서지현을 슬쩍 본다.
"이 개같은 새끼. 힘든 일은 내가 했는데 재미는 네 녀석이 다 보냐?"
얼씨구, 표정을 보니 서지현을 못 만져서 굉장히 아쉬운 모양이네.
"억울하면 서둘렀어야지."
"옘병.'
녀석이 잠깐 툴툴거리고는 나와 서지현을 보고 턱짓을 했다.
"따라오도록."
우리가 도착한 곳은 국회의사당 본 건물이 아니라 국회의원회관이었다. 다른 말로는 국회의원들의 사무실이 밀집되어 있는 건물이다. 여기를 메인 베이스로 삼은 건지, 입구에는 쌓아놓은 모래 주머니나 바리케이트 같은 것들이 만들어져 있고, 그 많은 유리창들이 죄다 판자 같은 것으로 막혀 있었다.
"들어간다."
앞장 선 녀석이 입구를 지키는 녀석에게 간단하게 말을 건네자. 녀석이 길을 비켜 주었다. 우리는 수월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8층에 자리잡고 있는 대회의실이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다. 예의 갖추는 거 잊지 말고. 니들 보스의 윗 사람이라는 걸 까먹지 마라."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 안으로 들어섰다.
"희석이가 보냈다는 것들이 자네들인가?"
원래는 뭐 회의용 의자나 테이블 같은 것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들이 싹 비워지고 대신에 저 녀석이 머무르는 생활 공간으로 그 용도가 변해 있었다. 한 쪽에 놓인 커다란 침대와, 녀석이 입고 있는 꽤 비싸 보이는 양복. 그리고 들여놓은 찬장에 술병이나 바닥의 카페트까지.
잘 먹고 잘 사는 녀석의 표본이군. 대회의장 안에 있는 사람은 물론 저 녀석 하나 뿐이 아니었다. 호위를 위해서인지, 아니면 압박을 위해서인지 안에는 여덟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무기를 든 채로 그의 양 옆에 늘어서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 보는 얼굴이군."
"조희강 님 본인이 맞으십니까? 제가 얼굴은 처음 보는 거라서."
내 말에 녀석이 픽 웃고는 대답했다.
"그렇네만. 희석이가 보냈다고?"
여기까지 왔으면 충분하다. 나는 해맑은 목소리로 진실을 말해주었다.
"아니, 사실 뻥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