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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50화 (150/237)

# 150

눈먼 자들의 도시

어두웠다가 밝아지고, 다시 어두워졌다가 밝아진다. 방 안에 숨어 시간을 보내던 나와 서지현은 그렇게 시각 상실과 복구를 반복하며 서울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한 군데 머물 곳을 딱 정해두는 건 의미가 없다. 애초에 약속한 시간이 되어 눈이 멀어버리면 마련해둔 은신처까지 갈 수도 없다. 시각을 제외한 기타 감각을 통해서 어렴풋이 주변의 상황을 예측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걸로 저 멀리 떨어져 있을 은신처까지 찾아가는 건 해보지 않아도 결과를 알 수 있는 말도 안되는 시도다.

"생존자들은 고층 건물에 머무르네요."

"어이구, 출세들 하셨네."

옛날에는 무지막지한 가치를 가지고 있던 건물들이지만, 지금은 의미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이전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감옥이잖아 저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층 건물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계단만 지키면 된다. 그것 만으로도 벗어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뭐,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멀쩡할 수 있는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라면 조금 사정이 다르겠지만.

그러기가 쉬운 게 아니지. 대부분의 생존자들은 저런 고층 건물에서 뛰어내리면 재수가 정말 좋으면 양 다리만 부러지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 즉시 사망이다.

"뭐, 벗어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건 없지만."

감방에서 나왔다고 탈옥이 아니다. 교도소를 나가는데 성공해야 탈옥이지. 저 건물을 나와도 서울을 벗어 날 수 없는 이상에야 저 생존자들의 자유는 박탈된 거나 다름없다.

"... 저게 뭐야."

거대한 괴물이 등에 자기 몸보다 훨씬 큰 양동이를 짊어지고 생존자들이 머무르는 건물 쪽으로 다가온다. 건물 안에 머무르던 생존자들이 슬금슬금, 두려운 눈치로 그 괴물에게 접근한다. 괴물이 등에 짊어지고 있는 양동이에는 호스가 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그릇을 가지고 와서 양동이에 연결된 호스를 통해 무언가를 받는다.

"뭐야 저게, 콘크리트?"

생존자의 그릇 안으로 쏟아지는 회색의 반죽 덩어리. 저거, 절대로 영양바는 아니다.

"도대체 저게 뭘까요."

"시장에서 말했었던 개죽 기억해?"

아마 저게 생존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개죽이라는 물건인 모양이다. 내 말에 서지현이 몸을 잠깐 떨었다.

"도대체 뭘로 만든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꼭 모습만 보면 누가 콘크리트를 처먹고 싸놓은 설사 같은 모양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나쁠 거 없네."

시장에서 통조림 같은 걸 구매하지 않는다면 매일 저런 걸 먹고 살아야 한다는 거잖아. 서울의 랜드 클리어가 끝나고 나면 나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겠는걸. 나가서 뭘 먹어도 저런 걸 퍼먹는 것 보다는 낫겠지. 게다가 괴물 녀석이 죽을 퍼주는 와중에 한 녀석이 괴물 앞에 서서 외쳤다.

"주말은 언제나 그렇듯 보호비 및 제반 시설 사용료 지불이 있는 날이다! 기본 거주비와 식량 배급은 영양바 한 개 또는 노동 40시간, 보호 구역 거주는 영양바 세 개, 청결 유지용 물 공급은..."

대충 이야기를 들어보니 서울에 살며 저 거지같은 죽을 받아먹기 위해서는 매주 영양바 한 개를 바쳐야 하는 모양이다. 그 이외에 더 안전한 구역에서 살거나, 샤워를 위한 물을 제공 받기 위해서는 추가로 뭔가를 더 지불해야 한다.

쫙쫙 뽑아 먹는구나. 영양바를 바치지 못한다면 일주일에 노동 40시간을 채우면 된다. 물론, 그 노동이라는게 에어컨 쐬면서 서류 업무 하는 거라면야 주 5일 8시간 근무라는 여유로운 여건이 되겠지만... 망해버린 세상에서 사무직 만큼 쓸모없는 일이 또 있을까. 설사 사무직이 필요하다고 해도 영양바 하나 낼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 그런 자리를 차지할 확률은 한도 끝도 없이 낮다.

그렇게 녀석들의 일과를 살펴보던 와중에 다시 시야가 어두워지고, 우리는 괴물들을 피해 숨고, 다시 시야가 밝아지고.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저녁이 되었다.

"저기, 시장 열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서 좌판대를 펼치고, 펼쳐진 좌판대 근처에서 사람들이 왔다갔다 하기 시작한다. 높은 곳에 자리잡은 나와 서지현은 가만히 그 시장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와라, 와라. 그렇게 2시간 정도 더 기다렸을까.

"저기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알잖아요. 이 정도 거리에서는 전 잘 안 보여요."

"어제랑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재빨리 그 아이가 있었던 방향으로 향했다. 서지현이 날아다니는 방식은 빠르기는 하지만 폭음이 펑펑 터지니까 사용 할 수가 없고. 나는 수확자를 이용해 만들어낸 궤적을 밟고 이동하고, 서지현이 그 뒤를 따라 내가 밟았던 궤적을 밟아서 따라오기 시작한다.

근처에 도착한 우리는 담벼락에 붙어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마침맞게, 시장으로 찾아온 아이가 무장한 녀석 중 하나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중이었다.

귀를 기울이자, 아이가 하는 속삭임이 들린다.

- 금일, 20시 37분이에요.

나는 그 말에 슬쩍 시계를 확인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았어."

내 말에 서지현이 슬쩍 나를 바라보고는 다시 아이에게 시선을 집중하며 말햇다.

"대충 1시간 정도 여유가 있네요."

그래, 이야기의 전달을 마친 아이의 뒤를 쫓는 건 가능하다. 아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와 서지현은 약간 떨어진 채로 그 아이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아이는 근처의 골목 안으로 들어갔고, 나와 서지현은 곧장 담장을 넘고, 건물 위로 올라갔다.

아이는 계속해서 움직이며, 주변을 확인한다. 나름대로 교육을 받은 모양인데. 녀석의 시선이 우리가 있는 지붕 쪽으로 향하자, 나와 서지현은 난간 아래 쪽으로 몸을 숨겼다. 그 상태로 손거울을 이용해 아이를 관찰하던 나는 녀석이 다시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건물에서 건물로 이동했다.

20분 정도 지났을까. 아이는 골목 사이에 숨어있던 우락부락한 사내 몇 명에게로 향했다.

"전달했냐?"

"네, 문제 없이 전달했어요. 그리고, 이번 주 주말에 올림픽 공원 88 호수 인근에 사례품을 두겠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좋아, 라고 말한 다음 한 녀석이 웃으며 녀석의 머리를 팍팍 쓰다듬는다.

"똘똘한 새끼. 좋아, 이동하자."

녀석들은 그 아이를 데리고 함께 이동하기 시작한다. 그래, 곧바로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꾸준히 녀석들의 뒤를 쫓았다.

"고등학교잖아."

녀석들이 도착한 곳은 고등학교였다. 옆에서 서지현이 내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른 다음에 말했다.

"조금 있으면 시간이 될 거에요."

그래,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근처를 살피다가 외장재가 약간 떨어져 나간 오피스텔 하나를 찾았다. 안에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2시간 기다린 다음에, 다시 시야가 돌아오면 그 고등학교 안을 한 번 뒤져봐야 할 것 같다.

시야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우리는 방 안에서 얌전히,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뭐하는 녀석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좌판대를 펼쳐놓은 녀석들에게 일정한 대가를 받고, 시장 문을 닫아야 하는 시간을 알려주는 모양이다.

"송파구에만 있지는 않을 거에요."

서지현의 말에 동감한다. 언제 눈이 멀어버리게 되는지,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한 두명이 아닐거다.

"아마, 그 아이가 찾아간 고등학교도 일종의 지부 같은 거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 어때요, 상관없잖아요."

그 고등학교에 있는 녀석들 중 보스를 잡아서 족치면 뭔가 나올 것이다. 끄나풀에서 지부로, 지부에서 본부로. 그렇게 연어처럼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 상류에 닿겠지. 서서히 시야가 다시 밝아지기 시작한다. 고개를 몇번 흔들어서 정신을 차린 나는 서지현과 함께 오피스텔에서 나와 고등학교로 향했다.

"... 니들은 뭐야."

우리가 학교 안으로 들어서려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몇 녀석이 튀어나와서 무기를 들고 노려보기 시작한다.

"아, 선객이 있었나."

내 말에 녀석들이 슥 나와 서지현을 바라본 다음에 말했다.

"여기는 우리가 먼저 차지했다. 돌아가."

"어머, 자리도 많아 보이는데 같이 좀 쓰지."

서지현의 말에 녀석이 슥 서지현을 바라본 다음에 말했다.

"나가라고 말했다.

거 참, 단호하기는. 나는 녀석들을 슥 훑어본 다음에 말했다.

"시장에서 어떤 아이가 무장한 사람들에게 말하는 걸 엿들었는데."

내 말에 녀석들 중 몇 놈이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런데는 무슨 그런데야. 이 이후로 내가 무슨 말을 할 지 정말 모르는 건가.

"그 아이가 참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더군. 오늘 밤 8시 37분에 뭔가가 일어난다는 식의 이야기더라고. 신기한 이야기여서, 뭔가 해서 그 아이를 따라가봤더니 여기가 나왔어. 그리고 짜잔 오늘 밤 8시 37분에 무슨 일이 일어났게?"

내 말을 듣고 있던 녀석이 나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고, 나는 휘둘러진 창을 가볍게 잡으며 웃었다.

"눈이 멀었어. 정확히 그 아이가 말했던 시간부터 2시간 동안. 우연일까?"

그럴리는 없지. 녀석은 내 손에 잡힌 무기를 다시 빼앗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움직일리가 없다. 그 와중에 다른 녀석들이 나를 향해서 온갖 총류의 날붙이를 들고 달려들고, 그런 녀석들의 앞에 화악, 하고 불로 만들어진 벽이 솟구친다.

녀석들이 걸음을 멈추고 멍하니 그 화염의 벽을 바라보자, 서지현이 다시 화염벽을 거두고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별로 해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얌전히 있어주지 않을래요?"

여전히 무기를 붙잡고 안감힘을 쓰는 녀석을 보던 나는 한숨을 쉬고 무기를 빼앗아 땅에 깊게 박아넣으며 말했다.

"니들 보스 누구야. 안내해. 잠깐 이야기 좀 나누자."

내 말이 녀석이 바닥에 박혀버린 자신의 무기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젠장맞을 우리가..."

나는 녀석의 배에 주먹을 살짝 박아넣었다. 그것 만으로도 녀석의 입에서 커헉, 하는 소리와 함께 헛구역질을 한다.

"자자, 그렇게 까칠하게 굴지 말고. 네 보스를 감추려고 하는 충심은 잘 알겠는데. 그러다가 배 터지면 충심이고 뭐고 다 쓸데없어."

녀석이 나를 바라보면서 뭐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우욱, 하는 소리를 냈다. 곧바로 팔을 놓자, 녀석이 바닥에 엎드려서 마구 토악질을 하기 시작한다.

"엄살 하고는."

이거 못 쓰겠네. 누가 보면 주먹으로 배를 맞은게 아니라 무슨 오함마로 배를 내려 찍힌 줄 알겠어. 나는 멍하니 그 장면을 바라보는 녀석들을 향해 다시 말했다.

"니들 보스 어디있냐고, 좋게 말할 때 말해."

그 와중에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저 뒤의 학교에서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때가 묻은 셔츠와 골덴 바지. 그리고 눈에 띄는 반작이는 대머리와 거기에 튀어나온 핏줄까지. 우리 앞에서 머뭇거리던 녀석들이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누군데 남의 집 앞에서 소란이야. 어?!"

녀석의 말에 나는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녀석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댁이 이 친구들 보스인가보지."

내 말에 녀석이 잠깐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 다음에 대답했다.

"그렇다면?"

"물어볼 것이 좀 있어서."

내 말에 녀석이 뒤편에 엎드려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녀석을 가리켰다.

"물어보러 온 게 아니라, 주먹질을 하러 온 것 같은데."

아, 저거? 나는 픽 웃고는 대답했다.

"서로 약간 오해가 있어서. 좋게 풀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저거봐, 너무 좋아서 감사 인사로 절까지 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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