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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49화 (149/237)

# 149

눈먼 자들의 도시

크훅, 후우욱 하며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소리가 들린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녀석들 중 몇 놈이 우리 쪽으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발걸음 소리를 들어보니, 숫자가 꽤 많다.

"가능하면, 싸우지 말자."

지금 소란을 피워서 득 될 일이 없다. 우리가 서울로 들어왔다는 점은 반드시 감춰야 한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정 못피하겠다 싶은 상황에서만 싸워야겠지. 나는 서지현을 품에 안은 채, 다리에 프릭션 컨트롤을 걸고 최대한 조용히 땅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우리가 이동하던 장소 위에서 뭔가가 빼애액,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린다. 곧 이어서 쉬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날갯짓 소리.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 쪽으로 날아오는 거다.

나는 서지현을 안은 채로 옆으로 몸을 던졌다. 바로 옆에서 뻐억, 하는 소리와 함꼐 뭔가 작은 조각들이 얼굴이 부딪친다. 냄새를 맡아보니 아스팔트 조각이다. 그리고 다시금 들리는 날갯짓 소리.

뭔지 몰라도, 날아다니는 녀석이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다. 짜증나게 되었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날갯짓이 들리는 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맞지 마라, 맞지 마라.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휘둘렀다.

"뭐 하는 거에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새장을 만드는 중이지."

다행히, 검이 살을 가르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날갯짓 소리가 들리는 근원지는 수확자를 휘둘러 만들어낸 궤적으로 감싸졌다. 궤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저 미지의 파닥이 자식은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할거다.

"그럼 좋든 싫든 한 손은 못 쓰겠네요."

그래, 수확자를 칼집에 넣지 않은 채 들고 있어야 하니까.

서지현이 대충 상황을 파악하고 나서 내 목에 자기 양 팔을 두른 채 힘을 꽉 주었다. 덕분에 나는 한 팔로 엉덩이만 받쳐주면 된다.

우리는 그 상태로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싶으면 해야 하는 일은 간단했다. 수확자로 급하게 임시 벽을 만들고, 거기에서 다시 조용히 이탈하면 된다.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주변을 돌아다니는 소리가 점점 많아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대충 손을 더듬거려 아무 건물이나 무작정 들어갔다.

"수상한 소리는 안 들려."

들어간 건물 안은 굉장히 조용했다. 나와 서지현은 숨을 죽인 채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손을 뻗어 더듬거리다보니, 열려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 도망치면서 문 닫는 걸 깜박한 모양이다.

"후우..."

방 안에 들어간 나와 서지현은 숨을 죽인 채로 얌전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깊게 호흡을 들어마시던 나는 그대로 얼굴을 구겼다.

"으, 냄새."

이게 무슨 냄새지. 시체가 썩기라도 한 건가.

"그러게요."

방 안에는 지독한 악취가 감돌고 있었다. 악취의 원인을 모르니, 어딘가에 앉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렇게 방 안에 얌전히 선 채로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서서히 시야가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다. 곧장 창문을 가린 나는 손전등부터 꺼내 조명을 밝혔다. 도대체, 이게 무슨 냄새지.

우리가 들어선 방 안에는 자연의 놀랍도록 끔찍한 신비가 펼쳐져 있었다. 벽지에 잔뜩 번진 곰팡이들이 우리를 반긴다. 시선을 돌리자 스르륵, 하고 움직여 우리로부터 도망가는 돈벌레들과, 바닥에서 뭔 일이 일어난건지 살피기 위해 더듬이를 움직이는 곱등이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원래 이렇던 장소는 아니었을 것이다. 딱 봐도 곰팡이가 점령한 벽지도 그렇고, 바닥재도 그렇고 꽤 고급이다. 다만, 엄청나게 습하고 역한 냄새가 난다.

천장에는 금이 가 있다. 아무래도 천장에 금이 간 곳을 통해서 파이프의 구정물 따위가 흘러 들어온 모양인데. 냄새의 원인은 찾았네.

툭, 하고 서지현의 머리 위에 뭔가가 떨어져서 확인해보니 돈벌레다. 머리를 털어낸 서지현이 엄청난 속도로 사라지는 큼직한 돈벌레를 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머리 위로 중지 손가락만한 돈벌레가 떨어졌는데 눈썹 하나 깜짝 안하는 사람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텐데. 대단하네.

"이 방을 보니, 옛날 생각 나네요."

옛날? 내가 시선을 돌리자 서지현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월 9만 8000원짜리 쪽방이 대충 이런 느낌이었으니까요. 이른바 룸 컨디션은 여기보다는 제가 살던 쪽방이 약간 더 좋았는데, 크기는 여기가 훨씬 커요."

대단하군. 그나저나 쪽방이라니.

"고시원에서 살았다고 했잖아."

"돈 없는 사람이 어디 한 곳에 꾸준히 머무를 수 있는 팔자던가요. 돈에 여유가 조금 생기면 고시원에서 살고, 돈이 부족하면 쪽방 들어가고. 그렇게 살았죠. 아무리 그래도 노숙을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 어린 여자애가 무슨 꼴 당할 줄 알고 노숙을 해. 서지현이 방 안을 슥 훑어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인근에 사는 환갑 정도 되어보이는 할머니가 3만원 받고 매춘하고 그랬었는데. 원래 방 값은 10만원이었는데 제가 뛰어난 협상력을 발휘해 2000원이나 깎는데 성공했었죠."

뭐라고 대답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냥 다시 질문을 던졌다.

"벌레에 익숙한 것도 그런 거 때문인가봐?"

"그럴 걸요. 입 벌리고 자다가 입 안으로 돈벌레가 떨어진 적도 있으니까. 혹시 꽁돈이라도 생길 징조인가? 하면서 기대했던 기억이 나네요. 결국 입으로 돈벌레를 받은 보람도 없이 여전히 거지 신세였지만."

자다가 입 안에 돈벌레가 떨어졌는데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니. 머리 위에 떨어졌을 때 놀라지 않은 이유가 있구만. 신경줄 엄청 굵네. 잠깐 고민하던 서지현이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아, 놀란 척 비명이라도 지르면서 당신 옆에 착 달라붙을 걸 그랬어요."

"그러게, 시도라도 해보지 그랬어."

일단 바깥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우리도 어쨌든 숨어 있을 곳을 찾아야 한다. 밖에서 잠들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기는 냄새도 심각하고 곰팡이도 심각하니까.

"혹시 옛날 생각 나서 머무르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아."

내 말에 서지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뭐 좋은 기억이라고 이런 구질구질한 곳에 머무르면서 곱씹겠어요."

그렇겠지. 우리는 건물을 나와 주변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상태가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곳을 찾아냈다. 먼지는 좀 많이 쌓여있지만, 오히려 그 편이 마음에 든다. 최소한 한 동안 여기로 온 사람은 없다는 뜻이니까.

대충 먼지를 치워버리고 자리에 앉은 나는 입을 열었다.

"그 시장에서, 무장한 녀석들에게 말을 건 아이."

"이상했죠?"

그래. 그 애가 무장한 녀석들 중 하나에게 말을 전해주고 나서, 곧바로 진행되었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수상하기 짝이 없다. 아이가 와서 뭐 은박지로 싼 버찌씨를 내밀며 '이거 줄 테니 사탕 다 내놔. 거스름돈 2센트 까먹지 말고' 같은 소리를 한 것 같지는 않았단 말이지.

무장한 녀석은 아이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고, 곧바로 다른 녀석들에게 알렸다. 다른 녀석들은 시장에 좌판대를 펼쳐놓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었고, 그 즉시 시장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이 일련의 과정 사이에 아무련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기는 힘들다.

"하루 다섯번, 때는 정해져 있지만 정확한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은 현상이라고 들었는데."

우리가 수원에서 생포된 녀석들을 생포했을 때는 다들 비슷한 대답을 했다.

서울과 바깥을 들락날락 할 수 있을 정도라면 그래도 이것저것 주워들은게 많은 녀석이라는 뜻이다.

"수원에서 생포했떤 녀석들이 자기 입으로 정확한 시간이 정해져 있는게 아니라고 했는데, 그 아이는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정확히는... 그 아이를 보낸 사람이 알고 있는 거겠죠."

그래, 누가 보낸 건지는 아직 모르지만.

"여태동안 경험한 모든 구역 안의 이상한 현상은 랜드 마크와 관련이 있었어."

랜드마크가 죽으면 구역 안에서 일어나던 이상한 현상들도 종결된다. 다른 말로는, 각 구역에서 일어나는 현상 자체를 랜드 마크가 일으킨다는 뜻이다.

"정해진 때, 랜덤한 시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누군가 정확히 알 수 있으려면 랜드마크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빈 통조림을 내려놓으며 입가를 훔쳤다.

"다음 번에 시장이 열렸을 때는, 그 아이의 뒤를 쫒아보도록 하죠."

"가능할지 모르겠네."

보이지 않으면 뒤쫒는 것도 어렵다. 물론 아이들의 발소리는 다른 사람들의 발소리에 비해 가벼우니까, 어떻게든 분간 할 수는 있겠지만.

"해내야죠. 시장으로 아이를 보내는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그 녀석을 찾아내서 추궁 할 수 있어요."

녀석은 랜드마크에 대해서 굉장히 잘 아는 녀석일 것이다. 아마, 랜드마크의 위치도 알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최소한, 힌트라도 찾아 낼 수 있겠지.

"빨리 실마리를 찾아내서 다행이네."

우리가 랜드 클리어에 성공하게 된다면 최현우는 난감해지게 된다. 랜드 클리어가 된 이상 이 안에 머무르던 사람들은 언제든지 서울을 벗어 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걸로 끝나는게 아니다.

"그 일을 벌이기 전에, 괴물을 생산하는 고치들도 찾아내야 해."

사랑의 집이었나. 하여튼 그거. 서울에도 분명히 있을거다. 랜드 클리어를 마치고 나서, 곧바로 향해야 하는 곳은 수원이 아니라 그 장소다. 도착해서 최대한 많은 숫자의 고치를 작살내고, 우리를 조지기 위해서 최현우가 뭔가를 보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수원으로 도망칠거다.

그러고 나서 이어지는 일은 뻔하다.

게릴라. 몰래 들어가서 실컷 고치를 작살내고, 뭔가 온다 싶으면 도망치면 된다.

서울의 생존자들은 고치가 되고 싶지 않으면 서울을 벗어나려고 들겠지. 서울 안에 남아있는 생존자들이 줄어들면 생존자들을 재료 삼아 고치를 만드는 것도 상당한 부담이 될 거다. 그렇게 계속, 돌려 깎는 방식으로 서울을 괴롭히다 보면 언젠가 최현우도 한계에 부딪친다.

그 순간이 오면, 나도 최현우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을거다.

"위급해진 최현우가 잠깐! 같은 소리 외친다고 칼을 멈추거나 하지 마세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병신으로 보여?"

무슨 만화영화에 나오는 싸구려 악당도 아니고.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혹시 모르죠, 갑자기 없던 동정심이 생겨버릴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호기심."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 자식에게 들을 이야기 없어."

녀석은 거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보기도 전에 죽을거다. 녀석에게 궁금한 건 없다.

"당신의 누나를 왜 그렇게 괴롭혔어야 했는지 같은 거, 안 궁금하세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궁금해."

여러번 말했던 것 같은데.

중요한 건 녀석이 내 가족을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결과다. 거기까지 이르게 된 과정은 안 궁금하다. 죽은 사람 유령 100명을 만나면 억울한 유령이 100명이라고 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에게 사린가스로 샤워를 시킬 때도 나름대로 이유는 있었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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