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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48화 (148/237)

# 148

눈먼 자들의 도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를 향해 달려들던 떙중들은 전부 다 시체가 되었다. 그 시체를 넘어서 걸어가다 고개를 들어올리니, 거기에는 또 다른 문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주변에 세워져 있는 네 개의 조각상.

"귀엽게도 생겼네."

비파를 든 녀석 하나, 검을 든 녀석 하나, 구슬이랑 용을 쥐고 있는 녀석 하나. 마지막으로 손에 작은 탑을 들고 있는 녀석 하나. 오색 빛깔로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조각상이다. 그래, 이게 사천왕이지. 맨날 만화영화나 소설에서 악당 네 명 묶어서 사천왕이라고 칭하는 바람에 진짜 사천왕들의 모습을 까먹고 있었네.

"움직이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었다.

"그럼 안 움직일까요. 딱 봐도 움직일 거라고 광고하고 있는데."

우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들이 서서히 고개를 우리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곧바로 눈 앞이 깜깜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젠장."

서울에 들어 선 순간 이런 일이 언젠가는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기에 심하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다만, 벌써부터 눈이 머는 상황이 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는데.

그그긍, 하는 소리와 함께 조각상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계속 눈을 뜨고 있는 대신, 그냥 감아버렸다.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상관없다. 서지현은 어차피 특기가 낫을 휘두르는게 아니라 불을 뿜어내는 거다. 뭐가 있다 싶으면 그 일대를 통째로 날려버리면 된다. 원래 포격이나 폭격 같은게 다 그런거잖아. 대충 그 주변에 떨어지면 목표도 파괴하고, 그 일대도 싹 파괴된다. 범위 공격의 좋은 점이지.

나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내 귓가로, 뭔가가 휘둘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린 곳으로 검을 휘두른다. 내가 검을 휘두르고, 상대도 무기를 휘둘렀다면 자연스럽게 후발 선타가 발동되며 가속이 쭉 붙는다.

"후우."

카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돌덩이를 작살내는 감촉이 손을 타고 올라온다. 이 정도 거리라면, 귓가로 들리는 희미한 소리를 확인하고 그대로 허리를 젖혔다. 약간 동작이 큰 건 어쩔 수 없다. 눈이 보일 때처럼 아슬아슬하게 피하려고 하다가 실수해서 맞으면 많이 아플테니까.

일단, 제대로 맞았을거다. 동상 크기를 생각해보면, 내가 파고 들어간 곳은 최소한 목 아니면 머리통이다. 참령 끼워놓은 수확자로 거기가 작살났으면 죽어야지.

"젠장."

쿠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동상이 쓰러지는 소리가 코 앞에서 울려퍼진다. 그 소리에 파묻혀서 다른 소리가 잘 안들리고, 나는 그대로 뭔가를 머리통에 얻어맞고 그대로 허공을 붕 날아 바닥을 굴렀다.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얻어맞은 쪽으로 손을 가져가보았다.

"다행이다."

막 깨져서 순두부가 나오는 것 같지는 않고, 그냥 피만 조금 흐르는 정도다. 안 보이니 불편해 죽겠네. 나는 핑핑 도는 머리를 가볍게 몇 번 흔든 다음 다시 귀를 기울였다.

쿠웅, 쿠웅 하는 소리가 들린다. 내 쪽으로 다가오고 있는게 한 녀석. 그리고 서지현 쪽으로 향하는 녀석이 둘.

그럼, 나는 곧장 둔중한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려갔다. 후욱 하고 밀려드는 바람. 손을 뻗자 딱딱한 뭔가가 닿았다. 나는 그대로 손에 힘을 주고 뛰어오르며 수확자를 크게 휘둘렀다. 걸린게 없다. 맞추지는 못한 모양이지.

"그럼 이걸 맞아라."

나는 허공에 뜬 상태로 칼집에 수확자를 집어넣었다. 다시 한 번 돌이 박살나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땅바닥으로 돌조각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래, 날아가는 궤적은 맞은 모양이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 쪽을 확인한 나는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살짝 앞으로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수확자에 단단한게 걸리는 느낌이 든다. 이건 제대로 맞았군. 곧장 수확자를 휘두르기 시작하는데 위에서 아래로 뭔가 휘둘러지는 파공음이 들린다. 검을 들어 막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발을 딛고 있던 땅이 움푹 파여들어간다.

괜찮아. 이 정도라면. 나는 역으로 힘을 주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던 뭔가를 밀어내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마침내."

서서히, 다시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지현이 작살내놓은 조각상 두 개와, 내가 아작낸 조각상 두 개가 눈에 들어온다. 사이 좋게 두 개 씩 나눠 가졌네. 녀석들을 제압하고 나서, 우리는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상상과 실전은 다른 법이구만."

눈이 안 보이면 싸우는게 힘들겠거니, 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너절이들한테 한 방 얻어 맞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소리에 의존해서 위치를 찾고 있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들리니 섬광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제대로 주변을 파악 할 수가 없었다.

"옛날 생각나네."

내 말에 서지현이 네? 하는 소리를 낸 다음 되묻는다.

"옛날이라니, 얼마나 옛날이요?"

"너랑 처음 만나서 보건소에서 하룻밤 보낼 떄."

그때 보건소를 습격했던 녀석들이 눈이 없고, 대신에 후각을 통해서 살아있는 것들을 찾아 씹어먹는 녀석들이었잖아.

"향수병 깼을 떄 녀석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

녀석들 입장에서는 당시 나와 서지현 정도라고 하면 충분히 요리할 수 있는 한 끼 식사였을 뿐인데. 갑자기 향수 얻어맞고 정신을 못 차리는 상황에서 당하려니 얼마나 억울했을까.

"뭐, 녀석들이 조금 더 강했다면 우리를 이겼겠죠."

그래, 그랬겠지. 나와 서지현은 천천히 문 너머로 향했다. 넘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사찰의 풍경이 사라지고, 서울의 모습이 드러난다.

"..."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그 중에서도 서초, 강남, 송파는 땅 값이 개념을 상실한 것으로 유명한 삼총사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그 삼총사 중에서 송파구였다. 나는 슥 주변을 살펴보고 나서 한숨을 쉬었다.

"이야... 서울 별거 없네."

내 말에 서지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별거 없네요."

내가 기억하고 있는 서울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지독하게 적막하고, 어딘지 모르게 을씨년스럽다. 괴물들이 이 세상에 등장한 첫번쨰 날, 사람들을 서울을 벗어날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도로에 나와있는 수 많은 차량들이 그걸 증명한다. 가드레일을 들이 받은 차량도 있고, 1층의 상가의 유리를 박살내고 처박힌 차량도 보인다.

"... 윽."

살짝 차 안쪽을 살펴보자, 이미 더 썩을 부위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시체가 보인다. 그 시체 옆에 놓인 가방은 벌써 누가 뒤졌는지 열려 있었다.

"게임기?"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고 시체를 바라봤다. 도대체, 도망치면서 게임기를 뭐하러 챙긴거야. 웃긴 녀석이네 이거. 가방을 뒤졌던 녀석도 같은 생각을 했었던 모양인지, 가방 안에는 게임기 하나 말고는 들어있는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식으로, 도로 위에는 무수한 차량들이 보였다. 뭔가의 습격을 받아서 구겨진 차도 있었고, 뒤집어 져서 인도 한 쪽 구석에 처박힌 차량도 보인다. 많은 사람들이 괴물들이 등장하고 나서 본능적으로 자동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나가겠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나가기 위해서는 랜드 클리어를 해야 했을테니까.

"이 차 안에 들어있는 기름만 다 뽑아내도 3년 정도는 연료 걱정이 없겠는데."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했을걸요."

그래, 차에서 기름 뽑아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지금 도시를 굴러다니는 차량의 대부분은 그냥 빈 껍데기일 것이다. 조금 더 걸어가자,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잠깐만."

나는 그렇게 말한 다음에 서지현을 끌어안고 건물의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옥상에 올라간 우리는 그 웅성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시장 같은 건가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장 같은 게 아니라 시장이 맞는 모양이다. 한 밤 중이지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고, 좌판대를 펼쳐놓고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물건을 사기 위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보였다.

"물물 교환 같은데."

거래 화폐는 영양바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사려는 사람이 건내준 영양바를 확인한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건을 건네준다.

"따로 지키고 있는 괴물들은 없는 것 같아."

"어차피 서울을 나갈 수는 없으니까요. 도망쳐봤자죠."

그래, 랜드 클리어가 끝난 서울 인근의 위성도시들과는 다르게 서울은 멀쩡하게 랜드 마크가 살아있다. 그렇기에 최현우도 사람들이 멋대로 돌아다니는 일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다. 어차피 반란을 일으킬 수는 없을테니까.

"근처에서 소리를 훔쳐 들으며 시세를 좀 확인해보자고."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보니, 통조림 하나에 영양바 세 개였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맛이 더럽게 없으니까요."

제 아무리 영양바 3개면 하루를 버틸 수 있다고 해도 맛이 없는 건 없는거다. 이천에서 그거랑 물만 먹으면서 버텨본 우리는 그게 굉장히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물론 통조림도 딱히 맛이 훌륭한 편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영양바 보다는 훨씬 맛있으니까.

"제발요, 벌써 3일째 배급 나오는 개죽 말고는 아무것도 못 먹었습니다."

"그것 참 안 된 이야기군. 통조림 한 개에 영양바 세 개다."

"조금만 더 싸게 해주시면..."

"꺼져, 아니면 처 맞고 꺼질테냐?"

나는 근처에 숨은 채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죽이라. 뭐, 배급 같은 것도 나오는 건가.

"언니, 얼마야?"

"손은 2개, 입은 3개, 연애는 5개. 소지한 장화 없으면 연애는 금지야."

"장화 없이 6개로 어때?"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물건을 파는 사람만 있는게 아니라, 몸을 파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창녀라는게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유서깊은 직업이라고 하잖아. 나와 서지현은 시장 근처에 숨어서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작은 규모는 아니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속삭였다.

"관리자 같은 사람도 있겠죠. 저거 봐요."

서지현이 가리킨 곳에는 무장을 하고 시장을 걸어다니는 녀석들이 보였다.

그래, 시장이 있으면 보호세랍시고 돈을 걷는 깡패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삥을 뜯기 위해서는 당연히 윗선에서의 묵인이 있어야 한다. 이 시장에서 사람들 삥을 뜯는 녀석은 최현우와 관련이 있겠지.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무기를 든 채로 주변을 돌아다니던 녀석에게 아이 한 명이 접근해서 귓속말로 뭐라고 속삭인다.

이야기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고, 시장을 순찰하던 다른 사람들을 모아서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들은 녀석들이 각자 흩어져서 좌판대를 펼쳐놓은 사람들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손신호를 몇 번 보낸다.

그리고, 좌판대를 깐 사람들이 재빠르게 장사를 접고 돌아가기 시작한다. 뭔가에 쫒기는 것처럼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다. 뒤늦게 와서 뭔가를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좌판대를 깔고 있던 사람들은 매몰차게 거절한 다음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 눈치를 확인한 다른 사람들도 서둘러 흩어진다.

"무슨 일이지."

내가 던진 질문은 30분 정도 지나자 해결되었다.

눈 앞이 캄캄해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싶어서 귀를 기울여 봤지만, 누가 접근하거나 한 건 아니다. 그냥, 시야가 가려진거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뭔가가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리고, 뭔가가 땅을 스물스물 기어다니는 소리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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