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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47화 (147/237)

# 147

눈먼 자들의 도시

크리스탈 잔이 놓여 있는 사무실 안에 들어간 우리는 미리 이야기 해두었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럼, 수원도 어느정도 안정화 된 것 같으니. 우리는 예정했던대로 떠날까 하는데."

내 말을 들은 이시은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고민하는 시늉을 하다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막 생존자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참이야. 조금 더 머물러 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그렇습니다.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이시은의 말에 다른 사람들이 동의하는 듯한 대사를 던지지만,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힘들것 같아요. 사실 지금만 해도 많이 늦어진 감이 있거든요."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이 다소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상황이 어렵습니다. 성남에서 새로 들어오게 된 생존자의 숫자가 예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을 뿐 아니라, 아마 더 들어올 거에요."

김용천의 말을 듣고 잇던 나는 다소 차가운 음색으로 대답했다.

"이봐, 우리는 이미 이야기가 끝나있었던 것 같은데. 수원이 어느정도 안정화가 되고, 괴물들의 공세를 너희들끼리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수준이 되면 떠나겠다고."

김용천이 내 말에 잠깐 있다가 탄식을 섞어 대답했다.

"그랬었죠. 기억하고 있습니다."

"기억하고 있는데 굳이 이런 제안을 다시 하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우리가 너희들 사정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움직일 수는 없어."

서지현이 맞아요, 라고 운을 뗀 다음에 말을 이었다.

"우리는 가평으로 갈 거에요. 거기에 제 부모님이 있어요. 이런 말 들으시면 조금 상처 입으실지도 모르겠지만, 저희가 여러분을 돕고 싶어서 저 아래에서 여기까지 올라온게 아니에요."

그 와중에 이경석이 한 마디 한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이만큼 지났습니다."

"그렇다면 시신이라도 확인해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 부모님이라고 해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서지현의 날선 목소리에 이경석이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닙니다. 그저..."

"오빠, 그만해. 우리는 이미 도움을 많이 받았잖아."

이시은이 이경석을 제지한 다음에 말을 이었다.

"큰 도움을 받았어, 고마워. 미리 이야기 된 것처럼, 더 이상 잡아두지는 않을게. 부모님,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고마워요."

우리가 지어낸 이야기는 대충 그런 핑계였다. 서지현의 부모님이 가평에 있고, 부모님의 생사를 확인하고, 살아있으면 데려오고 아니면 시신이라도 확인할 생각이다.

자기 부모를 가지고 거짓부렁을 하는 이야기이기에 서지현이 거북해 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이 제안은 서지현이 먼저 한 거였다.

인생에 도움도 안 되던 사람들이었는데, 이럴 때 핑계로라도 팔아 치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식이었지. 덕분에 우리는 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봐, 성남시의 방어 정도라면 지금 숫자로도 충분하잖아? 그런 걱정되는 표정 짓고 있지 말라고."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그럼 된 거잖아. 우린 곧장 떠날거니, 그렇게 알고 있어. 이별 인사는 방금 나눈 셈으로 치자고. 이상 끝."

대화를 마친 나와 서지현은 일부러 의자 끄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크리스털 잔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기동 중이었어요."

좋아, 최현우. 가평으로 애들 좀 보내봐. 우리는 그 사이에 서울로 진입할테니까. 잠시 뒤에 이시은이 우리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일단은, 우리가 대화를 나눈 장소를 임시 사무소 비슷한 형식으로 꾸며놓을 생각이야. 매일 아침 8시에 거기에 모여서 회의를 하는 식으로."

"진짜 회의를 하는 건 아닐테고."

내 말에 이시은이 픽 웃었다.

"그럴리가 있겠어? 거기에서 하는 건 그냥 회의 시늉이야. 적절한 회의 내용은 내 쪽에서 꾸밀 생각이고. 진짜 회의는 다른 곳에서, 7시에 진행 할 예정이야."

하긴, 쓸데없는 걸 물어봤네.

"해 지고 있다."

우리는 곧장 성남을 떠나 서울로 진입할거다. 복정동 쪽을 지나면 바로 송파구에 도착하겠지. 그럼 거기부터는 서울이다. 어차피 짐은 다 챙겨놨으니. 나는 잠깐 심호흡을 하고 나서 서지현을 바라봤다.

"가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 하는 길이 멀지는 않지만, 도착하게 되는 장소는 마침내 서울이다. 내가 지난 세월동안 감방에 갇혀서 꿈에서도 시달리던 장소에 마침내 내 발이 내딛어 지는 거다. 그리고,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실험 삼아 눈을 감고 움직여 보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눈을 감으니, 다른 감각들이 서서히 민감해지기 시작한다. 옆에서 걷고 있는 서지현의 발걸음, 바람이 무너진 건물을 스치고 지나가며 내는 소리. 코를 통해 느껴지는 온갖 종류의 냄새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얼마나 걸었을까. 서지현이 옆에서 한 마디 던졌다.

"눈 감고도 잘 걸으시네요."

그러게 말이다.

"잠자리에서 하도 불을 꺼놔서 적응했나보지."

"그 이야기, 한 번 더 하면 꼬집을거에요."

얼마나 더 도로를 따라서 걸었을까. 도로 왼쪽에 높게 쌓인 언덕이 보인다.

"태평 공원 근처네요.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복정역이 나올 거에요."

그리고 거기부터 서울이다. 당연히, 들어가기 전에 거쳐야 하는 장소가 있겠지.

"암흑이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울과 성남의 경계를 나누는 자그마한 개울. 그 너머에 펼쳐져 있는 건 빛 한 조각도 통하지 않는 거대한 암흑의 커튼이었다.

"엄청 커다란 암막 커튼 같네요."

저 멀리 탄천에서 뻗어나온 작은 지류 너머에서 너울거리는 검은 장막에 대한 우리의 감상이었다.

"사람들의 눈에 띄면 안될거야."

우리는 몰래 들어온 거다. 몇 사람에게 들키는 정도는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안 괜찮을지도 모른다. 괜찮을지 안 괜찮을지 모르면 안 하는게 최고다. 고로, 걸리면 안된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존자들도, 안전 지대에 모여 있지는 않을거에요."

그래. 어차피 서울의 괴물들은 최현우의 통제를 받고 있을거다. 굳이 안전지대가 아니라고 해도 최현우에게 복종하는 이상 길 가다가 괴물 만나서 죽을 일은 없을거다. 녀석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대한 암막 커튼은 점점 가까워져서, 이제는 손을 뻗으면 쓰다듬을 수 있을 정도의 거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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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랜드 클리어 - 서울

목표 : 안전지대로 설정된 경복궁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피안의 장막이라는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해당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서울 시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랜드마크'를 제거해야 한다.

※ 미션을 수락하지 않으면 서울로 진입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 해당 미션을 클리어 하기 전까지는 서울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이 미션을 일회성입니다.

보상 : 3500pt, 장비(랜드마크 제거 참가자 한정), 피안의 장막 소멸, 설정된 구역 밖으로의 이동 제한 해제(구역 내부의 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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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이라. 나는 멍하니 떠오른 미션을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생존자들이 지금 경복궁에 머무르고 있을 확률은 굉장히 낮다. 나와 서지현은 미션을 수락하고 서울로 발을 내딛었다. 서울과 성남의 경계에서 흔들거리는 거대한 장막이, 코 앞까지 다가왔다.

손을 뻗어 흔들리는 장막에 손을 가져가자, 그대로 눈 앞이 컴컴하게 변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완전한 어둠. 나는 살짝 당황해서 장막에서 멀어졌고, 다시 시야가 돌아오기 시작한다.

"어때요?'

서지현의 긴장한 것 같은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통과하기는 힘들 것 같아."

"주변에 입구가 있겠죠."

그리고 안에 들어가게 되면 수원으로 진입할 떄와 마찬가지 절차를 거친다. 입구로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뭔가 튀어나오겠지. 수원의 컨셉은 물이 없는 사막이었으니...

암막 커튼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뭐가 튀어나오려나. 맹인 검사 같은 거라도 튀어나와서 우리의 앞길을 막으려나.

"하. 이건 뭐야."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나 세워져 있어야 하는 산문이 떡하니 일렁거리는 검은 장막 사이에 서 있었다. 이런걸 뭐라고 하더라. 그래, 일주문. 사찰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가장 첫번재 문이다.

딱 봐도 여기로 들어가라는 뜻 같은데. 안으로 진입하자. 우리가 지나왔던 문이 검은장막에 휩싸여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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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광기의 사찰

목표 : 서울로 들어가는 입구, 그 너머에서 발견된 것은 거대하고 오래된, 희미한 비린내가 남아있는 사찰이었다. 서울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어쩐지 모르게 스산한 사찰을 지나가야 할 것 같다.

보상 : 750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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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사찰이었냐."

다소 황당한 표정을 지은 채로 주변을 살펴보던 나는 앞에 서 있는 녀석들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떙중들이."

머리 밀고 가사 걸치면 다 스님인 줄 아나. 입고 있는 가사는 피 범벅이고, 녀석들의 입가에는 무슨 고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고기가 틀림 없는 시뻘건 살점들이 엉겨붙어 있다. 거기에 더해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호리병. 저 안에 들어있는게 물일까, 술일까?

어쨌든, 머리 밀면서 불심도 함께 밀어버린 것 같아 보이는 땡중 자식들은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었다.

"보시 하러 오셨습니까."

한 녀석이 눈을 감은 채 우리를 보고 물었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녀석을 보고 있다가 기가 막혀서 한 마디 했다.

"미쳤냐?"

나도 보는 눈이 있고, 지금 시야에 잡히는 풍경이 있는데. 너 같으면 니들 같은 자식들에게 보시를 하러 올 것 같냐. 하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이건 절이 아니라 절처럼 꾸며놓은 정신병자 집단 같은데.

"주둥이에 엉겨붙은 피랑 살점이나 좀 떼고 말하지 그래요?"

서지현의 말에 그들이 눈을 감은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렇습니까. 그렇군요. 일전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하지만 지나갈 생각인데. 길 좀 비켜주지 그래."

내 말에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리하시지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녀석들은 비켜주지 않고 있었다.

"비켜야 지나가지."

"춘삼월 달그림자가 강물에 드리웠습니다."

공양에 올라온 나물을 양귀비 기름으로 무쳐 먹은건가. 왜 다들 정신이 나갔어 그래. 녀석들이 입을 벌리자. 그 안에 숨어있던 날카로운 이빨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야, 중이 사람 뜯어 먹으려고 드네. 살아있는 거 죽이지 말라는 규칙이 있지 않아?"

"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규칙도 없습니다."

녀석들이 달려든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지만. 나는 녀석들 중 하나의 머리통을 붙잡아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으며 말했다.

"그런걸 화두라고 하던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바닥에 처박힌 머리를 발로 한 번 강하게 차며 중얼거렸다.

"내가 잘은 모르는데. 흰소리 떠든다고 다 화두라고 하지는 않을 걸."

그런 건 정신병이라고 하는 거야.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환이지. 최소한, 사람 뜯어먹겠다고 달려드는 괴물딱지들이 하는 말이 화두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설사 진짜 뭐 대단한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르지만.

"알 바 아니지."

대충 스물 정도 되어보이는 짜가리 스님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들기 시작한다. 나에게 달려들던 서너 명의 식인 스님 몸통을 토막치며 나는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슬슬 입적해라."

뭐, 진짜 스님을 죽이면서 입적하게 해준다고 하면 불교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겠지만. 이것들은 딱 봐도 스님이 아니잖아. 부처 얼굴에 똥칠을 해도 이 정도면 아주 레미콘에 똥을 담아서 들이 붓는 수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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