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서울로 가는 길
표식을 살펴보고 있던 와중에, 서지현이 나를 보고 갑자기 팔짱을 끼면서 속삭였다.
"저기, 시체 보고 있기 너무 무서워서 그런데. 지현이는 그만 나가면 안될까요?"
나는 그 말에 입을 쩍 벌리고 서지현을 바라봤다. 도대체 뭐 하자는거야. 지현이 그만 나가면 안될까요? 라니. 왜 안하던 짓을 하고 그러는 거지. 어이가 없어서 서지현을 보니, 그녀가 꽤 진지한 표정을 한 채 문 쪽으로 눈짓을 하고 있었다.
...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이유가 있는 모양이다. 나는 미련 없이 서지현의 말에 따라 문을 나섰다. 한 동안 걸어서 건물을 나온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크리스털 잔. 마력을 통해서 통신하는 장치였어요."
"그래? 그렇게 대단할 건 아니잖아."
무슨 일이 생길 때 마다 말 탄 사람을 보내서 편지를 주고 받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굉장히 구조가 복잡했어요. 저도 한동안 눈치 채지 못할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아직 채널이 열려있었던 것 같고."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최현우가 우리 대화를 듣고 있었다는 소리네."
서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우리가 별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서지현이 여전히 심각한 표정이다.
"왜 그래,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게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그 크리스털 잔의 용도를 알 수 있었던 건... 원주에서 제르멩이 만들어 놓았던 작품을 몇 개 봤기 때문이에요."
나는 그 말에 잠깐 움찔했다.
"그럼 그 크리스탈 잔을 만든 녀석이 제르멩이라는 뜻이야?"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요.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에 우리 앞에 제르멩이 나타났다. 자연스럽게, 나와 서지현이 그를 경계하는 태도를 취했다. 녀석은 그런 우리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우선 밝히지. 그 크리스탈 잔은 내가 만든게 맞아."
그래? 그렇다면 곧장 궁금한게 한 가지 더 생기는데.
"그게 왜 저 녀석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던 거지."
내 말에 제르멩이 피식 웃음 소리를 흘린 다음 서지현을 보며 말했다.
"내가 만드는 작품의 가장 큰 모토는 모순이지. 열을 먹어치우는 화로가 대표적인 예 아니겠나."
제르멩의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렇죠, 하지만 원주에서 발견했던 서큐버스들의 식량 창고에서는 별 다른 모순점을 찾을 수 없던데요."
서지현의 대꾸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거야. 길게 말할 필요가 없어져서 참 좋군. 그 창고는 서큐버스 여왕의 요청을 들어주기 위해서 만들었지. 남이 부탁해서 만들어 주는 작품에는 내 취향을 반영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네. 내가 가지고 있을 작품이 아니거든. 그 크리스털 잔도 누군가의 요청을 받고 만들어 준 거라네."
그 잔을 만든 건 제르멩이 맞지만, 소유한 자는 제르멩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소유주가 누군지 궁금해지는 군."
내 말에 녀석이 잠깐 고민하나 싶더니 대답을 돌려주었다.
"내 오랜 친구였던 녀석이지. 이 세상으로 넘어오자는 계획을 설립하고, 넘어오면서 이 세상의 점령을 위한 규칙의 협상을 주도했어. 아, 잔을 건네 준 건 벌써 자네들의 시간 단위로 말하자면 수백년 전이야."
"이야, 골동품이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한 손을 가볍게 펼쳤다. 녀석의 손 위에 뭔가 문양이 하나 나타났다. 하얀색 동그라미.
"이 표식, 방금 전에 시체에서 발견하지 않았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내 손등을 슬쩍 흔들었다.
"네 녀석이 지팡이로 쳐서 만들어낸 표식과는 정 반대의 모양과 색깔이더군."
제르멩이 나와 서지현에게 남겨놓은 표식은 검은색 X자였고, 유성천의 시체에 남아있던 표식은 하얀색 O 모양이었다.
"그래, 그건 내 친구였던 녀석이 남긴 표식이지."
나는 그 말을 듣고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유성천은 물론이고, 이 주변 도시의 지부장들의 손등에 박혀 있는 표식은 모두 최현우가 내린 거다. 근데, 그 표식이 저 녀석의 친구가 남긴 것과 같다면.
"대충 감을 잡은 모양이군. 내가 자네들에게 내 표식을 남겼듯, 그 녀석 또한 누군가에게 자신의 표식을 남긴거야. 계약의 증거로서."
녀석이 계약의 증거로서 남긴 것이 그 하얀 O 모양의 표식이라면...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우리는 너와 계약을 한 기억은 없는데."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일방적으로 남겼을 뿐이야. 그렇기에 내가 남긴 표식은 자네들에게 힘을 허락하지 않고, 자네들이 내 표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려줄 수도 없어. 기껏해야 몇 가지 사소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지."
하지만 최현우는 다르다. 녀석이 인류의 배반자가 되면서 계약을 맺은 건 서울의 랜드마크나 검은 염소가 아니다.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제르멩의 친구, 그의 말에 따르면 그를 포함해서 이 세상에 굴러다니는 괴물들과 온갖 이상현상을 불러온 장본인.
그래, 그 정도는 되어야 녀석이 부리는 괴물 중에 랜드 마크 정도의 힘을 가진 것들이 있는게 이해가 되지. 더럽게 운 좋은 재벌 3세 놈의 새끼. 세상 망하기 전에 잘 먹고 잘 살던걸로는 부족해서 세상이 망하고 나서도 빵빵한 스폰서를 주워먹어? 인생은 역시 불공평하다.
"한참 뒤에야 만나 볼 것 처럼 말하더니."
내 말에 제르멩이 살짝 인사를 하며 대답했다.
"세상 살이가 내 맘대로 되지는 않더군. 다음에 만나게 될 때는, 최소한 월드 앵커가 머무르는 장소의 실마리를 찾고 난 다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설마하니 여기에서 그 표식을 보게 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나?"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가볍게 지팡이로 땅을 몇 번 두들겼다.
"나를 의심하는 건 괜찮다네. 지성 있는 존재의 가장 큰 특권이 만물에 대한 의심과 질문 아니겠나. 나는 마찬가지로 지성이 있는 존재로서 내 변호를 끝냈으니. 판단은 자네들이 해야겠지. 애초에 여기에 온 이유도 자네들이 나를 의심해서라기 보다는..."
"하얀 표식 때문이겠지."
내 말에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표식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는 제공해 주었어. 찾아온 목표는 달성 한 거지. 혹시, 따로 챙겨놓은 선물 같은거 있나?"
글쎄다. 나와 서지현이 멀뚱히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가 입맛을 다시고 말했다.
"야박하기는. 더 나눌 이야기 없으면 이만 돌아가보도록 하겠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서서히 모습이 흐려지다가, 이내 완전히 없어졌다. 자기 할 말 마치고 나면 돌아가는 거야 저 자식이 맨날 하던 일이니까. 어쨌든, 덕분에 얻게 된 정보는 있었다.
최현우는 랜드 마크 따위랑 계약한게 아니다. 좆밥이랑 계약했다면 최현우도 좆밥이겠지만, 거물이랑 계약하게 되면 계약한 녀석도 거물 비슷한게 되는 법이다. 잠깐 침묵한 채로 제르멩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크리스털 잔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두는게 좋겠지. 김용천을 향해서 걸어가던 나는 이내 멈춰서 턱을 쓰다듬었다.
"잠깐, 도청은 몰래 하니까 도청이잖아."
그리고 지금은 우리가 저 방 안의 크라스탈 잔이 도청기라는 걸 알고 있다. 도청기가 들키면 더 이상 도청기가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도청기를 통해서 이상한 정보를 흘려 녀석을 방심시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배낭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보다가 웃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 사람들과 헤어진 다음 가평으로 갈 생각이라는 식의 정보를 흘리고."
내 말을 서지현이 받았다.
"김용천을 비롯한 다른 수원의 생존자들은 주변의 다른 도시들의 생존자를 거두어들이고 조직이 안정화 될 때까지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럼 그 이야기를들은 최현우가 이래저래 머리 속이 복잡해질 것이다. 성남에 자리잡은 것들이 서울로 들어올 생각이 없다는 걸 직접적으로 확인했으니 딱히 그쪽에 신경 쓸 이유는 없다. 물론, 가지고 있던 땅이 남에게로 가 붙어버렸으니 빼앗고는 싶겠지만, 당장 급한 건 나와 서지현이 가지고 있는 참령이겠지.
그러니, 성남 쪽으로 공격을 보내는 대신 우리가 가겠다고 한 홍천 쪽으로 병력을 보낼거다. 당연히, 그 만큼 서울이 비게 될 거다. 그 틈에 우리가 재빠르게 랜드 클리어를 한다.
랜드 클리어가 끝나면 곧장 서울에 자리잡고 있을 사랑의 집을 최대한 때려부순 다음 귀환한다. 다 때려부술 수는 없을 것이다. 최현우가 이전에 내가 봤던 아가리나 삐에로 같은 녀석들을 얼마나 아래에 두고 있느냐에 따라서 좀 달라지겠지만...
많이 부술 수 없어도 괜찮다. 어차피 그건 덤일 뿐이다.
어차피, 우리가 랜드 마크를 제거하게 되면 더 이상 서울은 한 번 들어가면 최현우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나올 수 없는 감옥이 아니게 된다. 다른 말로는,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게릴라가 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출입이 자유롭게 된 다음에, 천천히 요리하면 될 것이다.
"어때, 시도 해 볼만 하지 않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패할 것 같지는 않아요. 게다가, 실패한다고 해도 딱히 잃은 건 없잖아요?"
우리는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김용천과 합류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가능 할 것 같은 이야기입니다. 성남에 머무르고 있던 생존자를 전부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꽤 많은 사람들을 모으는데 성공했으니까요."
성남 말고 남아있는 두 도시에서도 생존자를 끌어모으는데 성공하면 규모가 확 늘어나게 될 거다. 이시은이 벽에 기댄채로 대답했다.
"이미 안양과 안산에는 사람들을 보냈어. 상황이 썩 좋지 않다면 우리 쪽에서 병력을 파견해서 생존자들을 해방시켜야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 상황이라면 각 도시의 생존자들에게 스스로 성남으로 오라고 할 생각이야."
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올 것이다. 녀석들도 좋아서 그 도시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았을테니까.
"성남과 비슷한 규모의 생존자가 남아있다면, 약 1500-1700 정도의 병력을 구성 할 수 있을겁니다."
"다만, 단기전으로 끝내는 편이 좋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석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정도의 병력을 유지 할 수 있는 이유는 물자 보급을 위해서 따로 농사를 짓거나 사냥을 할 필요가 없기 떄문이니까."
그래, 우리는 지금 자급자족을 하는게 아니라, 이 세상에 아직 남아있는 잔여 물자를 빨아먹으면서 싸우는 중이다. 세상이 망하기 전에 쏟아져 나온 음식들은 언젠가 바닥을 보이겠지. 게다가 천명을 넘는 사람들이 충분한 식사와 물을 제공받기 시작하면 도시에 남아있는 잔여 물자가 빨려나가는 속도는 들판을 뜯어먹는 메뚜기 떼에 비견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계획이 성공하건, 성공하지 못하건... 우리 주변에 남아있는 물자가 다 떨어지기 전에 결판이 날 거야."
"우리에게 좋은 쪽으로 끝났으면 좋겠군."
우석진의 말에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여기까지 왔는데 최현우에게 질 수는 없다. 자, 그럼. 나는 손뼉을 한 번 크게 치고 웃었다.
"그럴듯한 연극 대본을 한 번 생각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