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알 사냥
식은땀이 살짝 흐른다. 내가 살짝만 유성천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해도 서지현이 위험해진다. 나와 싸우던 녀석이 갑자기 이죽거린다.
"내 땅에 왔을 때는 아주 입에 프로펠러라도 박아넣은 것처럼 나불거리더니만, 오늘은 조용하군 그래."
아, 뭐라도 좀 말해줬으면 하는건가. 그럼 못해줄 건 없지.
"옘병을 한다. 높게 쳐줘봐야 게임에서 버스 타는 찐따 비슷한 주제에 잘난 척은."
아주 누가 보면 지금 이 상황을 지가 만들어 낸 줄 알겠어. 하여튼 요즘 세상이 하 수상해서 스스로 해낸 건 아무것도 없는 자식들이 뭐라도 된 것처럼 까분다니까. 녀석이 잠깐 인상을 쓰나 싶더니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검에 다친 마물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전혀 치료되지 않다가 정신줄을 놓아버리던데."
"저런, 수의사는 찾아가 봤냐?"
내 이죽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트리거 기어, 지금이라도 넘긴다면 저 계집과 네 놈의 목숨만은 살려주도록 하지."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잠깐 행동을 멈췄다. 잠깐, 니들 우리 둘 중 하나가 트리거 기어를 가지고 있다는 건 아는데 정작 트리거 기어가 어떤 건지는 모르는 거냐. 이거 재미있는 상황이네.
"지랄하고 있네."
곧바로 대구를 돌려준 나는 허공에 수확자를 휘둘러 궤적을 몇 개 남기고, 그대로 녀석에게 날려보냈다. 잠깐 틈이 생기고, 그 사이에 나는 수확자에서 참령을 뽑아내 손에 몰래 쥐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보니, 에노테르를 들고 아가리와 싸우고 있는 서지현이 보인다. 여전히, 에노테르는 녀석에게 별 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중이다.
저 아가리도 서지현의 낫이 자기를 해칠 수 없다는 걸 알고, 거기에 대해서는 별 다른 방어를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건 서지현이 뿜어내는 마법 뿐이다.
참령에 얻어맞으면 후회하기도 전에 죽어버리겠지.
그게 중요하다. 죽는게 김희연이 아니라 아가리라는 점. 저 아가리가 죽고 나면 김희연 정도는 서지현이 순식간에 정리 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2대 3이 된다. 2대 5도 어떻게든 우리가 버티고 있는 실정인데. 여기에서 저쪽의 숫자가 줄어들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
나는 손 안에 들려있는 참령을 잠깐 만지작거리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걸 이제 어떻게 전해주느냐, 그게 문제인데. 생각을 하던 나는 주변을 휭휭 날아다니던 화살들이 뜸해진 걸 깨닫고 유성천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
녀석이 나를 흘긋 보고는 인상을 팍 쓴다. 왜 그래, 너도 옆에서 누가 지켜보면 쉬 못 싸는 성격이냐? 사내 자식이 옆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으면 그대로 허리를 지켜보는 놈 쪽으로 돌리는 깡다구가 있어야지. 이제 조금 있으면 발사할 것이다. 활을 들고 있는 유서천의 팔근육이 꿈틀거리는게 보인다.
"이번에는 방해하지 못할거다!"
그건 니 생각이고. 나는 녀석의 말에 픽 웃고는 허공에 궤적을 마구 남겼다. 칼을 집어넣지는 않았다. 허공에 수놓아진 궤적들이 나와 저 녀석들 사이를 막는 임시 장벽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우리 잘난 삐에로가 연기에 휩싸인채 내 눈 앞으로 튀어나왔지만...
"이미 늦었어, 이 히로뽕 맞은 맥도날드 마스코트 같은 새끼야."
벌써 날아간 단검이 유성천이 쏘아낸 화살을 다시 한 번 맞춰 구멍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바닥에 박혔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바닥에 떨어진 단검이 서서히 가루가 되어 부스러진다. 그리고,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흐려지기 시작한 궤적을 박살낸 이동현이 나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지현아! 미안한데, 나 단검이 다 떨어졌다! 더 이상 도움 주기가 힘들어! 빨리 끝내지 않으면...!"
내 말에 서지현이 순간적으로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단검은 내 체력을 약간 소모해서 뽑아내는 물건이다. 서지현도 그 점은 잘 알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단검 보라고!
뭐라고 말하려고 하던 서지현이 단검이 떨어진 자리를 흘긋 본 다음에 말했다.
"저라고 빨리 끝내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거 같아요?!"
그런 말을 하며, 서지현이 살짝 살짝 자리를 옮기기 시작한다. 거대한 아가리가 서지현을 노리고 검은 창을 마구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서지현이 침을 삼키고는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검은 창날을 최대한 에노테르로 막아내기 시작한다.
바닥에 박혀들어가는 검은색 창들. 서지현이 최대한 그 공격들을 피하던 와중 자신을 노리고 내질러진 김희연의 창을 가까스로 막아낸 다음, 그대로 뒤로 엉덩방아를 찧은채 살짝 뒷걸음 치다가, 손이 바닥에 닿은 김에 김희염의 땅 아래를 노리고 폭발을 일으킨다.
검은 아가리가 쩍 벌어지고, 분명히 제대로 작용했으면 김희연을 통구이로 만들었을 폭발은 가까스로 견제 정도만 가능한 수준의 작은 폭발로 축소되었다.
"저 아가리만 아니었어도!"
서지현이 가까스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약한 규모의 폭발을 몸으로 받아낸 김희연이 픽 웃으며 창으로 그녀를 겨눈다.
"함께 할 좋은 동반자를 만나는 것도 능력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서지현이 김희연의 말에 작게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지."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에 깊게 심호흡을 한 다음, 자신을 노리고 다시금 허공에 창을 빚어내는 아가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왼손 위에서 이글거리는 화염이, 아가리가 뭐라고 떠들기 시작하자 서서히 그 열기가 약해지다가, 이내 완전히 사라진다.
"이런...!"
서지현은 그렇게 안타깝다는 듯이 외치고 절박한 표정으로 들고 있던 에노테르를 마구 휘둘렀다. 당연히, 이번에도 휘둘러진 에노테르는 아가리의 몸을 훙훙 통과하기 시작한다. 아가리가 그 꼴을 비웃는 것 같은 웃음을 흘린다.
그리고 마침내 열두 번째의 공격.
- 갸아아아아아아!
마침내 허공에 떠 있던 아가리가 몸을 바르르 떨며 비명을 지르며 마구 찌그러들기 시작한다. 한도 끝도 없이 찌그러들던 아가리는, 마침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지워져버렸다.
서지현이 참령을 끼워넣은 에노테르를 허공에서 몇 번 돌리고는 김희연을 보면서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떡해, 창녀야. 니 동반자가 사라졌어. 이제 혼자네?"
김희연이 눈에 띄게 당황한다. 그야, 2대 1이라고 해도 사실 상 서지현을 붙들어 두고 있던 건 방금 전에 사라진 그 아가리다. 아가리가 없어진 상황에서 김희연은, 냉정하게 말해서 한입거리도 안 된다. 서지현이 발을 들어올린 다음, 그대로 땅을 내려 찍자. 김희연이 서 있는 곳 아래에서 폭음과 함께 만들어진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는다.
"아, 아아아아아악!"
첫 번째 불기둥을 피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이후에 연달아서 솟구쳐 올라오는 불기둥을 전부 다 피하는 건 힘들었고, 결과적으로 서지현이 뿜어낸 불꽃이 창을 들고 있던 김희연의 오른팔과 오른 다리를 날름 잡아먹었다.
바닥으로 창이 떨어지고, 털썩 주저앉은 시커멓게 타버린 자신의 오른팔과 다리를 보고 비명을 지른다.
"이게, 이게! 다가오지마!"
이내 발악을 하듯이 서지현을 바라보며 빨간 눈을 번쩍인다. 서지현의 양 팔과 다리에 문양이 새겨진 새빨간 고리가 나타난다. 괜찮으려나, 저 구속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마력이 느껴진다. 그리고 김희연이 서지현보다 마력 능력치가 높을리는 없는데.
"많이 급했나봐? 하긴, 사람이 너무 아프면 제 정신이 아니게 되긴 하더라. 간호사 일 하다보면 그런 경우 많이 보거든. 딱히 네 의지가 약한 건 아니야."
서지현은 자신의 양 팔과 다리를 조이는 구속을 흘긋 보고는 픽 웃었다. 그녀를 묶고 있던 구속구가 서지현을 놓아준 다음, 오히려 저 멀리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유성천에게 날아가, 그의 사지를 묶어버린다. 매우 당연한 결과.
"이런 젠장, 김희연. 이거 풀어!"
김희연은 우성천의 말을 듣지 못한 채 몸을 덜덜 떨면서 입에서 침을 흘리고 있다. 그걸 바라보던 와중, 삐에로가 또 뭔가를 한 아름 꺼낸 채 나를 보고 키들거리기 시작한다.
폭죽상자라. 녀석이 이히, 히힉! 하는 소리를 내면서 상자 옆에 늘어져 있던 끈을 당기자. 피피피융, 하는 소리와 함꼐 나를 노리고 오색빛깔의 폭죽들이 벌빛처럼 쏟아져내린다. 재빠르게 쏟아지는 지역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폭죽 몇 개가 내 등짝을 후려친다.
"지현아, 빨리 끝내고 나 좀 도와줬으면 하는데!"
상황을 훑어보던 이동현이 외쳤다.
"빠지자!"
"하하, 누구 좆대로, 니 좆대로?"
가겠다고 하면 그냥 둘 것 같냐? 이제 우리가 승기를 잡았는데. 니들은 못 도망쳐 새끼들아.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 이동현에게 내가 따라붙자, 녀석이 재빨리 자기 손등에 입을 가져가 뭐라고 중얼거린다.
- 으훗, 아하하하하핫, 크흡... 푸하하하하하하!
광대가 갑자기 미친듯이 웃음을 터뜨리며 나와 이동현 사이에 섰다. 그리고는 서지현을 향해 저글링 클럽을 몇 개 던졌다. 낫으로 김희연의 정수리를 내려 찍으려고 하던 서지현이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물건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보호막을 친다.
보호막에 닿은 저글링 클럽이 폭발한다.
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서지현이 만들어낸 보호막이 통째로 뒤흔들리다가 박살나버렸다. 그 틈에 이동현이 오줌까지 싸면서 몸을 떨고 있는 김희연의 뒤통수를 손으로 후려쳐 기절시켰다.
"젠장, 고맙다!"
김희연이 기절하자, 마침내 유성천의 사지를 묶어두고 있던 붉은 고리가 사라진다. 곧바로 녀석들이 김희연을 부축 한 채 도망치기 시작한다.
"쫓아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데..."
움직이려고만 하면 갑자기 삐에로가 정신줄을 놓은 것처럼 연기와 함께 순간이동을 하며 나와 서지현의 앞길을 막아버린다.
"너 임마,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우리한테 죽어."
지금 우리 가봐야 할 곳 있으니까 방해하지 말고 꺼져. 녀석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에 어디서 꺼내놓은 건지 외발의자를 탄 채로 단검이나 저글링 클럽을 마구 던지고 받으며 웃음을 터뜨린다.
"어쩔 수 없네요. 추적은 포기하고."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쇼핑몰 쪽을 향해 턱짓했다.
"다른 사람들도 개고생 중일테니, 이 녀석 후딱 처리하고 가서 도와요."
그래, 어차피 녀석들이 도망친 이상에야 쫒아가기도 애매하다. 어차피, 여기에서 이 정도로 피해를 봤으면 초기 목적은 달성했다. 이번까지 막아내고 나면 수원 위에 있는 도시 세 곳이 모두 병신이 된다. 이미 마물을 뽑아내던 그 거지같은 사랑의 집인지 뭔지 하는 건 우리가 대부분 박살냈으니까.
"자요."
서지현이 나에게 다시 참령을 건네주었다. 원래 서지현이 쓰는 것 보다는 내가 쓰는 편이 더 효율이 높기는 하다. 나는 앞에서 칼 들고 싸우는 전문이고, 서지현은 약간 거리를 두고 폭발이나 화염으로 싸우는게 전문이니까.
다시 참령을 수확도에 끼운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아까랑은 좀 다를 걸."
방금 전까지는 신경 쓸 게 엄청 많았으니까. 저 새끼가 자꾸 꺼내는 기기괴괴한 서커스 도구도 거지같았고, 그 와중에 자기도 뭐라도 해보겠답시고 검을 뽑아 달려드는 이동현도 짜증났다. 그 와중에 서지현은 케이프가 터지는 바람에 보험이 없어졌지, 아가리는 자꾸 서지현의 마법을 약하게 만들지. 그 와중에 유성천은 활 들고 뜸들이면서 서지현의 숨통을 노리지.
끔찍하다. 방금 전처럼 또 싸우라고 하면 가능하면 피하고 싶을 정도로.
- 아하하하하.
녀석이 갑자기 마술사 모자 하나를 꺼내더니 그걸 막대기로 툭 쳤다. 안에서 풍선이 우수수 쏟아져나온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니가 무슨, 천사소녀 네티냐?"
내 나이가 임마 서른이 넘었어. 어디서 풍선을 들이미는거야. 그런 건 애들이나 좋아하지. 나는 뽀드득 거리는 소리 싫어해. 닭살 돋는 기분이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또 뭔가요. 터지나?"
서지현의 물은이 끝나기가 무섭게 풍선에 기괴하게 뒤틀어진 얼굴이 떠오르고, 우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