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
알 사냥
그래, 대충 상황은 알아들었다.
"밤이라. 왜 하필 밤일까요."
서지현이 그렇게 궁시렁거리면서 옷과 장비를 걸치기 시작한다. 나도 옷과 장비를 걸치며 그 말에 대답했다.
"우리 엿 먹으라고 그러는 거겠지."
"제가 누구한테 엿 먹고 웃으면서 넘기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런 대답을 돌려주며, 서지현이 살벌한 표정으로 에노테르의 날을 살펴보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니들은 하필이면 오늘 이 맘 때를 택한 걸 소름끼치도록 후회하게 될 거다. 지금 기분이라면 식인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와 서지현의 얼굴에는 요 근래 거의 드러낸 적이 없는 지옥같은 살기가 드리워져 있었다. 김용천은 우리에게 준비가 끝나면 바로 1층의 안내 데스크로 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준비가 끝난 우리는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어떻게 쓸어버리면 될까."
내 말에 김용천이 대답했다.
"야간 경계를 서고 있던 인원에게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약 450마리의 괴물과, 세 지역에서 전부 긁어 모은 것 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함께 이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새끼들은 내일 아침이 되면 이슬처럼 사라지기라도 하는 거냐.
"... 확 도장 찍어버릴까."
지금은, 삼만 오천의 유령 병사를 모두 일으켜서 수원으로 다가오는 잡것들을 토막쳐 바베큐 파티를 여는 광경을 꼭 좀 보고 싶은 기분이다.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아, 그거 제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일단 남아있는 한 조각 이성의 끈이 우리로 하여금 섣부르게 서류에 도장 찍는 행위를 제지했다. 어쩌면 이래서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젊은 사람들이 미국 대통령을 못 하는게 아닐까? 제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머리 끝까지 화가 치솟아서 핵배낭에 암호 입력하고 버튼을 눌러버릴지도 몰라.
청춘 남녀가 잠자리를 방해 받으면 솟구치는 분노는 하늘을 뚫는 법이다.
살벌하기 그지 없는 우리의 표정을 바라보던 우석진이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다음에 말했다.
"병력 구성이 조금 달라. 눈에 띄는 점이 몇 개 있는데, 아무래도 이번에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이야."
"그래? 잘됐네. 우리도 마음 단단히 먹었어."
다 쓸어버릴 각오. 내 말에 이경석이 대답했다.
"우선, 이전에 말씀하셨던 그 이상한 활을 쏜다는 녀석을 포함해서 세 명이 눈에 띕니다. 아무래도 세 도시의 지부장 같습니다."
그래, 직접 오셨다 그거지.
"우선이라고 했으면 그거 말고 또 있다는 소리지?"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괴물 두 마리가 눈에 띕니다. 녀석들 주변에는 다른 괴물들이 없어요. 아무래도, 뭔가 특별한 녀석들 같습니다."
"생김새는?"
"하나는 삐에로야. 다른 하나는... 그러니까, 입."
입이라니, 뭔 소리를 하는거야. 나는 이시은의 대답에 고개를 갸웃했다.
"입이라니."
내 말에 이시은이 자기 입을 약간 벌리고 검지로 툭툭 치며 대답했다.
"입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 엄청 커다란 입 하나가 둥둥 떠다니는 형태야."
그래, 그냥 괴물들과는 모습부터 약간 다르네.
"서울에서 지원을 해준 것 같은데."
우리가 녀석들의 도시로 밤마실을 나갈 떄에는 그런 녀석들이 보이지 않았다. 녀석들이 진작부터 동원 할 수 있었다면 나와 서지현을 잡는데 그 녀석들을 동원하지 않았을리가 없다. 그러면 뭐, 서울에서 받아온 거겠지. 애초에 녀석들이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상황 유지에 급급했다면 오래 가지 않아 무너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최현우 그 새끼도 트리거 기어를 탐내는 입장에서 우리를 곱게 보내 줄 생각은 없었을테고.
"두 마리와 세 명이라."
조심해야 할 것들을 파악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스스로 싸대기를 한 번 때렸다.
"좋아. 아쉬운 건 아쉬운대로 떠내려 보내고."
어쨌든 싸워야 할 시간이다. 몇 시에 싸울지는 저 자식들이 정했으니, 누가 이길지는 우리가 선택할거다.
몰려온 숫자와 병력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율을 보니 녀석들도 이번에 아주 단단히 벼르고 왔다. 다른 말로는, 여기에서 큰 피해를 주며 막아내는데 성공하면 그 다음은 일사 천리라는 뜻이다.
성남, 안양, 안산.
어디를 먹게 되어도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 마침내 뚫리게 된다. 마침 지금 기분도 매우 안 좋으니까. 누구한테 시비 걸기에는 딱 좋은 상황이다.
"가자."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은 괴물들과, 거기에 따라붙은 사람들을 상대하는데 집중해."
"그러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부장으로 보이는 세 명과, 특이해 보이는 괴물 두 마리는 나와 서지현이 상대해야 할 거다.
게다가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세 명과 두 마리 중 세 명 쪽은 저 녀석들의 리더 같은 존재들이다. 죽고 나면 괴물들은 몰라도 사람들은 사기가 확 꺾인다. 그렇게 되면 병력의 규모가 제법 있어도, 여기에 있는 생존자들로도 충분히 방어 할 수 있겠지.
사람들이 분주히 싸움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나와 서지현도 마찬가지로 쇼핑몰을 나와 사람들 앞에 자리잡았다.
"네 자식들!"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는 세 명의 눈이 상당히 살벌하다.
"이것들 봐라."
그렇게 당한 것 치고는 우리를 부를 때 욕도 섞지 않고, 침착하다. 나는 슬쩍 녀석들 뒤편에 자리잡고 있는 두 마리의 괴물을 바라봤다. 정말로, 하나는 삐에로고 다른 하나는 그냥 입만 둥둥 떠 있는 형태구나. 나는 비웃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니들 저거 믿고 여기까지 기어온거냐?"
내 말에 녀석들 중 활을 든 놈이 대답했다. 아마 성남의 지부장인가 뭔가 하던 녀석으로 기억하는데. 유성천이었지.
"여기에서 네놈들도 끝이다!"
그건 두고 봐야 아는 거고 임마. 보자, 저 눈깔 뻘건 여자는 주무기가 창이었지, 나머지 하나는 이동현이라는 녀석인데, 검을 쓰는 걸로 기억한다. 서지현이 녀석들을 슥 보다가 빨간 눈의 여자를 보고 픽 웃었다.
"어머, 창녀. 또 보네요. 이름이 김희연이었나."
"닥쳐!"
서지현의 말에 김희연이 격하게 반응한다. 굳이 따지자면 창을 들고 있으니까 그렇게까지 틀린 말은 아니지. 서지현이 픽 웃고는 마찬가지로 살벌한 기세를 풍기며 대꾸했다.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는거야. 혹시 생리 불순?"
서지현은 지금 나 만큼 기분이 안 좋은 상태여서, 말에 필터가 걸려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 침을 질질 흘리고 있던 뒤편의 커다란 아가리가 몸을 부르르 떨다가 나와 서지현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그래, 와라. 어차피 너도 제대로 맞으면 한 방이야. 녀석은 우리를 향해 달려들다가 갑자기 움직임을 뚝 멈추고는. 키들거리며 웃는다.
- ※&&§◎&§◎●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는 소리를 내뱉자. 녀석의 몸 주변에서 시커먼 창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력이다. 내가 슬쩍 서지현을 바라보자. 그녀가 난감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한다.
"잠깐, 이건 못 빼앗겠어요."
저 뇌도 없어 보이는 단순한 아가리가 서지현보다 마력 능력치가 높다고? 나는 그 말에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며 허공에 시커먼 창을 만들어내는 녀석을 바라봤다.
서지현이 곧장 날아가서 아가리를 향해 에노테르를 휘둘렀지만, 마치 허깨비처럼 슥 하고 에노테르가 녀석의 몸을 통과한다. 피해는 거의 없다. 단면이 살짝 흐려졌던 커다란 아가리는 이내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생긴거는 철근도 씹어먹게 생긴게 물리 공격이 제대로 통하지 않는 허깨비라니. 이번에 저 녀석들도 아주 제대로 준비를 해 온 모양이다.
"조심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도 다치지 말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 걸음 앞으로 나가며 녀석들을 슥 훑어봤다.
"친구들, 우리가 도망만 다녀서 제대로 싸워 볼 기회는 없었지?"
니들일아 놀아주는 것 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서 그랬어. 나는 수확자를 뽑아들고는 눈을 빛냈다.
"찾아왔는데도 그렇게 대접 할 수는 없지. 기대하라고."
- 으호호호호호!
피에로가 나를 바라보다가 그런 소리와 함께 한 번 풀쩍 뛰어올라서는 뭔가를 내 쪽으르 집어던진다. 빛살처럼 쏘아지는 섬뜩한 섬광들. 살펴보니 단검이다. 움직이면서 검을 휘두르는 동시에, 나는 계속해서 유성천을 살피기 시작한다. 가장 조심해야 하는 녀석은 저 놈이다. 나는 몰라도, 잘못 하면 서지현이 저 화살에 당하는 경우가 생긴다.
"얼씨구."
갑자기 눈 앞에서 피에로가 확 하고 연기를 피어올리더니 사라진다. 시선을 돌려보니 내 뒤에서 등을 노리고 단검을 찌르는 중이다.
"뭐야 이건."
막으려고 검을 들어올리니, 녀석의 손에 쥐어진 단검이 갑자기 확 하고 연기로 변해서 내 검을 통과해 지나간 다음, 다시 단검으로 변한다. 고개를 확 뒤로 젖혀 단검을 피하고 나자, 녀석이 다시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저 삐에로 녀석의 공격은 못 막는다.
게다가 공격이 느린 것도 아니다. 그렇게 싸우고 있으려니 갑자기 나를 향해 날아오는 섬광같은 화살, 그리고 뒤편에서 다른 녀석이 휘두르는 검까지. 나는 삐에로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한 번 잡히기만 해봐. 그 거지같이 탐스러운 커다란 딸기코를 뜯어내서 잼을 만들어주마."
비겁한 자식들, 1대 1로 싸우잔 말이다.
유성천은 멀리에서 나와 서지현을 향해 번갈아 가며 화살을 날린다. 김희연이 떠다니는 아가리와 함께 서지현을 노리고, 이동현이 삐에로와 함께 나를 상대한다.
이동현의 검이 내 머리를 노리고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하나 둘. 이 정도는 코제이션까지 발동시킬 필요도 없다. 나는 타이밍을 맞춰 검을 휘둘렀다.
서로의 몸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 후발선타가 발동되며 내 검에 속력이 붙는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거기에서 웃으며 내 쪽으로 단검을 휘두르는 삐에로가 보인다. 아, 이건...
나는 잘 발동되는 중이던 후발선타를 취소하고 급하게 몸을 옆으로 미끄러뜨려야 했다. 삐에로의 단검이 내 뺨을 살짝 스치고 지나간다. 알싸한 느낌과 함께 뺨을 타고 피가 흘러내린다.
"잠깐."
그러고보니 화살이 날아오지 않고 있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급하게 유성천을 바라봤다. 녀석은 서지현을 활로 겨눈 채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방해하게, 둘 것 같냐?!"
그냥 좀 가만히 있어주면 안되냐?!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내 쪽으로 휘둘러지는 검과 단검을 바라봤다. 휘둘러진 검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저 삐에로의 단검이 문제다. 단검의 끝에서 뭔가가 기묘한 색깔의 빛이 번쩍이며 마법진을 그리고 있다. 뭘 하려는 건데.
마법진에서 확 하고 튀어나오는 건 스프링이 달려있는 권투 장갑이다. 그것도 그냥 권투 장갑도 아니고 뾰족한 징이 한 가득 박혀있는 물건이다. 당연히, 저거 맞으면 무진장 아프겠지.
활을 든 녀석의 팔 근육이 꿈틀거리는게 보인다. 지금 날리지 않으면 놓친다. 나는 일단 단검부터 날렸다. 최소한 서지현 머리에 화살 박히는 상황은 막아야 한다.
"조심해요!"
서지현이 내 쪽을 살펴보고는 급하게 바닥에 손을 가져갔다. 나를 향해서 깜짝 펀치를 날리는 삐에로의 발 아래에 마법진이 만들어진다.
거의 동시에, 내가 날린 단검이 만들어진 구멍을 통해 날아가는 유성천의 화살과 부딪쳐 경로가 틀어진다.
좋아 한 번 막았어.
"후우."
삐에로는 결국 바닥에서 솟구치는 화염 기둥 때문에 나에게 날리던 펀치를 취소하고 뒤로 빠졌다. 곁에서 검을 휘두던 녀석도 화염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옆으로 피한다.
그 사이, 서지현과 싸우던 창쟁이가 서지현의 배를 노리고 창을 내지른다. 서지현이 재빨리 만들어낸 방어막이 커다란 아가리가 중얼거리는 말과 함께 형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결국, 약해진 방어막을 뚫고 배에 김희연의 창이 박혀든다.
서지현의 어깨를 덮고 있던 케이프가 박살나 흩어진다.
"유효타였는데! 저건 또 뭐야?!"
남의 배에다가 창을 쑤셔놓고는 한다는 소리 봐라. 유효타가 뭐 어쩌구 어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