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
생존과 삶
다음날이 되었다.
당연히 잠을 푹 잘 수는 없었고, 나와 서지현은 교대로 조금씩 쪽잠을 자야했다. 그야, 그런 협박을 해놓고 나서 코 골며 때려자고 있다가는 자다가 죽을 수도 있잖아. 잠에서 일어난 나와 서지현은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은 최소한으로 줄인 채 녀석들이 우리에게 준 24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점점 흘러.
"5분 남았다!"
쇼핑몰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들이 하나로 입을 모아 크게 소리친다. 서지현이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이쯤 지났으면 대충 눈치채고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너무 봤나보지."
그 뭐였지. 다크 나이트였나. 거기에 나오는 빌런인 조커가 강물에 배 2 척 띄워놓고 자정까지 기다리잖아. 사람들의 결정이 미루어지고 미루어지다보면 정각에 결론이 나올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걸 생각하는 모양이다.
5분이라. 아래로 내려가니 무장을 한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본다. 표정들이 별로 좋지는 않다. 그야, 다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얻어맞은 사람이 어떻게 웃으면서 우리를 보겠어. 나는 녀석들을 보다가 히죽 웃었다.
"표정들 펴. 기왕이 이렇게 된 건데."
내 말에 서람들이 대답하지 않는다. 거 참 차갑기도 하지. 그렇다고 녀석들이 싸우지 않을 도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이 상황이 어떻게 변해도 우리 두 사람은 살아서 빠져나갈 실력이 있다. 우리가 사라지고 나면 쇼핑몰이 점령되는데 필요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좋든 싫든, 자기들이 살아남고 싶으면 우리와 함께 싸워야 한다. 영국이랑 프랑스도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맹국이었잖아. 그런거지 뭐. 표정들이 참...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로다.
누가 보면 이미 죽었는데 자기들만 모르고 있는 망자들인줄 알겠어.
"저런 표정으로 잘 싸울까요?"
"살고 싶으면 도리가 있겠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시간을 확인했다.
"..."
이경석이 별 말 없이 우리 옆에 섰다. 나는 녀석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왜, 뭐 하고 싶은 욕이라도 있나?"
까짓거 들어줄게. 하고 싶으면 해봐.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생존자들은 몰라도... 어차피 저는 두 분의 도움이 없었으면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제 여동생에게 몹쓸 짓을 한 망가진 인생이 되었을겁니다. 그런 큰 도움을 받아놓고 이제와서 우리 살아남자고 두 분을 져버릴 생각은 없었어요. 아마, 제 여동생이 여기에 있었다고 해도 같은 생각이었을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야, 저런 대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참 기특하기도 하지. 요즘 보기 드문 건실한 청년일세. 서지현이 대답을 듣고 나서 녀석에게 사탕 하나를 툭 던져줬다.
"아이고 착하기도 하지. 할미가 줄 건 없고. 이거라도 가면서 먹어, 청년."
서지현의 말에 이경석이 멍하니 쥐여진 사탕을 바라보다가 입에 넣었다.
"시간이 되었다.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어리석은 선택을 내린 모양이군."
나는 그 말에 픽 웃고는 수확자를 뽑아들어 허공에다가 마구 휘두른 다음에 검집에 다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건 씹새들아, 해 봐야 아는거야."
패 까기 전에 판돈부터 쓸어가려고 하다니, 양아치냐? 가만히 멈춰 있던 괴물들 한 무더기가 장밋빛 참격을 얻어 맞고 사라진다. 기왕에 하는 싸움이라면 선빵이 언제나 덜 억울하다. 최소한 한 대는 확정타로 칠 수 있으니까!
해가 저물어가는 와중에, 다시 싸움이 시작되었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오금을 후려까자 녀석이 턱 하고 무릎을 꿇는다. 바닥에 침을 뱉고 모가지를 날려버린다.
간단한 일이다. 버티면 된다. 하지만 버티는 건 내가 아니라 수원시 생존자들의 몫이다. 나와 서지현이 해야 하는 건, 녀석들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틸 수 있도록 괴물들의 숫자를 최대한 줄여주고, 제대로 접근하기 힘들도록 정신을 흩어놓는 거다.
미친듯이 날뛰면 되는 거라고.
"손, 잡아줘요!"
뒤편에서 날아오던 서지현이 크게 외치자. 나는 곧장 서지현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내 손과 서지현의 손이 꽉 잡히고, 서지현이 날아가던 힘을 그대로 유지하며 그대로 다리로 크게 호를 그리고, 바닥을 강하게 내려 찍는다. 쾅쾅쾅, 하는 소리와 함께 전방에 일렬로 솟구치는 서너개의 불기둥.
"이제 네가 손 좀 빌려줘. 밀어 올려!"
내 말에 서지현이 곧바로 양 손으로 내 신발 바닥을 힘껏 받친다. 내가 다리에 힘을 주자, 서지현도 크응, 하는 소리와 함께 양 손을 힘껏 들어올린다. 내 몸이 확 녀석들 쪽으로 튀어나가며, 폭발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녀석들을 토막친다.
"젠장맞을, 저 년놈들은 무시해!"
무시하기는 뭘 무시해, 머저리 새끼.
"야, 니들 보스가 탐내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건 우리야."
근데 무시하다니. 제 정신이 아닌건가. 나는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녀석의 정수리를 발로 강하게 내려찍었다. 그리고, 어차피 니들 보스가 이걸 보고 싶어서 안달복달 할 필요는 전혀 없어.
안 그래도 내가 들고 찾아갈 예정이거든. 새끼 그거, 내가 참령을 들고 찾아가면 표정이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근데 아마 표정을 보지는 못하겠지. 그거 볼 시간 있으면 바로 칼 부터 나갈테니까. 1초라도 빨리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새끼다.
미꾸라지 두 마리가 흙탕물을 부지런히 쓸어내는 중이었지만, 쇼핑몰에 있는 맑은 물들께서는 아무래도 우리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버티는게 굉장히 힘에 부치는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뒤를 확인한 다음에 뒤로 쭉 빠졌다.
"으아아아!"
몇 녀석이 창을 들고 있는 염소인간들에게 둘러싸여 비명을 지르는 중이었다. 이젠 죽은 염소 인간이랑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만 남아있게 되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다 말고 멍하니 있는 녀석들을 향해 툭 하고 한 마디 던졌다.
"고맙지?"
아니면 말고. 하긴, 나 같아도 때린 새끼가 약 주면 퍽이나 고마워 하겠다. 내가 뒤로 빠진 걸 보고 서지현이 화력을 더 끌어올렸다. 해가 저물어, 주변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컴컴한 시야 속에서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며 이따끔 불똥이 튄다.
그 희미하고 순간적인 조명 아래에 순간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다시 감추는 건 바닥에 늘어선 온갖 것들의 시체다. 괴물의 시체도 있고, 사람들의 시체도 있다.
"하, 씨 빡센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 그러던 와중 갑자기 주변이 밝아졌다. 내 앞에서 뭔가 둔중하게 쿵쿵거리며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올려보니 시커먼 피부를 가진 외눈박이 거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갑자기 밝아진 주변은 녀석이 손에 들고 있는 불빠따에서 흘러나오는 불꽃 때문이었다.
"넌 또 뭐야. 키 크다고 자랑하는거냐. 반토막 나도 나보다 큰가 한 번 확인해볼까?"
... 자랑할 만 하네.
이거 반토막 쳐도 나보다 클 것 같은데. 녀석이 몽둥이를 크게 한 번 휘두르고. 내 검과 녀석의 몽둥이가 서로 부딪친다.
"어우."
힘이 제법이다. 나름대로 아껴놨던 녀석이라도 되는건가. 가만히 살펴보니 몸에도 이런 저런 갑주를 덕지덕지 발라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큰데다가 장갑도 떡장갑으로 발라놓은 친구들은... 나는 녀석의 공격을 피하면서 재빠르게 열두 번의 스택을 쌓았다.
절혼의 조건이 충족된 녀석은 선 채로 죽었다. 나는 뛰어올라 녀석의 어깨를 짚고 넘으며 놈의 뒤통수를 한 번 툭 쳤다.
"키만 크지 완전 약골이잖아."
그렇게, 우리는 꽤나 잘 싸우고 있었지만.
지랄병을 해도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 그 만고의 진리가 효과를 발휘하는 중이었다. 나와 서지현이 소년소녀가장의 심정으로 아무리 활약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녀석들이 마침내 방어를 뚫고 쇼핑몰 안으로 하나씩 들어가기 시작한다. 차라리 이러면.
"생존자들 어디에 모아놓을거야?!"
지나가는 와중에 이경석이 보여서 외치자, 곧바로 한 팔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던 이경석이 외쳤다.
"백화점의 옥상공원에 집결할 생각입니다!"
그래, 그 편이 좋겠다. 높으니까 이시은이 원군을 끌어모으는데 성공했다면 조금 더 일찍 알아 챌 수 있겠지.
"애들 모아서 거기로 가!"
어차피 시간을 버는 건 나와 서지현의 몫이다. 내 말에 이경석이 곧바로 생존자들에게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둘 것 같냐!"
대충 개 머리 비슷한 걸 한 털북숭이가 지시를 내리는 이경석을 향해 덮쳐든다. 나는 녀석의 턱주가리에 수확자를 박아넣으며 말했다.
"안 두면 어쩌게, 뒤진 다음 저주라도 내리게?"
열심히 해봐. 내가 감방에서 8년 정도 어떤 새끼 하나한테 꾸준히 저주를 내려봤는데, 별로 효과는 없더라. 그렇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말고. 한 번 도망칠 구멍을 봐두면 그 이후 거기 도착하기 전까지는 쭉쭉 밀릴 수 밖에 없다. 이경석을 비롯한 생존자들이 옥상에 몰아넣어진 걸 확인하고, 나와 서지현은 옥상으로 향했다.
"남은 사람은?"
"250명 정도입니다. 하지만, 싸울 수 있는 건 100명 정도입니다."
보자. 그러면 남은 괴물들이랑 비교해보면 한 사람이 다섯 마리 정도씩 잡으면 되는 건가? 죽은 사람들이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이 숫자랑 치고 받으면서 발생한 사상자 치고는 적은 편이다. 지금 상황에 와서 사람들이 나를 불만어린 눈으로 보지만 뭐 별 수 있나. 그냥 함께 버텨야지. 이제와서 뒤에서 칼을 꽂아봤자 의미 없잖아. 자기들 수명을 스스로 깎는 꼴이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더 버텼을까. 잠깐 주변을 훑어보던 나는 옥상 위에서 어딘가를 확인하고는 픽 웃었다.
"축하한다. 니들 살아남을 것 같다."
내 말에 이경석이 네? 하는 소리를 내고 내가 바라보는 곳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어둠 속에서 뭔가 꾸물거리는 것들이 확실히 보인다. 사람들이다. 일부러 몰래 접근하는 중인지 조명도 없이, 심지어 무기에는 검은 칠까지 해놓은 채로 빠르게 이동하는 중이었다. 숫자는 한 350정도 되어보인다.
저 정도면 자기 땅을 지킬 사람들 약간이랑 못 싸우는 사람들 빼고는 전부 끌고 온 모양인데.
"몇 분만 더 버텨."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이고 외쳤다.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 말에 사람들이 침을 삼키고 무기를 꽉 쥐었다. 강요된 선택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자기들이 한 선택이 활로를 열어주어서 그런지 어떻게든 정신은 바로잡은 모양이다. 그런다고 지친 몸이 따라와주기는 힘들겠지만.
다치고 죽는 와중에. 마침내 우리를 몰아넣었던 괴물의 뒤통수로 검게 칠해놓은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얘들아, 쇼핑몰이라 그런지 먹을게 엄청 많다! 실컷 먹고 남은 건 페미컨으로 만들자!"
우석진의 목소리다. 역시, 응원은 먹어서 하는게 최고라지.
"이건 또... 뭐야!"
나는 히죽 히죽 웃으며 녀석을 향해 말했다.
"뭐긴 뭐야. 니들이 실패한거지."
다음부터는 심리전 걸고 싶으면 주변 돌아가는 상황부터 파악하렴. 마침내, 어둠에 숨어있던 녀석들이 고함을 지른다.
"죽여라!"
하얀 천이 달린 깃발이 세워지고, 이제 막 달려와서 싱싱한 녀석들이 괴물들을 몰아내기 시작한다. 저건 또 뭐야. 천에 글씨를 소리내 읽은 나는 결론을 내렸다.
"저건 김용천 작품이겠군."
안 물어봐도 알 수 있다. 저런 거 쓸 수 있는 녀석이 그렇게 많지는 않거든. 상황이 빠르게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신나게 달려들던 괴물들이 서서히 숫자가 줄어들며, 밀어붙이던 녀석들이 뒤로 빠지기 시작한다. 하긴, 벤치 프레스도 30kg 들다가 갑자기 60kg 들려고 하면 못하기 마련인데. 갑자기 상대의 머릿수가 두배 이상으로 늘어버리면 녀석들도 도리가 없겠지.
"오빠!"
이시은이 그렇게 외치며 주변에 있는 녀석들을 고압의 물줄기로 서걱 서걱 썰어내며 이경석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믿고 있었다."
이시은이 이경석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한 건 별로 없었어. 사실, 저 사람이 다 한거야."
이시은이 그렇게 말하고 나서 어딘가를 가리켰다. 양 손에 건틀릿을 낀 김용천이 열심히 괴물들의 머리통을 뽀개는 장면이 보인다. 서지현이 이시은과 김용천을 번갈아 보다가 이시은을 향해 한 마디 했다.
"콘돔 필요하면 좀 나눠줄까?"
이시은이 서지현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기겁한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불타오르는 뜨거운 눈빛을 보니 몇 개 필요할 것 같아서. 한 번 물어봤을 뿐이야. 나중에 생각 바뀌면 찾아와. 그거 말고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렴. 아, 고민 상담 같은 것도 환영이야. 응원하고 있어."
대화를 마친 서지현이 느긋하게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걱정하던게 있었는데, 방금 전에 저절로 해결되었어요."
고민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해결되었다니 참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