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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35화 (135/237)

# 135

생존과 삶

오늘도 싸운다. 어제도 싸웠고, 그제도 싸웠다. 아마 내일도 싸우고 있지 않을까? 나는 퍼억 하고 한 녀석의 머리를 수확자로 쪼갠 다음 외쳤다.

"좀, 그만 와!"

피와 살이 튀고 괴물들의 외침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서로 뒤섞여 날뛰고 있었다.

녀석들의 공세는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공격은 무조건 하루에 한 번. 매 공격을 막아낼 떄 마다 다음 번에는 더욱 많은 숫자, 더욱 강한 괴물들을 동원해서 우리를 압박한다. 마치, 우리를 가지고 놀아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어차피 오늘을 버텨도, 내일도 버틸 수 있나 보자. 모레는 어떨지 보자. 녀석들이 몰려오는 방식은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같은 경로, 딱히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이지도 않는 단조로운 전진.

얼굴에 엉겨붙은 시커먼 점액질을 소매로 훔치고 있으려니, 이경석이 다가와서 외쳤다.

"뒤로 빠져야 합니다! 더 버티면 고립되는 사람들이 생길거에요!"

오늘 밀려온 마물의 숫자는 일천 이백이었다. 하루가 지날 떄 마다, 우리는 서서히, 착실하게 뒤로 밀리는 중이었다. 나와 서지현은 괜찮다. 이대로 3박 4일도 싸울 수 있다. 하지만 함께하고 있는 수원의 생존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싸움 속에서 몸과 마음이 지치는 중이었다.

물론 처음과 같이 지금도 나와 서지현은 멈추지 않고 덤벼드는 괴물들을 쓸어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기에서는 지속적으로 피해가 발생하는 중이었다. 나와 서지현이 분신술이라도 배워서 수백명으로 늘어나지 않는 이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뒤로 빠져. 빠질 시간은 나랑 지현이가 벌 테니."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여기에서 뒤로 빠지게 되면, 아마 쇼핑몰 앞에서 다시 방어를 준비하겠다는 뜻이겠지. 서지현이 내 옆에 서서 이마에 맺힌 땀을 살짝 훔쳤다.

"지긋지긋하게 많네요."

그러게 말이다.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몇 발의 화살이 나와 서지현을 노린다. 수확자를 휘둘러 그 화살들을 막아낸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몇 마리 남았지. 한 오백마리 정도 남은 건가? 그렇다면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

"썩을 놈의 자식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뒤편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두 분, 돌아오셔도 됩니다!"

나는 그 말에 멱살을 잡고 있던 괴물을 쇼크로 구워버린 다음 서지현과 함께 뒤로 빠졌다. 쇼핑몰 앞에 만들어놓은 바리케이트. 아마 여기까지 밀리면 그 다음에는 녀석들이 쇼핑몰 안까지 들이닥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의미가 없지."

뭐하러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박터지게 싸우고 있는데. 우리는 수원이 아니라 수원의 생존자들이 필요한거다. 이젠 더 뒤로 빠질 수도 없을거다.

"안되겠다 싶으면 사람들 다 쇼핑몰의 지하로 몰아넣어."

그 이후부터는 나와 서지현만 싸워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여기까지 하는 편이 어떤가, 무의미한 피를 흘리고 싶지는 않다!"

마물들과 함께 있던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를 향해 크게 외친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토했다.

"여기까지 하기는 뭘 여기까지해. 무의미한 피를 흘리기 싫다고?"

싸이코패스인가. 지금 바닥에 보이는 핏자국은 뭐 피가 아니라 토마토 주스를 쏟아놓은 건가 보지.

"연합이 필요로 하는 건 너희들 중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트리거 기어다!"

그 말에 나와 서지현이 잠깐 녀석을 바라봤다. 얼씨구, 그걸 니들이 어떻게 알고 있어. 그리고 니들이 그걸 필요로 하는 이유가 뭐야.

"연합장께서 확언하셨다. 트리거 기어를 곱게 넘겨준다면, 수원시에 대한 공격을 멈추고 이후로도 수원에 대한 일체의 간섭도 없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예상 외로 잘 버틴 수원에 대한 나름의 칭찬이다."

말을 하던 녀석의 시선이 나와 서지현에게로 향했다.

"솔직히 말해서, 누가 가지고 있을지는 대충 알 것 같군. 저기 서 있는 두 사람이 순순히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트리거 기어를 넘긴다면, 우리는 곧바로 철수하지."

그래, 이렇게 나오시겠다? 어이가 없군.

"너희는 하루의 시간이 주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곳을 포위한 채로 대답을 기다리고 있겠다. 억지로 버티다 부러지지 말고, 불어오는 바람에 유연하게 대처해라!"

녀석은 말을 마치고 나서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다가오던 마물들은 모든 행동을 멈춘 채 무슨 조각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만히 서 있는다.

"..."

이경석이 잠깐 우리를 바라본다.

"트리거 기어라는게."

나는 그 말에 깊은 한숨을 내뱉은 다음 입을 열었다.

"들어가서 말하지."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서지현은 이경석과 함께 쇼핑몰 안으로 들어섰다.

"저게 무슨 말입니까, 이제 그만 싸워도 되는 겁니까?"

사람들이 이경석에게 몰려들어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경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나는 몰려든 사람들을 보다가 말했다.

"그럴 일 없어."

내 말에 녀석들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저 녀석들은 분명히..."

분명히고 뭐고. 이건 넘길 수 없는 물건이다. 내가 헤까닥 돌아서 갑자기 지금 여기에서 옷 다 벗고 똥 싸서 벽에 칠하는 일이 있어도 참령을 넘기는 선택을 하지는 않을거다.

"다들, 일단 진정하세요.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침묵 속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나와 서지현에게로 꽂힌다.

"어디부터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월드 앵커부터 시작해야 할 걸요."

그래,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꽤 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차근차근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쇼핑몰 안에 모인 사람들에게 말해주기 시작했다.

월드 앵커로 밝혀진 검은 염소, 그리고 안동에서 시작해 수원에서 끝난 참령이라는 돌을 완성하기 위해 이어졌던 여정.

"그럼, 수원으로 왔던 이유가."

나는 이경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완성시키기 위해서야."

말을 마친 나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지금 밖에 머무르고 있는 녀석들이 트리거 기어를 넘기라고 하는 이유가 뭔지 이해가 되냐? 성공하게 되면, 한국에서 저 지긋지긋한 괴물 놈들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싹 쓸어 낼 수 있어. 저 녀석들은 그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이 장비를 내놓으라고 하는 거다."

내 말에 사람들의 표정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그래, 그리고 그 장비를 내놓지 않는다면 너희는 내일 이 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 모두 죽을거다."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보니, 거기에는 눈깔을 하얗게 까뒤집은 녀석이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래, 니들도 뭐라고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지? 나는 곧장 녀석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에 수확자를 밀어넣었다. 당연히, 뭐라고 더 떠들려고 하던 녀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저 두 사람은 살겠지. 내 예상보다 훨씬 강하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봐, 수원 친구들. 저 친구들의 생존과 자네들의 생존 사이에 무슨 연관관계가 있지?"

곧바로 문 앞에 다른 녀석이 또 눈깔을 허옇게 뒤집고 나타나 말을 이어간다. 녀석의 말에 사람들이 다시 웅성이기 시작한다.

"괴물이 전부 사라진 한국이라. 이 상황에서는 낙원이 따로 없겠지. 하지만 친구들, 그 낙원을 누리는 건 자네들이 아니야. 저 친구들이 트리거 기어를 넘기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여기에서 모두 죽을 예정이니까. 하지만 반대로... 저 친구들이 트리거 기어를 넘긴다면 한국에는 여전히 괴물들이 돌아다니겠지. 하지만, 그 순간 자네들의 안전은 보장된다."

눈을 뒤집은 사람이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괴물이 없는 낙원을 꿈꾸나? 그런 건 나도 제공해 줄 수 있어. 트리거 기어만 넘겨준다면, 내가 수원을 그런 낙원으로 만들어주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될 거야. 한 번 잘 생각해보라고."

그 말을 끝으로 눈을 뒤집고 있던 녀석이 입에 피거품을 문 채로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기 시작한다.

몇 분 지나지 않아, 경련하던 사람은 시체로 변했다. 잠깐 그 시체를 바라보던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어, 나름 머리를 쓴 모양이지만. 이런 수작을 부리고 싶으면 이쪽의 사정부터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어야 할텐데. 바보 같은 수작이네요."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뒤를 돌아봤다. 생존자들의 눈에 상당히 어두운 열망과, 어느정도의 적의가 느껴진다.

"저 시체가 떠든 말이 맞기는 해요. 생각을 한 번 잘 해보세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곧바로, 그녀의 옆에 어지간한 승용차 크기 정도 되는 화염 덩어리 서너 개가 나타나 사납게 이글거리기 시작한다.

"우리는 트리거 기어를 저 친구들에게 줄 생각이 전혀 없어요. 고로, 여러분들이 트리거 기어를 넘겨서 안전을 확보하고 싶다면 우리랑 싸우겠다는 의미가 된답니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러고 싶어요? 그럼 여러분은 내일 이 맘 때 전부 죽는게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전부 우리 손에 죽을텐데. 그게 생각을 잘 해서 내린 결론이라면 가슴이 아플 지경이네요."

이건 극약처방이다.

하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협박에 대항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부작용도 가장 강하고 효과도 가장 강력한 방법은 바로 또다른 협박이다. 맞불을 놓는거지.

"내일이면 벌써 6일째다. 그 시간이라면 이미 이시은이 이천에 도달해서 도움을 요청하고, 그 대답을 듣고 돌아오는 중일거야. 지금 이 정도 숫자라고 하면 더 버티는 건 힘들겠지만, 증원군이 온다면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

내 말에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시은 양이 원군을 데리고 올거라는 확신이 없잖아."

그 말에 서지현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부인하지 않아요. 이시은 양이 실패해서 빈 손으로 올 수도 있죠. 그럼 여기에서 여러분들은 다 죽을 거에요. 하지만..."

서지현의 말을 받아 내가 입을 열었다.

"저 녀석들에게 트리거 기어를 넘기지 않고 버틴다면 이시은이 구원군을 데리고 와서 살아남을 확률이 있지만, 저 녀석들에게 트리거 기어를 넘기려고 한다면 여기에 있는 댁들은 우리 손에 확실히 죽어."

높지 않은 확률로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지, 그리고 백프로 죽는 선택지. 멋대로 한 번 골라봐.

"..."

사람들이 침묵했다. 녀석들이 어떤 선택을 내릴 지는 고릴라도 알 거다. 이야기를 마친 나와 서지현은 태연하게 우리의 숙소로 돌아갔다.

"이시은이 이천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녀석들이 모르고 있어서 다행이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면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며 하루의 시간을 주는 대신, 그냥 들이 닥쳐서 다 쓸어버렸겠죠."

원군이 오기 전에 숨통을 끊어놓아야 했을테니. 게다가 방금 전의 선택지도 이런 식의 협박을 통해 무마 할 수 없었을거다. 서지현이 프라이팬을 꺼내 스팸을 구우며 말했다.

"그 협회장인지 뭔지 하는 재벌 3세 자식. 아무래도 영 헛똑똑이 같은데요."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모르고 있는데 어쩌겠어. 자기 딴에는 이 방법도 괜찮겠다 싶어서 떠올린거겠지. 어디 그 뿐이랴.

"방금 전과 같은 협박을 아무나 생각해서 실행하기는 힘들지 않아?"

3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만에 태도를 바꿔서, 함께 싸우던 사람에게 살벌한 협박을 던졌다.

누구나 떠올릴 수는 있다 해도, 아무나 실행하지는 못할 일이다.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가 언제 제정상이었던 적 있나요. 저한테 소중한 건 수원시의 생존자들 같은 게 아니라, 당신이랑 저 뿐이에요. 그리고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죠."

"그래. 도움을 준다면 우리 편이지만, 방해가 된다면 적이 되는 법이지. 아무래도 너랑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리더 같은 건 못 할거야."

말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건 별로 재능이 없는 모양이다. 까놓고 방금 전에 그것도 그냥 힘으로 찍어 누른거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팸을 뒤집기 시작한다.

"저는 그런 거 할 생각 없어요. 당신이 그런 역할을 맡고 싶다면 반대하지는 않을텐데, 별로 제 마음에 들지는 않네요. 그런 거 하면 시간을 많이 빼앗기잖아요. 싫어요. 그 재벌 3세 때려 잡고 나면 용인 근처에 자리잡고 저랑 농사나 지으며 살았줬으면 해요."

그럴 생각이다. 애초에 연쇄 살인범 출신 리더라니. 너무 이상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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