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34화 (134/237)

# 134

생존과 삶

오현석과 서지현이 수원에 머무르는 사이, 마침내 이시은이 이천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이천의 시청 안에서 김용천과 우석진, 그리고 이시은이 자리잡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용천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부족하지만 이천 시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있는 김용천이라고 합니다."

서로 간단하게 인삿말을 주고 받은 다음, 김용천이 질문을 던졌다.

"이시은 양, 오현석 씨와 서지현 씨를 알고 계신다고요?"

김용천의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이시은의 말에 김용천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 할 일은 아니지요. 오히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용천의 말에 이시은이 살짝 고개를 숙여서 인사를 했다.

"그 두 분은, 잘 계십니까?"

김용천의 질문에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찾아와 주셔서 반갑습니다. 아직 서로 간에 모르는 것이 많지만, 분명히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서로의 조직을 이해하고, 함께 하는 길을 찾아 볼 수 있을 겁니다."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용건부터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제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혹시 여러분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에요."

이시은의 말에 김용천과 우석진이 잠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이시은 양,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요?"

이시은이 수원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수원은 수도권 연합의 압박을 받고 있다. 그 연합을 이끌고 있는 자는 랜드 클리어를 포기하는 대신, 랜드 마크와의 계약 같은 것을 통해 생존자들을 배신하고, 괴물의 편에 붙은 상황이다.

"그런 방법도 있었던 모양이군요. 배신이라."

"수원에서 끝나지는 않을 거에요."

이시은의 말에 우석진이 대답했다.

"반대로 말하자면, 아직은 수원이 남아있다고 할 수도 있지."

이시은이 잠간 우석진을 바라본 다음에 작게 한숨을 내쉬엇다.

"맞아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죠."

수원은 공격을 받을 예정이지만, 이천은 아니다.

차라리 수원에 도움을 주느니 그냥 이천에서 만약을 대비해 방어를 준비하는 편이 이천 입장에서는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석진이 허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오현석과 서지현, 두 사람에게 받은 도움은 굉장히 커. 하지만..."

"맨 입으로는 안되겠다는 건가요. 물론 지금 사정이 좋지 않다고 하지만, 수원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는 만만치 않은 규모에요. 현 상황을 극복하고 여러분과 계속 함께 한다면 분명히..."

이시은의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은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자리에 앉은 저희끼리 멋대로 결정할 만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수원을 도와주기로 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건 여기에 있는 셋은 물론이고, 이천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자 전원이 목숨을 걸게 된다는 뜻이니까요. 저는 돕고 싶습니다만, 그 전에 함께 하고 있는 생존자 여러분을 설득하는게 우선입니다."

말을 마친 김용천이 우석진을 바라봤다.

"우석진 씨, 생존자 여러분을 모아주시겠습니까?"

우석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석진이 사람을 모으러 간 사이, 방 안에는 이시은과 김용천 두 사람이 남게 되었다.

"수원을 이끌고 계신 분 치고는 나이가 많이 어려 보이시는군요."

이시은이 그 말에 대답했다.

"나이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 아니, 아니죠."

이시은의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이고 잔에 찻물을 추가로 부어주며 말했다.

"말은, 편하게 하셔도 좋아요."

이시은이 찻잔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힘드셨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다는 건 굉장히 무거운 짐이니까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시지만, 분명히 마음은 수원에 향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김용천의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하는 생존자들을 설득하겠다고 했잖아. 자신은 있는거야?"

김용천이 이시은의 말에 대답했다.

"저는 제 생각을 말할 뿐입니다. 생존자 분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지요."

이시은이 잠깐 복잡한 표정으로 김용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 내가 함부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종류의 문제는 아니니까. 나는 물론이고, 수원의 운명도 이천에 머무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나게 되겠네."

"먼 걸음을 하셨는데, 이 자리에서 시원하게 대답을 돌려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가 단호한 면모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밖에 사람들을 이끌지 못해요."

이시은은 별 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우석진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말했다.

"용천아, 준비되었다."

"감사합니다."

이시은과 김용천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마련된 단상 앞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김용천은 마련된 단상에 섰다. 김용천을 바라보는 이시은의 손은 주먹이 꽉 쥐어져 있었다.

"수원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계신 분이 먼 걸음을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인근의 위성도시를 점령한 수도권 연합이라고 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모양입니다. 연합의 장이라는 자는 소위 말하는 랜드 마크에 굴복해, 괴물들의 편에 붙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수원을 노리고 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고, 그 반응을 살피고 있던 이시은의 어깨가 약간 움츠러든다. 단상의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은 김용천이 깊게 숨을 쉬었다.

"수원에서 끝나지는 않을겁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찾아올겁니다. 수원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자들의 도움 요청은 우리 앞에 놓여진 가장 첫 번째 선택입니다. 이후로,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우리는 비슷한 선택지 속에서, 결론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오겠지요."

지금은 수원을 돕느냐 돕지 않느냐의 여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게 된다면 조금 더 직접적인 형태를 띈 선택지가 이천의 생존자들에게 들이밀어질 것이다.

"언젠가 결정해야 하는 일이라면 지금 여러분들의 선택을 듣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선택에 따라 우리는 수원을 돕거나, 돕지 않게 될 겁니다."

꽉 주먹을 쥔 김용천이 사람들을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햇다.

"여러분, 우리는 왜 이러고 있을까요?"

모여있는 생존자들은 가만히 김용천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목적이 뭘까요. 우리는 왜 이렇게 하루 하루 고생하고, 괴물들과 싸우며 일용할 양식을 수확하기 위해 사냥을 거듭하고, 농사를 지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행동에는 목적이 있기 마련입니다. 비록, 우리 자신이 그 목적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건 그 일이 진행되는 것에는 분명한 목적이 숨어있을겁니다. 원하고 갈망하는 것이 있겠죠."

말을 하고 나서 모여 있는 생존자들을 슥 훑어 본 김용천이 입을 열었다.

"저는 살고 싶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요.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도 없는 말입니다."

몇 몇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김용천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농사를 짓고, 괴물과 맞서 싸우고 사냥해서 그들의 가죽과 고기를 이용합니다. 하지만, 그건 삶이 아니라 생존입니다. 괴물의 편에 붙어서 그들의 아래로 들어가는 방법은 분명히 생존의 한 방식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습니다.""

김용천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고,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는 생존 할 수 있을지언정, 삶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다. 다시금, 사람들이 김용천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생존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김용천이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농사를 지으며 어제 본 사람을 또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안부를 묻습니다. 사냥을 하다가 다치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돕고, 걱정합니다. 사소한 오해 때문에 싸우고 다툽니다. 다른 사람을 질투하기도 하고, 욕하기도 합니다."

김용천의 목소리가 점차 격양되기 시작했다.

"삶은 사람과 사람이 모였을 때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자유로운 교류입니다! 그렇기에, 단순한 생존은 삶이 아닙니다. 삶은, 생존 너머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말을 마친 김용천이 테이블을 옆으로 치우고 잠깐 눈을 감고 있다가 큰 천 위에 뭔가를 써갈기기 시작했다.

[나는 단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

들고 있는 천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 글자를 드러낸다. 김용천이 그 천을 들어올린 채로 말햇다.

"저는 이 문장의 주어를 바꾸고 싶습니다.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단어였으면 좋겠습니다. 이천에서 부족한 저를 믿고 함께 해주고 계시는 여러분... 아니, 더 나아가 앞으로 만나게 될 모든 생존자들까지. 그들과 더불어 삶을 누리고 싶습니다. 생존이라는 고비를 넘어, 마침내 삶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김용천이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그렇기에 저는 수원의 생존자들을 돕고 싶습니다. 서울의 누군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생존자들의 삶을 짓밟고 있습니다."

김용천의 말에 사람들의 눈에 서서히 뭔가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목소리의 울림에는 그런 힘이 있었다.

"그 누군가는 사람들을 배반했습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거두어가고, 끔찍한 기억을 심어주었던 그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도리어 한 편이 되었습니다. 이제 수원에 남은 생존자들의 삶을 짓밟을 것이고, 더 나아가 여러분과 제가 어렵게 쟁취하고 있는 삶까지 뭉게버릴 겁니다!"

김용천이 잠깐, 시선을 자신이 써놓은 글귀가 있는 천으로 던졌다.

"사랑하는 이천시의 생존자 여러분. 제가 지금 휘날리는 저 천 위에 써진 주어를 당당하게 우리라고 바꾸기 위해서는, 수원 생존자들의 요청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함께 갑시다."

박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점점 소리가 커지기 시작한다. 단순한 감탄의 의미를 담고 있는 소리를 넘어서, 결의까지 느껴지는 강렬한 소리였다.

김용천의 이야기는 끝났다. 우석진이 픽 웃고는 김용천에게 말을 걸었다.

"이야기 잘 들었다. 천 위에 쓴 문장도, 인상깊었어. 사람들도 수원을 돕는 일에 불만을 표출하는 것 같지는 않아. 오히려, 어느정도 열정적인 면도 보이고 있어."

이시은이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김용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용천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그게 말이죠. 사실 노래 가사입니다."

이시은과 우석진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했다. 노래 가사라니.

"젊을 적에 들었던 외국 노래거든요. 더 캡이라는 밴드의 Angel With A Shotgun. 사실은 사랑 노래에요. 가사 구절 중에 좋아했던 부분이었는데, 이걸 이렇게 쓰게 되네요."

이시은이 잠깐 있다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정말로."

이시은의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결정한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결론을 이끌어 낸 건 김용천이었다. 이천의 생존자들은 수원의 생존자들을 돕기 위해서 움직일 것이다. 잠깐 사람들을 바라보던 김용천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은채 천 위에 써져 있던 단어 하나에 크게 X자를 치고, 그 위에 새롭게 글자를 써넣었다.

[우리는 다만 생존이 아니라, 삶을 원한다.]

천은 깃대 위에 걸린채, 바람에 휘날리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