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
영웅 난이도
다음 날. 나는 상점을 뒤적거려 새로 배울 만한 반사신경 카테고리의 스킬을 구매했다.
[찰나의 연격 : 한 번의 공격 기회에 두 번의 공격을 구겨 넣을 수 있게 됩니다. 찰나의 연격을 활용한 공격은 원래 낼 수 있는 위력의 70%를 발휘 합니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승리를 쟁취하세요. 1750pt]
[흐릿한 존재 : 당신이 움직이는 동안, 자동으로 유도되는 식의 기술로는 당신을 제대로 맞출 수 없습니다. 설사 그런 기술을 사용한다고 해도, 피해를 주기 위해서는 당신을 정확하게 겨누어야 할 것입니다. 2300pt]
스킬을 구매하고 나자, 자연스럽게 반사신경 카테고리는 5단계로 올라가게 되었다.
[후발선타와 짐승의 시간 마스터를 선택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후발선타의 마스터가 반사신경 5단계에 도착해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짐승의 시간은, 그 동안 포인트를 사용해서 강화한 적이 없어서 아직까지는 마스터를 선택 할 수 없었지만 후발선타는 지금 바로 포인트를 쏟아넣어서 강화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후발선타 - 코제이션 : 상대의 공격이 먼저 맞게 될 상황에서도 후발선타가 발동되어, 상대보다 먼저 때리게 됩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이게 진짜 후발선타네요. 코제이션을 통해 발동된 후발선타가 너무 늦었을 경우, 상대의 공격을 피할 기회는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뭐, 목에 칼 떨어지기 일보 직전에 후발선타가 발동된다고 피할 기회까지 가지게 되는 건 불가능하니까. 이해 할 수 있는 패널티다.
[후발선타 - 이베이드 : 후발선타가 발동되었을 때 상대의 공격을 피할 기회를 가지는 대신, 확실하게 상대의 공격을 피하게 됩니다. 때리고 안 맞는 극한의 이득을 노리세요.]
이미 두 번이나 경험해 보았지만, 마스터 선택만큼 고민되는 선택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것 같다. 둘 다 좋다. 어떤 걸 골라도 효과는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다.
무조건 선빵치는 쌩양아치가 될래, 아니면 때리고 확실하게 피하는 극한의 이득충이 될래? 라는 선택지잖아.
"아무리 그래도 오천 포인트는 너무 격렬한데."
완전 사기꾼 아니야 이거. 남아있는 거 죄다 쏟아 넣어야 할 지경이네. 여기에다가 때려박고 나면 남는 포인트는 진짜 한 줌도 안되는 수준이다. 기껏해야 몇백 포인트 정도가 남는다. 이렇게 많이 포인트를 사용했는데 뭐 할인 같은 건 없는건가. 쪼잔하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코제이션을 선택했다.
"크로스 카운터라는 상황이..."
지금까지는 노리는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이어질 대부분의 상황에서도 크로스 카운터 상황을 만드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상황이 걱정이다.
"크로스 카운터를 아예 노릴 수도 없을 정도로 상대가 강하면 문제가 생기잖아."
이베이드는 크로스 카운터라고 하는 상황을 어떻게든 만들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서울에 가서 그 망할 자식을 죽이고 나면 밝은 미래를 위해서라도 검은 염소라는 월드 앵커를 잡아야 할 텐데.
"최현우야 크로스 카운터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검은 염소랑 싸울 때도 내가 크로스 카운터라는 조건을 달성해서 이베이드의 효과를 볼 수 있을까?"
싸워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썩 자신이 있지는 않다. 그때 용인의 놀이동산 하늘 높이 치솟던 시커먼 기둥과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맥동하던 마력은 아직도 머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코제이션은 이베이드에 비해 효과를 확실히 볼 수 있다. 크로스 카운터라는 조건문을 날려버리는 강화니까. 그 뭐냐, 카드 게임에서는 효과 설명이 짧을 수록 강한 카드라고 하잖아.
상대가 나보다 훨씬 강해도 공격을 맞출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 기회를 이용해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데 성공하면 참령이 발동한다.
제르멩이 자기 입으로 그거 맞으면 자신도 벗어날 방법이 없다고 할 정도의 물건이, 성능을 발휘하게 된다.
"끝."
결정은 끝났고 포인트는 이미 쏟아져 들어갔다. 나는 상점창을 닫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최현우는 다행히 아직 살아있다.
"이제 기껏해야 40km 남짓 남아있을 뿐이네."
이불을 덮고 부스럭거리던 서지현이 중얼거렸다.
"그 정도 거리라면, 중간에 랜드 클리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진입하지 않고 그냥 멀리 돌아가는 식으로 이동하는 편이 더 빠르겠죠."
그렇겠지. 나는 지도를 살펴보다가 말했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도로를 벗어나 바리산 자연휴양림을 비롯한 숲과 산을 쭉 뚫고 나아가서 바로 서초구로 진입하는 방법도 있어."
그러면 수원을 떠나 바로 강남 땅을 밟게된다. 오히려 처음부터 수원을 빠져나가서 가는 경로를 그렇게 잡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서지현이 이불로 몸을 감싼 채 상점에서 포션을 두 개 구매해 배낭 안으로 밀어넣었다.
"괜찮은 생각이네요. 그 경로라면 성남시와 안양시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는거니까, 랜드 클리어 미션을 보게 될 일은 없을거에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던 우리는 해가 저무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도 좋지만, 일단 수원을 벗어 날 수는 있게 되어야 할 거 아니야.
"더럽게 춥네."
장비를 챙겨 밖으로 나온 우리가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된 건 엄습하는 추위였다. 나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영하 10도까지 떨어진다고 했었지. 그 정도면 그냥 겨울이잖아. 입에서 입김이 확 일어날 정도다. 진짜 사막도 이 정도로 일교차가 심한건가?
그렇게 덜덜 떨면서 그 랜드 마크께서 자리잡고 계시다는 장소로 향하기 시작하자.
"기가 막히네."
우리의 눈 앞에 보이는 건 휘몰아치는 모래폭풍으로 만들어진 벽이었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은 맹렬하기 그지 없는데, 그 와중에 흘러나오는 모래 알갱이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누가 보면 AT필드라도 세워놓은 줄 알겠다.
"히익."
살짝 휘몰아치는 모래바람 안으로 손을 넣어본 서지현이 기겁을 하며 손을 뒤로 뺐다.
"뜨거워?"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기 힘들 정도로 뜨거워요."
그래도 어쩌겠어. 나아가야지. 나와 서지현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다음 그 모래폭풍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곧바로 서지현이 모래바람을 막기 위한 보호막을 만들어냈다.
"으아..."
순간적인 온도 차이로 인해 머리가 핑 하고 돌 정도다. 산 채로 오븐 안에 들어가도 이것보다는 시원할 것 같은데?! 그냥 공기가 뜨거운 걸 넘어서 모래를 머금은 바람까지 사납게 몰아치고 있는 중이니, 체감 온도는 오븐 안을 훨씬 상회할거다.
"온도, 낮춰볼게요."
숨을 몰아쉬던 서지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한 손을 꽉 쥐자, 조금씩 온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잠시 뒤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이 이하로는 못해요. 할 수는 있는데, 그러면 저는 에어컨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을걸요."
더 온도를 낮추고 싶다면 다른 모든 걸 포기하고 집중해야 하는 모양이다.
"얼마나 온도가 떨어진거야?"
"87도에요."
여전히 뜨겁지만, 거의 70도 가까히 온도를 떨어뜨리는데 성공했으니. 아까보다는 훨씬 움직이기 나은 편이다.
"이 폭풍의 중심지에 있겠죠?"
그렇겠지. 도대체 이렇게 음침하게 모래커튼으로 자기 모습을 감추고 뭘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빨리 조져보자."
이러다가 더위 먹어 쓰러지겠다.
"아 진짜."
더워 죽겠는데 왜 이래. 모래에서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불쑥불쑥 일어난다. 건조하고 뜨거운 공기에 퍼석퍼석하게 변해버린 시체들이다. 그런 주제에 눈깔은 시퍼런 안광을 줄줄 흘리는 중이다. 우리의 방문이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설마하니 가는 길에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잖아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수확자를 뽑아들고 가볍게 몇 번 돌렸다. 그래, 좋게 생각하자.
- 그워어어어...
"그워어어는 옘병. 꼴에 시체라고 겁이라도 주려는 거냐."
녀석들이 우리를 향해 네 발로 달려들기 시작한다. 멀쩡하게 다리 두 짝 달고는 왜 네 발로 뛰어오는거지. 팔까지 써서 달려오면 뭐 속도가 두 배로 빨라지나. 확 하고 나를 향해 뛰어오르는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자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파삭, 하고 작살나며 충돌 실험 마네킹처럼 너덜너덜해진채 저 멀리로 너울너울 날아간다.
"날씨 덥다."
얼렁 사라져라. 수확자를 뽑아들고 달려들며 휘두르기 시작하자, 장밋빛의 궤적이 남으며 녀석들의 몸이 토막나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에 휘말려 사라지기 시작한다. 말라 붙은 시체들이 일어난 거라 그런지 피 한 방울이 나오지 않는다.
별의 별 것들이 다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모래 땅에서 팔을 불쑥불쑥 뻗쳐 올리는 시체들 정도가 고작이었지만, 이제는 휘몰아치는 모래 바람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갑자기 덮쳐드는 형체 없는 유령들까지 더해졌다.
하나 하나가 강하지는 않다. 하지만 숫자가 무수히 많다.
"제 무기는 잘 안 통하네요."
서지현이 약간 억울한 것 같은 표정으로 에노테르를 바라보다가 마력을 활용해서 땅에서 솟아오르는 시체와 모래 바람에서 튀어나오는 유령들을 상대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힘들지는 않아?"
주변 온도를 낮추면서 시체와 유령들까지 상대하려면 꽤나 머리가 아플 것 같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는 문제 없어요."
말하면서 서지현이 발로 땅을 한 번 크게 내려찍자, 내려찍은 장소 전방으로 불기둥이 펑펑펑 솟아나며 말라 비틀어진 시체들이 하늘로 높이 떠오른다. 무슨 격투게임 기술 같은 느낌인데.
얼마나 나아갔을가. 어느 순간 갑자기 휘몰아치던 모래바람이 싹 가셨다.
눈에 보이는 건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고요한 공터였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의 중심지에는 몰아치는 모래바람에 깎여나가, 간신히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는 왕좌가 하나 놓여있다. 왕좌에는 해골 하나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자리잡고 있는 낙타.
왕좌에 앉은 녀석이 우리를 바라보며 시퍼런 안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려보고 있으면 니가 뭐 어쩔건데. 나는 손에 들려 있는 수확자를 손으로 꽉 쥐었다.
[월드 앵커가 랜드 마크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인지했습니다. 수원의 랜드 마크, 잊혀진 순장묘의 왕에게 검은 염소가 축복과 함께 여분의 힘을 공급합니다.]
"야 잠깐만. 잠깐만!"
그 와중에 눈에 떠오른 기가 막힌 소리. 그와 동시에 으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 바닥에서 들장미 덩굴들이 솟아올라 형체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왕좌를 감싼채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그냥 두면 안된다. 적이 뭘 하려고 들면 하기 전에 조져야 한다.
나는 수확자를 들어올리고 곧바로 해골을 향해 달려들었다.
- 기억이 난다.
[잊혀진 순장묘의 왕이 망각의 모래 속에 파묻혀 소실되었던 기억과 지성을 되찾았습니다.]
[정복자, 앤더슨 3세가 당신들을 맞이합니다.]
아, 진짜. 지랄하지 마세요. 내가 휘두른 수확자가, 녀석의 시미터와 부딪쳤다. 해골 속에서 희미하게 흔들거리던 푸른 불꽃이 거대해지기 시작한다.
끼기긱,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과 힘겨루기를 하던 내 몸이 서서히 뒤로 밀리기 시작한다. 이 자식, 뭐 이렇게 힘이...! 녀석의 입에서 시커먼 독사 한 마리가 기어나와, 녀석의 이마를 휘감는다. 이마를 휘감은 뱀이 입에 다이아몬드를 문채로 반질반질하게 굳어, 검은 왕관의 형상이 된다.
- 너는 항차 무엇이길래, 나의 무덤 위에 발을 올려놓았느냐. 세상 그 누가 이러한 무례를 네놈에게 허락한건가.
서서히 밀려나는 몸에 힘을 넣으며,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짓고 말했다.
"해골 친구, 무덤에는 신문 배달이 안 오는 모양이지?"
대통령도 탄핵해서 내쫒는 시대에 무슨 왕 놀이를 하려고 들어. 검을 마주친채 기를 쓰고 버티고 있던 와중, 녀석이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그 힘에 내 몸이 뒤로 쫙 밀려난다. 녀석이 시미터를 어꺠 위에 턱 하니 걸치고 외친다.
- 너는 네 혀를 삼가라. 네 앞에 서있는 자는 정복자 앤더슨 3세. 두 개의 제국과 다섯 나라, 쉰 여섯개의 도시 국가를 정복한 가장 뛰어난 전사이자, 낙타를 타고 6개월을 달려도 다 돌아볼 수 없는 대제국의 주인이다!
뒤로 밀려난 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월드 앵커는 랜드 마크를 유지할 힘을 공급하는 존재다. 잘은 모르겠지만 힘을 공급받으려면 녀석들 사이에 모종의 라인이 형성되어있어야겠지.
검은 염소는 우리가 트리거 기어인 음양석 참령을 완성시킨게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가 랜드 마크를 제거하러 저 해골에게 접근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그 모종의 라인을 통해서 힘을 추가로 공급했다.
그리하여, 우리가 상대하게 될 랜드 마크는 갑자기 월드 앵커로부터 힘을 받아 과충전 되어버린거다. 절혼이 없으면 잡기 힘들 거라는 식으로 예상을 했지만, 이건 그냥 잡기 힘들 것 같은 녀석으로 변해버렸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