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
음양석 참령
서지현의 말에 제르맹이 웃었다.
"작용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승리로 향하는 가능성이라는 점에서 유사하지. 오히려 그런 면에서는 더 강력한 트리거 기어도 존재해. 물론, 한국에 있는 트리거 기어는 아니지만."
이후 제르멩이 간단한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파백이나 절혼과 다르게, 참령의 힘은 죽음 이후에 발동하는 효과다. 참령의 효과를 보고 싶다면 어찌되었건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참령이 발동해, 상대가 되살아나도 죽느니만 못한 신세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따라 굉장히 친절하게 대답을 돌려주는데. 그냥 내 착각일 뿐이려나."
내 말에 제르멩이 웃었다.
"내가 기분이 좋거든. 모처럼 큰 맘 먹고 함께 건너온 친구를 배신하고 자네들을 응원하고 있는데, 그럴듯한 성과까지 내주고 있지 않나. 이대로 일이 잘 풀린다면, 내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테니."
그 말에 나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꿈이 뭔데."
내심 품고 있던 걱정과는 다르게 얼탱이가 나가는 대답이 돌아왔다.
"시대를 앞서나간 천재 놀이. 굳이 예를 들자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겠군.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나는 이 세상에 자네들과 같은 모습으로 숨어들어서 그 인간처럼 살아 볼 생각인데. 자주 하면 질릴테니, 한 300-400년에 한 번씩 그런 모습을 하고 놀 생각이라네. 꽤나 재미있을거야."
얼씨구. 너도 참 가지가지한다. 나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들어갔던 힘이 그 대답을 듣고는 조금씩 빠지기 시작한다.
"질문이 다 끝났으면 이만 돌아가봐도 괜찮겠나? 지금 안네의 일기를 읽던 와중 급하게 달려온 참이라서."
"..."
그래, 가 봐라. 서지현이 가버리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젓자, 제르맹이 잠깐 하늘을 바라보고 한 마디 했다.
"이 상황에서 내가 그냥 돌아가면 자네들 납작해질텐데. 자네들도 혹시 죽은 다음에 되살아 날 수 있는 건가?"
그럴리가. 그 말에 나와 서지현은 거북이의 발이 떨어지는 범위를 벗어났다.
"그럼 나는 돌아가보도록 하겠네. 다시 만나게 되는 건 꽤나 시간이 지난 다음이 될 것 같군. 잘 지내게."
인사를 마친 제르멩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거북이를 비롯해 제르멩이 묶어두고 있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대지가 다시 뒤집어지기 시작하고, 나와 서지현은 다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이제 이 녀석을 처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디를 때려도 10분 안에 열두 대를 때리면 된다.
수확자로 허공에 궤적을 남긴 나는 그걸 발로 힘껏 밟고는 녀석에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나를 향해서 날아드는 곤충들은 서지현이 허공을 날아다니며 불덩이를 맞춰 떨어뜨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몇 녀석은 남아 있었다. 발판으로 삼기 딱 좋은 녀석들이다. 일부러 남겨둔 모양이다.
나는 녀석들의 몸을 밟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거북이의 몸 어딘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어딘지는 상관없다.
"한 대, 두 대."
휘둘러진 검이 녀석의 몸을 후려치기 시작한다. 딱딱한 가죽에는 기스나 가까스로 생길 정도의 얇은 상처. 녀석의 몸에 매달릴 필요도 없었다. 나는 그대로 아래로 추락하면서 녀석의 몸에 계속해서 잔기스를 남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열두 번의 칼질이 녀석의 몸에 상처를 남기게 되었다.
- ...
비명도 없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떨어지는 와중 녀석의 몸을 발로 밟고 뒤로 빠지자, 폭발을 이용해서 허공을 날아다니던 서지현이 내 몸을 받아서 뒤로 빠진다. 방금 전까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감도 제대로 안 잡히던 거대한 거북의 눈에는 빛이 사라져 있었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레벨은 4 올라 있었다.
서서히, 거체가 옆으로 쓰러지는게 보인다. 녀석이 쓰러지며, 이전까지의 지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대한 진동과 질풍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다. 박살난 건물이 통째로 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날뛰기 시작한다.
"이건 안 좋은데."
죽은 거북이 산 사람을 잡아버릴 기세다. 하늘에 떠 있었기에 지진의 영향에서는 벗어났다고 하지만, 뿜어져 나온 바람이 나와 서지현을 통째로 휩쓸어버린다. 쌓여있던 모래는 물론이고, 지진에 박살난 건설 자재들까지 바람을 타고 우리에게 쏟아지기 시작한다.
"허어...억..."
서지현이 만들어낸 방어막이 그 막대한 파편들을 막아내며 위태롭게 떨리기 시작하고, 입에서는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이런 씨."
망가진 덤프 트럭 한 대가 서지현이 만들어낸 방어막을 강하게 후려치고, 위태롭게 버티던 보호막이 마침내 박살난다. 나는 곧장 양 손을 뻗어서 날아오는 트럭으로 가져갔다. 온 몸으로 충격이 전달되면서, 트럭의 전면이 구겨진다. 몸에 힘을 주어 녀석을 옆으로 치우자, 곧바로 트럭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버린다.
"쉬고 있어!"
"괜찮겠어요?"
나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러 우리를 향해 날아오는 온갖 파편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내가 못 막아내겠다 싶을 때 마다 서지현이 다시 보호막을 만들어서 막아내고, 서지현의 보호막이 부서지면 내가 다시 검을 휘둘러 파편을 막아내기를 반복한다.
마침내, 밀려오던 바람이 가라앉았다. 나와 서지현은 다시 안전지대로 돌아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세상에, 핵을 맞아도 이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발로 밟아놓은 크래커처럼 작살난 대지가 눈에 들어온다. 어차피 안전지대에 이 여파가 전달되지는 않았겠지만. 녀석이 쓰러지면서 만들어낸 지진은 수원 전체를 휩쓸어 버린게 확실했다. 아니, 어쩌면 수원 너머에도 영향을 미쳤을지 모른다. 등에 생태계 하나를 짊어지고 다닐 정도로 거대한 녀석이었으니까. 수원을 넘어 안양이나 광명, 더 나아가 서울도 진동을 느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 같다.
녀석이 죽고 나서, 바닥에 뭔가가 툭툭 떨어졌다. 손목밴드 하나와 짙은 곤색의 미니 케이프.
나는 먼저 손목밴드부터 확인해보았다.
[적자생존 : 강한 자가 살아남는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겁니다. 소유자가 자신보다 강한 대상에게서 도망칠 때, 육체와 체력 능력치를 20% 강화합니다. 소유자가 자신보다 약한 대상과 싸울 경우, 대상은 순간적으로 공포에 질리게 됩니다.]
질 것 같으면 도망치라는 건가.
[희생자 : 부드럽지만, 충격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단단하게 변해 소유자를 보호하는 미니 케이프입니다. 자체의 내구도가 훌륭할 뿐 아니라, 소유자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게 되면 케이프가 대신 박살나면서 피해를 전부 흡수합니다. 박살난 케이프는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하고, 완전히 복구되기 전까지는 피해를 대신 흡수 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갖추는 데 필요한 시간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흡수하고 부서졌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어차피 나는 용인에서 구한 코트가 있으니까. 나는 손목밴드를 끼고, 서지현은 희생자를 둘렀다.
우리는 지진으로 박살난 수원을 걷고 걸어서 안전지대에 도착하는데 성공했다. 도착하니 해가 저무는 중이었다.
"자."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지, 쇼핑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시은이 우리에게 뭔가를 내민다. 서지현이 슬쩍 물건을 확인하고 말한다.
"먹는 항생제네요.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는데."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그럼 필요한 만큼 쓰고, 남은 건 돌려줘.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방금 전에 그 지진, 너희가 그 거대한 거북이를 잡는데 성공해서 생긴 일이지?"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두 사람에게 랜드 클리어에 대한 기대를 하는 중이야. 이쪽에서 지원해 줄 수 있는 거라면 나도 눈치 보지 않고 팍팍 밀어 줄 수 있으니까, 말만 하라고. 목욕물 줄까?"
목욕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양아치 아니야?"
마실 물도 부족한 상황에 목욕물이라니. 내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저었다.
"분위기가 좋아. 그 정도는 퍼줘도 괜찮을 정도로. 내가 이미 이야기를 끝내두었으니, 필요하면 거리낌 없이 말해."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럼 고맙게 쓰지."
이시은은 우리가 두 명이니까 두 명 분의 목욕물을 준비할 생각이었고, 이야기를 들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 요구하는 건 너무하지. 하지만 거절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올라온 것은 욕조 두 개를 채울 분량의 물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오늘 밤 중으로 바로 랜드 클리어까지 끝내고 싶은데."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상처만 일곱 군데에요. 하루 쉬고, 내일 진행했으면 하는데."
나는 그 말에 거울을 확인하고는 허허허 웃었다. 망할 놈의 거북이. 하루 쉬는 편이 좋겠다는 서지현의 의견을 채택하기로 했다.
"다른 것들은 죽을 때 되면 곱게 죽더만."
그 자식은 끝까지 사람을 괴롭히고 나서 죽네. 어쨌든, 이제 무지막지하게 덩치가 큰 대신 둔한 녀석들은 우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어쨌든 열두 대 때리는데 성공하면 끝이니까. 그 효과는 거북이에게 톡톡히 실험해 볼 수 있었다.
"아마, 절혼이 없으면 그 해골을 잡기 힘든 식으로 설계되어 있을거야."
"하지만 절혼이 있다고 해도 쉽게 당하지는 않겠죠."
어쨌든 10분 안에 열두 대를 떄려야 상대를 죽일 수 있는게 절혼이다. 덩치가 무지막지한 녀석들이라면 열두 대를 때리는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랜드 마크는 슬프게도 사람만한 크기의 해골이다. 살코기 무게가 없이 뼈 무게만 있다는 거잖아. 꽤나 민첩하겠지.
"물, 다 덥혔어요."
나는 욕조를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하나는 안 덥혀졌는데?"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준 물을 다 쓰기는 좀 미안하니까. 욕조를 하나만 써서, 함께 씻을까 하는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 물도 덥힐까요?"
"큰일 날 소리. 물을 아껴야지. 지구가 아파하잖아."
잠시 뒤, 서지현이 내 등을 타월로 문질러 주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물을 퍼줄 정도면, 사람들이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모양인데."
"기대에는 부응해줘야겠죠. 내일 밤 중으로 랜드 클리어를 시도할 예정이라고 이시은에게 말해주면 사람들도 만족할거에요."
마시기에도 부족한 물을 목욕하라고 내줄 정도였으니, 녀석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고 성과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정 안되겠다 싶으면 물장수 역할을 한 번 더 하면 되겠지. 일왕저수지로 간다면 또 그 램프의 요정 지니들이 달려들어서 귀찮게 굴겠지만...
새로 얻은 참혼이 있는 이상 굳이 구름을 걷어내고 마력을 사용하는 귀찮은 절차를 생략해도 죽일 수 있을거다. 아마, 다시 한 번 물장수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는 가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일 새벽에는 상점에서 새로 스킬을 구매해야겠어."
소모되는 포인트가 굉장할게 뻔해서 용인의 랜드 클리어를 마치고 나서 포인트를 쓰지 않고 아껴두었다. 수원에서 새로 얻은 포인트까지 쏟아넣으면 아마 반사신경 카테고리를 한 단계 더 올리고, 카테고리가 오르면서 이미 배운 스킬 중 뭔가를 마스터 할 수도 있을 거다.
"서울이 머지 않았네요. 자, 등 다 닦았어요."
서지현이 말을 마치고 나서 내 등을 툭 하고 쳤다.
"앞으로 돌까?"
내 말에 서지현이 얼굴을 붉히고는 대답했다.
"싫어요. 창피하게."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수건으로 자기 몸 앞 쪽을 가린 채로 뒤로 돌았다.
이런 식으로 보여주는 건 부끄러운 모양이다.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서지현은 항상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결국, 내 기대와는 다르게 서로 등만 밀어주는 선에서 목욕은 끝나게 되었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