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절혼
생포한 포로들을 데리고 안전지대 안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이시은이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녹음은?"
이시은의 물음에 이경석이 보이스 레코더를 보여주었다. 이시은이 보이스 레코더를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모두 고생 많았어."
이시은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곧바로 사람들을 모아서 지시를 내렸다. 당연히 내용은, 해당 녹음 내용에 이름이 거론된 사람들의 생포였다. 녹음 내용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에 경악이 자리잡았다. 그리고 모두가 무기를 들고 녀석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쇼핑몰이 제법 규모가 있는 크기라고는 하지만, 숨어서 오래 버틸만한 크기는 아니었다. 3시간 정도가 지나자, 녀석들은 모두 붙잡히게 되었다.
"준비해. 그리고 사람들을 전부 모아줘."
이시은은 녀석들을 잡아온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당연히, 처형 준비겠지.
"증거는 충분해."
이시은이 다시 한 번 보이스 레코더 안에 녹음된 내용들을 확인하고 나서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들이 이시은에 대하여 이경석에게 험담한 내용, 오늘 이경석을 공격하면서 털어놓은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포되어서 자백한 이야기까지. 이시은이 보이스 레코더를 조심스럽게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우리를 바라봤다.
"부탁 할 게 있는데."
"너희들이 주도한 걸로 해도 괜찮아."
어차피 이 안전지대에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이끄는 건 이 두 사람이다. 우리가 주도해서 일을 해결했다고 한다면야 당장의 찬사가 우리를 향하기는 하겠지만, 그 전까지는 오누이가 이런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었다는 뜻이 되니까.
어차피 우리가 뭐 생색내자고 이런 일을 벌인 게 아니다. 기왕이면 두 사람의 입지가 오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편이 좋다.
내 말에 이시은이 잠깐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나와 오빠가 외출 한 사람의 명단을 파악해서 의심을 시작한 다음에, 두 사람에게 부탁해서 이 일을 부탁한 걸로 해둘게."
"그래, 그 정도면 될 것 같네."
이시은과 이경석은 해야 할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빠졌고, 나와 서지현은 준비가 끝날 떄까지 쉬기 시작했다.
"이제 랜드 클리어에 다시 집중 할 수 있겠네요."
"내일이 되면 바로 그 거북이부터 찾아가보자고."
이제 더 이상 신경 쓸 일은 없다. 거북이 위로 올라가서 녀석 마빡에 박혀있는 절혼을 파내서 파백과 합치고, 곧바로 랜드 클리어를 준비하면 된다.
"제일 어려운 일이 남은 셈이지."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내 쪽으로 기댄다.
"충분히 준비해서 진행하면, 잘 될 거에요."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사람들이 쇼핑몰 중앙에 있는 거대한 공터에 모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모이고, 이시은이 단상에 섰다.
"볼 건 다 본 것 같네."
우리가 여기에 남아서 처형을 지켜봐야 할 이유는 없다. 나는 서지현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머무르는 곳으로 향했다. 얼마 뒤에, 이시은과 이경석이 뭔가를 싸들고 찾아왔다.
"물은 없어."
이시은의 말에 나는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가장 가치가 높은 선물이 없다니."
"미안, 음식이 부족한 건 밖에서 어떻게든 채울 수 있지만 물이 부족해지는 건 문제가 심각하거든. 사람은 물 없이는 오래 못 버티니까."
나는 그 말에 히죽 웃고는 챙겨온 물자를 손으로 탁탁 쳤다.
"수원의 푸틴씩이나 되시는 사람이 이렇게나 챙겨주다니 영광이기도 하지. 하지만 이렇게 많이는 필요 없어. 다 챙겨가지도 못할테고. 챙길 수 있는 만큼 챙기고, 나머지는 그냥 마음만 받도록 하지."
내 말에 이시은이 인상을 팍 썼다.
"어디에서 폴로늄을 좀 구할 수 있으면 좋았을텐데."
왜, 물에다가 넣어서 주게? 인상을 쓰고 있는 이시은을 바라보던 이경석이 고개를 돌려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수원에 온 목적을 무사히 달성한 다음에, 랜드 클리어를 꼭 성공했으면 좋겠습니다. 두 사람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요."
이시은이 잠깐 우리를 노려보다가 말했다.
"소핑몰 안에 약국은 있었어. 혹시 필요한 의약품이 있으면 말해. 제공해 줄테니까. 식량도, 부족하면 말하고."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가 성공할 거라고 전제하고 우리도 나름대로 준비를 할 생각이야."
준비라, 무슨 준비? 내 표정을 보고 이시은이 말했다.
"네가 말한, 그 이천에 머무르고 있다는 조직. 랜드 클리어가 끝나고 나서는 접촉해 볼 생각이니까."
아하, 서지현이 그 말에 웃음을 지었다.
"가능하면 힘을 잘 합쳐보는 쪽으로 생각해보세요. 그쪽도 그렇고 당신들도 그렇고 우리에게 진 빚이 있으니, 나중에 도움을 받을 상황이 오면 그 동안 해준 일만큼 무지막지하게 뜯어낼 생각이거든요."
이시은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완전히 공짜는 아니었구나."
"불만이라도?"
내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리가. 차라리 이게 공짜로 받은 물건이 아니라서 다행이야. 사실 좀 신경쓰였거든. 덕분에 좀 마음이 편해졌네."
그럼 다행이고. 그 대화를 끝으로 오누이는 물건을 두고 떠났다. 나는 녀석들이 돌아간 다음에 서지현을 보며 말했다.
"피곤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 너절이들 몇 마리랑 잠깐 놀아주었다고 피곤해질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게다가 아직 해가 떠 있다. 바로 쉬는 것도 선택지가 될 수는 있겠지만. 이제 막 12시가 지난 참이니까.
"점심 먹고 바로 장안문 쪽으로 향할까요?"
"그러자."
대단하게 챙겨 먹을 생각은 딱히 없다. 적당히 통조림 몇 개를 꺼내 물과 밥을 챙겨 먹으면서 나는 서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다음 목표이자, 수원으로 향했던 원래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거북이에 대한 정보였다.
"항공모함이냐."
정확히 말하면 바다 위를 떠다니는게 아니니까 항공모함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내 중얼거림을 들은 서지현이 슬쩍 서류의 내용을 훑어본 다음에 말했다.
"거북이 머리로 올라가는 길이 꽤나 험난하겠네요."
거대한 거북이의 등 위에는 온갖 종류의 벌레들이 날아다니는 모양이다. 거북의 등딱지 위에는 나무나 풀 같은 것들이 자라는 모양이다. 벌레들은 거북 등 위에 쌓여있는 흙 위에서 생활하며, 근처에 있는 일왕 저수지에서 물을 보충하는 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물가에서 만났던 벌레들은 거북이 등에 사는 녀석들 중 일부다.
"자기들 안방에 올라가려고 들면 그 벌레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벌레들이 그 거북이 몸 위에 기생하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수원의 생존자들은 녀석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었을테니까.
"출발하죠."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시 수원의 안전지대를 떠났다. 곧바로 덮쳐오는 더위는 서지현이 금방 다시 통제를 시작해 서늘하게 만들고, 우리는 비교적 쾌적한 환경 속에서 장안문 근처로 걸어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장안문 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자, 나는 수확자로 허공에 궤적을 남긴 채 그걸 밟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어때요?"
서지현의 물음에 나는 장안문 쪽을 살펴보고 착지한 다음에 말했다.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무르고 있어. 하지만, 머리의 위치가 바뀌었는데."
낫을 꺼내든 서지현이 나를 한 번 바라본다.
"어차피 뭔가를 타고 올라가는 건 당신 전문이잖아요."
그래, 올라가는 거 자체는 문제 될 부분이 거의 없다.
"문제는 저 거북이 근처로 다가갔을 때 경험하게 될 일이지."
서지현이 꽤나 자신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벌레들은 불에 약하지 않을까요?"
그럴듯한 추측이다. 일반적으로 벌레는 불에 약하지. 군대에서 에프킬라와 라이터를 들면 세스코 부러울 게 없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치면 전기에도 약하잖아."
전기 파리채가 얼마나 효과가 좋은데. 내가 배워둔 쇼크도 꽤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었다.
"판단은 만나보고 나서 하죠."
우리는 내가 하늘에서 파악한 거북이의 위치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봐도 저렇게 큰데. 접근해서 올라타려고 하면 거의 등산을 하는 기분이겠네요."
문자 그대로 산만한 거북이다. 가까히 도착해서 올려다보니,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게다가 살가죽도 뭘로 만들어진건지. 살짝 만져봤는데 엄청나게 딱딱하다. 혹시나 싶어서 수확자로 그어보았지만, 두터운 거죽에는 약간의 흠집만 생길 뿐이다. 심지어 피도 한 방울 나지 않는다. 가죽이 얼마나 두꺼운거야.
정 죽일 수 없다면 마빡에 박힌 절혼만이라도 챙겨야 한다. 이런 녀석을 제거하는데 성공하면 분명히 얻게 되는 경험치의 양도 장난이 아니겠지만. 죽일 방법이 있기는 한가?
"입 안으로 들어가서 심장을 조지고 뒷구멍으로 나오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하긴 딱 봐도 엄청나게 딱딱한데다가, 저 녀석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수확자의 날이 박혀든다고 해도 살갗에 머리카락 박힌 정도의 따끔한 고통 정도만 줄 수 있을 거다. 엄청나게 크니까 잡으면 경험치도 엄청나게 주겠지.
"꼭 그쪽으로 나올 필요는 없어."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나오는 방법도 있으니까. 거대한 거북이에 접근하기 시작하자 무너진 땅이 눈에 들어온다. 쩍쩍 갈라진 땅의 틈새는 가뭄 같은 걸로 갈라진 귀여운 모습이 아니라, 아예 작살이 나서 절벽 비슷한 꼴로 변해 있었다.
녀석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자. 구구궁, 하는 소리와 함께 땅이 몸서리 치기 시작한다.
"으와아악."
대지를 뒤흔드는 지진 속에서 억지로 자세를 유지하던 나는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진 걸 느끼고 거북이를 바라봤다.
"저 새끼 고개 돌렸는데."
거대한 암회색의 용 대가리가 들어올려진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 드리워진 어둠은 저 대가리가 해를 가려서 생긴 그늘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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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자연의 파괴자
목표 : 거북의 등에 조성된 생태계는 온갖 거대한 벌레들을 키운다. 벌레들은 거북의 등 위에서 생활하며, 필요한 수분을 일왕저수지에서 보급받고 있다. 거북을 죽이고 등 위에 만들어진 생태계를 파괴해라.
보상 : 3300pt, 장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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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혼, 보여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 거리에서는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작은 모양이다. 하긴, 머리통이 고층빌딩 만한 크기니까. 녀석이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1초 정도 뒤에 확 하고 우리 몸을 덮치는 강렬하기 짝이 없는 폭음, 나와 서지현은 얼굴을 찡그린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고함 한 번 질렀을 뿐인데 온 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것 같은 느낌이다. 고막이 안 터진게 기적이잖아!
녀석의 외침과 함께, 등 위에서 뭔가가 한 가득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벌레들이다. 저건 딱정벌레, 저건 사슴벌레, 저 탱크 같은 녀석은 장수풍뎅이... 나는 녀석들을 보다가 말했다.
"지현아. 달리자."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우리는 곧바로 거북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앞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머리로 향하면 된다. 어차피 저 벌레 새끼들이랑은 싸울 수 밖에 없겠지만. 거북이의 머리통은 우리가 자신의 다리를 향해 달려오는 것을 그냥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녀석의 다리가 살짝 들어올려진다. 뭐, 어디까지나 덩치에 비해 살짝 들어올려진 거고, 실제 들어올린 높이로 생각해보면 들어올려진 틈 안으로 단독주택 한 채 정도는 우습게 들어갈거다. 살짝 들어올려졌던 녀석의 다리가 땅을 그대로 쿵 하고 내려찍었다.
"어딜!"
나는 서지현의 손을 잡고 그대로 뛰어올라 수확자를 휘두른 다음, 그 궤적 위에 올라탔다. 땅을 타고 퍼지는 지진은 이걸로 피했고, 곧바로 이어지는 건 그 무게로 인해 일어난 바람을 견디는 일이다. 나는 프릭션 컨트롤로 밀려오는 풍압에서 자유로울 수 있지만, 그러면 서지현이 더 이상 나를 붙잡고 있지 못할 거다.
바람과 함께 날아오는 온갖 덩어리 진 잔해들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말했다.
"저건 제가 막을게요!"
서지현이 주변에 방어막을 펼친다. 나는 다시 수확자를 휘둘러 만들어진 궤적을 손으로 꽉 붙들었다. 서지현이 만들어낸 방어막에 바람을 타고 날아온 건물의 잔해와 박살난 대지의 파편들이 쏟아진다. 퍼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막이 뒤흔들린다.
밀어닥치는 바람이 우리를 다시 날려보내려고 하지만, 내가 수확자의 궤적을 꽉 붙들고 있어서 우리는 밀려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