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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21화 (121/237)

# 121

오누이

새벽에, 자료를 챙겨든 이시은이 우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 자료. 아, 혹시 뭐 먹고 싶은거 있어?"

안전지대에서 본 이시은 중에 가장 기분이 좋아보이는 이시은이다. 낮게 콧노래를 부르는 이시은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한 마디 했다.

"그럼 나는 채끝살 스테이크."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어머, 언니. 농담도 심해라."

서지현이 참 복잡한 표정을 짓고 이시은을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항우울제는 조심해서 먹는게 좋아.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거든."

이시은이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헤, 그런거 아닌데?"

아닌게 아닌 것 같은데. 저 정도면 항우울제 한 통을 다 먹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겠다. 이시은은 밝은 목소리로 자신이 이경석과 나누었던 대화를 전달해주었다.

어쨌든 자기 오빠와의 화해는 좋게 끝난 모양이다. 게다가 화해 이후에는 이경석에게도 자기들을 향해서 다른 녀석들이 벌이고 있는 수작질에 대해서 언급을 한 모양이다. 이경석은 이시은의 말을 진지하게 믿어준 모양이다. 모르고 당한다면 피하기 힘든게 이간질이라고 하는 수작이지만, 알고 있다면 당해주기가 힘든게 또 이간질이라는 친구의 본질이니까.

이경석이 주변에서 날려대는 뻐꾸기에 홀려서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럼 난 이만, 좋은 밤 보내!"

서류를 전달해준 이시은이 높은 톤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다음에 돌아갔다.

"지 오빠랑 결혼을 할 기세네."

내 말에 서지현이 으으, 하는 소리를 냈다.

"설마요. 자기 오빠랑 유사한 성격의 사람과 결혼하겠죠."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말했다.

"예를 들면 김용천?"

냉정한 평가를 하자면 전반적으로 김용천이 이경석보다는 좀 더 나은 편이지만, 닮은 구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 왜요, 평화의 상징 비둘기로는 부족해서 이제는 에로스의 역할까지 빼앗고 싶나봐요?"

그럴리가 있나. 중매까지 서 줄 생각은 없다.

"게다가 나이 차이도 있잖아요."

아하하, 이십대랑 결혼까지 생각하는 서른 중반이 듣기에는 좀 아픈 말인데.

"조직 소개 정도는 해줘도 나쁠 거 없잖아."

김용천에게 우석진 부부를 소개시켜줬던 것처럼 말이지.

"그렇네요. 어쨌든 서울로 들어가기 전에 뒤에 낄 수 있는 조직이 하나 정도 있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김용천 더하기 우석진 부부라고 하면 어지간한 부분에서는 문제가 생길 여지가 적지만, 단호함과 뛰어난 조직 관리 능력이라는 점에서는 부족한 점이 좀 있긴 할거다. 우석진 부부도 그렇고 김용천도 그렇고, 300명이 넘어가는 대규모의 조직을 다뤄본 적은 없잖아.

하지만 이시은과 그 친구들이 합류하게 된다면 그 점에 있어서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겠지.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사항이네. 노리고 진행한 일은 아니지만, 일이 또 흘러가려고 하면 이렇게도 흘러가는 법이군.

어쨌든, 목록에서 추려낸 후보들의 신상명세서를 훑어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오늘 자둬. 감시는 내가 할테니."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은 당신이 자는거에요."

그래야지, 내가 초인도 아니고 며칠 밤 동안 잠도 안 자면서 돌아다닐 생각은 없다.

하루씩 번갈아 가면서 감시를 하면 될 것이다. 아마 빠른 시일 안에 수원 안전지대에 자리잡고 있는 불순한 의도를 가진 세력들은 회합 자리를 마련 할 것이다.

"다 된 밥에 갑자기 누가 물똥을 싸지른 격이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에요."

더럽지만 참 맞는 비유다. 두 사람이 심각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잡초들은 밥이 거의 다 지어졌다는 생각에 기대가 부풀어있었을텐데, 갑자기 오누이가 화해를 해버렸다. 얼마나 짜증날까. 당연히 모여서 이야기를 나눌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푹 자고 내일 보자."

내 말이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불에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

"목록 중에, 2층에서 잠을 자는 녀석이 하나 있었지."

사람이 추락하는 일이 없도록 세워 놓은 난간을 훌쩍 뛰어넘은 나는 프릭션 컨트롤을 이용해서 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도착한 장소는 2층.

곧바로 녀석이 잠을 자는 장소를 체크해봤다.

"아직 아닌가."

그대로 벽에 매달린 채 녀석이 잠들어 있는 것을 한 번 슥 훑어보고 나서 고개를 갸웃했다.

"잠깐, 마력이라니."

자는 녀석 주변에 희미하게 마력 같은게 느껴진다. 구체적으로 그 마력으로 뭘 하고 있는지는 내가 알 수 있는 길이 없다. 나는 마력 쪽 분야에는 아마추어니까. 나는 혹시나 싶어서 유력하게 의심하고 있던 다른 후보들의 잠자리도 빠르게 들러보았다.

마찬가지다. 마력이 느껴진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곧바로 다시 벽을 타고 올라가 서지현이 자고 있을 방 안으로 돌아갔다.

"무슨 일 있어요?"

다행이다, 아직 안 자고 있었구나.

"자고 있는 녀석에게서 마력이 느껴지는데, 여기에 대한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해."

내 말에 서지현이 머리를 긁었다.

"어머, 전문가라는 단어는 조금 부끄러운데."

서지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잠옷 위에 대충 옷가지를 걸친 채로 나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나는 서지현을 끌어안은채 휙 하고 2층으로 내려갔다. 서지현이 자고 있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마력이 느껴져요."

서지현이 한 동안 자고 있는 녀석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저건,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에요."

"자면서 꿈을 꾸는 건 대단한 일은 아니잖아. 그거랑 마력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다른 녀석들도 한 번 봐야겠는데요. 그래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지현의 부탁에 나는 순순히 서지현을 데리고 다른 녀석들이 자는 곳으로 향했다. 유력한 후보들을 훑어본 다음에 서지현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이마를 짚었다.

"이 자식들,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중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야.

"부가 설명이 필요한데."

내 말에 서지현이 난간에 기댄채로 대답했다.

"어떻게 설명하는게 좋을까... 그래요, 꿈을 온라인으로 꾸는 중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거에요."

한 방에 이해되는데.

"그럼, 녀석들이 나누는 대화는 들을 방법은 없는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힘들걸요. 전문 분야가 아닐 뿐만 아니라... 게다가 설사 들어갈 수 있다고 해도 증거 문제가 있어요."

그래, 그게 문제네. 꿈 속에서 증거를 찾아내서 꺼내 올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꿈 속에 보이스 레코더를 들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꿈 속에서 보이스 레코더로 녹음을 해도 현실 세계로 가져 올 수는 없다.

"하지만 덕분에 그 작당질에 참가한 녀석들을 구분하는 건 쉬워졌네요."

그래, 증거를 수집할 방법이 애매한 대신 누가 이 일에 가담했는지는 확실하게 구분 할 수 있었다. 자고 있는데 마력이 느껴지는 녀석들을 추려내면 되는 거니까.

"오늘은 일단 사람들만 파악해두고, 방법을 좀 생각해보도록하죠."

그래야 할 것 같다. 나와 서지현은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자는 녀석들 중에서 마력이 느껴지는 놈들을 추려내기 시작했다.

"17명이잖아."

원래 생각했던 숫자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았다. 우리가 추려냈던 숫자가 다섯 명 정도였는데, 실제로 가담한 녀석들의 숫자는 세 배 이상이다.

"이러면 주동자를 가려내는 것도 골치 꽤나 아프겠는데요."

주동자라.

"꽤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녀석이 주동자일 확률이 높겠지."

우리는 녀석들의 이름을 모른다. 이시은의 말대로 사람의 숫자는 300을 넘어가고, 우리는 여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두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나는 들고 있는 수첩에 녀석들이 자고 있는 방과, 대략적인 외모의 생김새를 적어두었다.

내일 중으로 이시은에게 명단에 추가로 적힌 녀석들의 신상명세를 확보해야겠다.

"처리는... 일단 오누이들과 상담을 해봐야겠지."

서지현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녀석들은 꿈 속에서 온라인으로 소통을 하는 모양이고, 남들에게 보여 줄 만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은 아니니까 바로 녀석들의 숨통을 끊어야 할 이유는 없다. 일단 이시은과 이경석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들어봐야겠지.

"바로 물어보러 갈까요?"

그러는 편이 좋겠지. 대낮에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썩 좋은 생각이 아니다. 자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 깨워서 말하면 될 일이다.

"너는 이시은에게, 나는 이경석에게."

서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그 길로 흩어져서 각자 만나기로 한 사람을 찾아갔다.

"..."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나를 마중해주는 것은 코 앞으로 찌르고 들어오는 창이었다. 제법 빠르잖아. 손을 뻗어 그 창을 꽉 붙잡은 나는 이경석의 얼굴을 확인하고 말했다.

"안 자고 있었군."

"오현석씨."

이경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어후, 하는 소리를 내었다. 잡고 있던 창을 놓아주자, 이경석이 다시 테이블 옆에 창을 기대어놓고는 이마를 쓸어올렸다.

"방금 전의 조언은 고마웠습니다. 무슨 일로 다시 오신거죠?"

나는 테이블 위에 올라 앉은 채 말했다.

"이시은에게 이야기는 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더러운 수작 말이군요. 예, 이야기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잠을 설치는 중이었죠. 녀석들이 그런 수작을 가지고 있다면, 상황이 자기들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저와 시은이의 목숨을 노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듣고 보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다. 이시은과 이경석은 화해했다. 그리고 이경석은 앞으로 녀석들이 부리는 수작에 걸려 넘어가주지 않을것이다.

쉬운 방법이 막혀버렸으니 녀석들은 위험한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이경석을 앞에 세워서 자기들이 뒤에서 이익을 챙기는 대신, 그냥 대놓고 쿠데타를 벌이는 방법 정도가 남아있겠군.

이경석이 자기 목숨줄 걱정을 하는 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고, 당연히 해야 하는 걱정이기도 하다.

"가담자의 숫자를 추리는데 성공했어."

내 말에 이경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벌써 말입니까? 저랑 시은이는 이제 막 화해한 참인데. 일처리가 굉장히..."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한 일은 아니고. 지현이가 고생했지. 녀석들은 꿈을 통해서 의견을 교환하는 모양이야."

설명을 들은 이경석이 눈 언저리를 비비고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증거를 수집하기가 힘들어."

"그렇겠네요. 이걸 어쩌면 좋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 분에게 부탁해서 녀석들의 목숨을 거둬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시은이의 말이 맞아요. 그냥 죽이는 걸로 끝내면 안됩니다."

이번 일을 예방주사로 삼아야 한다는 게 이시은의 생각이다.

"게다가 가담자가 17명이야. 이 녀석들이 그냥 우리 손에 죽어나가게 된다면 사람들이 불안해하겠지."

물론 우리가 했다는 걸 들키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17명의 죽음이라는 사태를 허허허,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 갈 수 있을 정도로 신경이 굵은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사람들이 불안에 떠는 건 조직의 유지와 운영에 그렇게 좋은 상황은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우리가 들키지 않고 처리하는데 성공했다고 해도...

그런 명탐정 코난에서나 나올 법한 의문의 17 연쇄 살인 사건 같은게 가뜩이나 오가는 사람이 적은 안전지대 안에서 벌어진다면 의심은 눈길은 나와 서지현에게로 향할 수 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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