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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20화 (120/237)

# 120

오누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맥주를 비우고는 입을 열었다.

"여동생에게 지금처럼 말해봤어?"

내 말에 이경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합니까."

그렇지. 그렇게 못하겠지. 나는 그 말에 깊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가끔 말하는게 있잖아. 힘들 때 기댈 수 있는 건 가족말고 없다."

나는 픽 웃고는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개소리야. 힘들 때 가족에게 의지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내 말에 이경석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내 말을 믿어. 내 누나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추악하기 짝이 없는 성폭행을 당하면서도 어머니나 나에게는 입 벙긋 한 번 안했으니까."

쥐여져 있던 유리잔이 손 안에서 금이 가다가, 이내 부서진다.

"가족한테 말 못 할 말이라는게, 세상에는 너무 많아."

직장에서 짤린 아버지가 출근하겠다고 가족들에게 거짓말하고 나가서 멍하니 공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병에 걸린 어머니가 가족들에게 아픈 사실을 숨긴다.

고시원에서 피곤하게 하루 하루를 보내는 딸이 어머니에게는 잘 지내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학교에서 왕따 당하는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는 밝은 표정을 짓는다.

또 뭐가 있을까. 차마 가족들에게 말하지 못할 일들이라는게.

"그래서 문제가 심각해지는거야. 말할 수 없어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멍하니 손에서 부서진 유리잔을 바라봤다. 유리컵은 박살났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분인지 말하지 않으면 당연히 모르지. 가족이 궁예냐?"

관심법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불만이 있고, 고민이 있고, 힘든 일이 있으면 말을 해야 할 거 아니야. 말하지 못한다면 가족만큼 쓸모없는게 없지만, 말한다면 가족만큼 큰 도움을 주는 사람들도 없어. 그리고, 너무 늦어버리면 뭐든지 해줄 수 있는 가족들이 달려들어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

마왕이나 악역들이 가장 강력한 필살기를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쓰는거랑 다를게 없다. 잔뜩 아껴두었다가 맞서 싸워야 하는 용사는 강해질 만큼 강해져서 필살기도 소용없게 되고,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경석이 내 말을 듣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시은이에게 이야기를 듣고 걱정해서 찾아와주신 건 고마워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오늘은 조금 심하게 싸웠지만. 안 그래도 내일 즈음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풀 생각이었어요. 우린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그러시겠지.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 네가 화낼만 해서 화를 낸 거라고 생각한다. 네가 후회할 일이 아니다. 괜찮다. 마음 쓰지 말아라. 그런 이야기 할 거잖아, 그렇지?"

내 말에 이경석이 움찔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유리 조각들을 테이블 위에 주르르 쏟았다.

"사실은 안 괜찮은데, 화를 낼 만한 이유가 있어서 화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그렇게 공허한 화해를 하는거지."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심각한 크기의 종기에 컨실러를 덕지덕지 발라놓아서 겉보기에 멀쩡하게 만든다고 해서 종기가 사라지는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억눌린 종기는 더 성이 나서 심각해진다.

"두 사람 모두 나쁜 사람들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바보같은 속앓이를 하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네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옆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여동생은 사과하고 싶어해,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후회하고 있어. 한 번 찾아왔는데 대화를 할 상황이 아니라서 다시 돌아가서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더라. 아마, 조금 있으면 너한테 찾아올거야."

내 말에 이경석이 멍하니 테이블 위에 뿌려진, 박살난 유리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은이가 부탁한 겁니까? 찾아와서 말 좀 잘 해달라고?"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찾아가면 또 아무 말도 못 할까봐 두렵다고, 꼭 좀 부탁한다고 했어. 당연히, 돌아가서는 우리가 가서 먼저 이야기를 나눴다고 말할 생각이고."

내 말에 이경석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혹시, 무슨 대가를 받기로 한 겁니까?"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왜, 대가 받고 일 한 거면 좀 우울해질 것 같냐.

"니들이 우리에게 줄 게 뭐가 있는데?"

한 번 잘 생각해봐. 내 말에 이경석이 대답했다.

"하지만 수액 같은 경우에는..."

"저는 공짜로 일해주는 성격이 아니라 예의 상 챙겼을 뿐이에요. 어차피 여기까지 오면서 챙긴 물과 식량으로도 한 달은 버텨요."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도와주실 이유가 없잖아요."

이경석의 말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내가 오현석이라는 연쇄살인범이라는 건 알겠지. 혹시 내가 왜 사람들 죽이고 다녔는지 아냐?"

내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생 때 들은 거라서 어렴풋이 기억만 날 뿐이지만요. 아까 말씀하신 그 누나 문제가 관련이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그래. 내가 참 드물게도 사연이라는 게 있는 연쇄 살인마인데, 그 사연이 또 가족이랑 연관이 있거든. 그래서 그냥 도와준거야."

내 말에 이경석이 잠깐 나를 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은이와는... 잘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그래라. 우리는 문을 나서서 이시은이 머무르는 곳으로 돌아갔다.

"어때? 뭐라고 해? 아직도 화 난 것 같아? 나, 저기... 찾아가도 되는거지?"

기다렸다는 듯이 물음표를 한 사발 쏟아놓는 이시은. 그리고 곧바로 녀석이 대답을 갈구하기 시작한다. 나는 얼굴을 구기고 있다가 한숨을 푹 쉬고 서지현을 바라봤다.

"우리가 어쩌다가 인간 메신져가 되어버린 걸까."

"자처한 일이잖아요."

그래, 그렇긴 하지. 서지현이 나 대신에 입을 열었다.

"가서 이야기 나눠봐."

이시은이 바로 문을 나섰다.

"저 싸가지. 어떻게 사람이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안하냐."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도 없었던 모양이죠. 우리는 이제 숨어있는 잡초를 찾아내서 뿌리를 캐낼 준비나 하죠."

그래야지. 이건 서로 사과 나눈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제 아무리 밭을 이쁘게 갈아놓고 종자를 심어놔도 잡초가 자라면 결국 다 망치는 법이니까. 명백한 악의와 사악한 의도는 훈훈한 분위기에 찬물 뿌리는 데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법이라지.

***

이시은과 이경석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시은은 고개를 숙인채로 손가락을 이리저리 꼼지락거릴 뿐이고, 이경석은 그런 이시은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 서류, 많이 찾아다녔던 모양인데. 미안하다, 내가 또 실수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어."

이시은이 그 말에 화들짝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손을 저었다.

"어? 아니, 아니야. 괜찮아.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럴 수도 있지. 저기, 오히려 내가 말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오빠도 지금 많이 힘들텐데. 도움은 주지 못할망정."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숨을 한 번 깊게 내쉬었다. 시선에는 오현석이 부수고 간 유리잔의 조각들이 보인다.

솔직하게 느끼는 기분을 말해라. 그러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실천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색함이 감도는 와중, 이경석의 표정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너 이시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오빠...?"

"그래, 힘들어."

마침내 이경석의 입에서 괜찮다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가 나왔다. 이경석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이시은이 침을 삼켰다.

"그렇지, 나가서 해야 하는 일도 엄청나게 많으니까. 잠도 부족할거고..."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고개를 저었다.

"시은아, 나는 그런 것 때문에 힘든게 아니야. 고생이라고 하면 오히려 네가 더 많이 하고 있잖아."

"아니야, 오빠가 더 힘들지."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가만히 자기 여동생의 얼굴을 바라봤다.

"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초라해지는 기분이야."

이경석의 말에 이시은이 숨을 약간 들이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현석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이야기가 이경석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내 여동생. 바라보고 있으면 대견하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해야 하는데. 내가 인간이 못되먹어서 그런지 그렇게 순수하게만 생각하기가 힘들더라."

"... 오빠?"

이시은 앞에서 이경석은 고개를 숙였다.

"내 여동생이 나에게 자랑스러운 것처럼, 너도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해 줄 수 있는 오빠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자랑스러운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아. 그냥, 부끄럽지 않은 오빠라도 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왜 나는 이렇게 부족한 점이..."

이시은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말했다.

"시끄러."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하던 말을 멈췄다. 이시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경석을 바라보다가 바지를 걷어올렸다. 발목에 나 있는 흉터가 보인다.

"보여? 날 살린게 오빠야. 도망치다 다리가 낀 나를 버리지 않았잖아. 괴물과 싸우고, 나를 구해서 도망쳤잖아."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잠깐 멍하니 그 상처를 바라봤다.

"나는 오빠가 도와줘서 살았어. 아니었으면 죽었다고! 부끄럽지 않은 오빠가 되지 못한다니,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게 된거야."

이시은이 울먹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도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거야. 응? 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그러니까 그러지 말아줘 제발."

이경석이 이시은의 말을 듣고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나는..."

이시은이 잠깐 이경석을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는 코를 한 번 훌쩍였다.

"그래, 안전지대에 사람이 제법 모이고 나서는 생존자들의 관리와 같은 일들은 내가 하고 있지. 하지만 안전지대에 정말 필요한 건 내가 아니야, 오빠라고."

이경석이 방금 전에 오현석 앞에서 했던 말을, 이시은이 그대로 이경석에게 돌려주었다. 이경석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소리야. 여기에 필요한 건 너지."

이시은이 이경석의 말에 대답했다.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오빠와 함께 싸우고, 괴물들의 공격 속에서 물자를 확보해. 함께 싸운다고! 사람들은 내 말에 복종은 하지만, 진짜 따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오빠의 말은 믿고 따라. 내가 사람들에게 독선적으로 굴 수 있는 이유 중에 상당수는 오빠 때문이기도 해."

이시은이 그렇게 말하고 잠깐 몸을 떤 다음에 말했다.

"내가, 내가 화가 나서 오빠에게 막말을 할 때가 많지만... 그게 진심은 아니란 말이야. 고맙다는 말은 쉽게 안 나오지만, 화내는 건 쉽게 나올 뿐이야. 그냥, 그런 것 뿐인데."

말을 이어가던 이시은이 잠깐 심호흡을 하고 이경석을 바라봤다.

"나는 오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어,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리고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 그러니까, 제발 그런 생각하지마."

이경석이 잠깐 이시은을 바라보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맙다. 나도 더 열심히 할게."

이시은이 이경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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