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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119화 (119/237)

# 119

오누이

내 말에 이시은의 몸이 내 쪽으로 돌았다. 눈가에 남아있는 눈물 자국을 보니 고개 돌리고 하고 있던 일이 뭔지 짐작이 되는데.

"충분히 가능하다고 봐요. 애초에 우리가 이경석 본인에게 자료를 건네받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녀석들의 목적은 간단하다. 계속해서 이시은과 이경석 사이에 똥물을 뿌리며 이경석을 꼬드겨 이시은에게서 실권을 빼앗아내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시은과 이경석이 계속 다퉈야 한다. 그래야 이경석을 부추키는게 더 쉬워질테니.

우리에게 전달해주기로 한 자료를에 슬쩍 다른 자료들을 낑겨넣는 행위는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사항이다. 실제로 그 일 때문에 이경석과 이시은은 방금 전에 심하게 싸웠으니까. 물론 증거라고 할 만한 건 아직 없다. 애초에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주도하고 있는 녀석을 찾아내야 해. 어차피 옆에서 바람 넣는 녀석들이 이 일을 주도하고 있지는 않을거야."

그렇겠지. 원래 일이라는게 계획하는 사람 따로 있고, 실행하는 사람 따로 있기 마련이다. 이시은의 말에 나는 픽 웃었다.

"주도한 녀석을 찾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일단 너는 네 오빠와 화해하는게 더 중요할 것 같은데."

내 말에 이시은의 표정이 울상으로 변했다.

"하지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한 마디 했다.

"하지만이고 뭐고, 오빠 한테는 사과했어?"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이고 첨언했다.

"사과를 듣고 나서 내가 심한 말을 했어."

서지현이 의자에 앉아서 테이블을 손가락을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너는 오빠랑 관계 회복에 집중해. 누가 주도한 건지 찾아내는 건 우리가 할테니까."

그래, 어차피 주도자를 찾아내는 건 나랑 서지현이 할 수 있는 거지만 화해와 오해의 종식은 이시은이 직접 이경석과 대화를 나눠야 하는 일이니까. 아무리 우리가 도와준다고 해도 대화까지 대신 해 줄 수는 없는거잖아.

"... 노력해봐야지."

이시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고민에 빠져들었다.

"네 오빠가 안전지대 밖으로 나갈 때 동행하는 사람들이 누군지 알아?"

내 말에 이시은이 고민을 하는 자세 그대로 서류를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사람들이 안전지대를 나갈 때는 언제나 오빠와 동행해. 그 목록에는 최근 한 달 간 사람들의 외출 횟수가 적혀있어."

나와 서지현이 서류를 훝어보고 있자, 이시은이 잠깐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고마워. 아마 나 혼자서는 막막했을텐데."

이시은의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한 마디 던졌다.

"우리가 속이고 있다는 의심은 안 하시고?"

이시은이 서지현의 말에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너희들은 일왕저수지에서 물을 꽉 채워오는데 성공했어. 물을 푸는 동안 아무 일도 없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이렇게 말짱히 살아있잖아. 너희들이 우리에게 해코지를 하고 싶었다면 계략이 아니라 힘으로 밀어붙이는 편이 훨씬 간단해."

"훌쩍거리면서도 머리는 돌아갔던 모양이네."

내 중얼거림에 이시은이 잠깐 나를 노려본다.

"그래, 울었다. 우는게 뭐가 잘못된건데."

나는 서지현의 말에 서지현을 바라봤다.

"혹시 내가 우는게 잘못되었다는 말을 했어?"

"전혀요."

서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시은을 보며 말했다.

"귀가 어두운 모양인데, 보청기를 끼는게 어때."

이 정도 크기의 쇼핑몰이면 그런 것도 취급할 걸.

"시끄러."

도와주는 사람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이게.

"하지만, 우리를 도와줄 필요가 없을텐데 이러는 이유는 여전히 모르겠네."

"이유 없어. 그냥. 내가 가족이라는 단어는 꽤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거든."

왜, 교육을 못 받아서 한이 쌓인 국밥집 할머니께서 전 재산을 모아서 장학재단에 넘기고 하는 미담들 있었잖아. 아마 그 할머니 마음이랑 비슷하지 않을까. 물론 그것만큼 숭고한 행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서류를 훑어보던 나는 결론을 내렸다.

"대충 다섯 명 정도가 눈에 확 띄는데."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요 한 달 정도 사이에 이경석과 함께 나들이를 13번이나 나간 여자도 있어요."

뭐야 그건, 한 달에 13번이라면 거의 한 달에 안전지대 밖에 살림이라도 차릴 생각인가. 나는 그 말에 서류를 뒤져보기 시작했다.

"네 오빠 실수가 잦아지기 시작한 시점이 언제야?"

내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잦아진게 아니라, 최근에만 좀 실수를 하는 것 뿐이야.

"그래 인마, 니 오빠 잘났다.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빨리 날짜나 말해."

내 말에 이시은이 윽,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잠깐 고민하다 싶더니 입을 열었다.

"한 5주 전부터."

대충 일치하네. 미리 공작질을 해놓고 나서 이시은이 자기 오빠에게 몇 번 쓴소리를 하고 난 다음에 공작에 들어가기 시작했을테니까. 다음은 공통점인데. 나는 이름을 추려낸 다음에 이시은에게 넘겨주었다.

"이 녀석들, 서로 친한가?"

내 말에 이시은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미안, 3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관계를 모두 알고 있을 수는 없어."

알 도리가 없다는 건가.

"그럼 직접 살펴봐야겠네."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일이라면 함께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물론 상황이 여의치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가능하면 죽이지 말고 살려둬. 제압하지도 말고."

살려두라니.

"갑자기 없는 자비심이 샘솟은 건 아닐테고."

내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녀석들이 한 일은 당연히 징벌받아야 하는 일이야. 하지만 징벌은 사람들 앞에서 죄목을 밝히고 집행될 때 가치가 있는거야. 아, 혹시 그런 일을 벌였다는 증거도 수집 할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시은은 그렇게 말하고 뭔가를 내밀었다. 건전지로 돌아가는 보이스레코더다. 본보기라는 건가. 겸사겸사 이 바닥 왕고가 누군지 확실하게 해두기도 할 겸.

"귀찮은 조건을 붙이네."

"도와주는 김에 확실하게 도와줬으면 좋겠어. 물론, 욕심을 내다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상황이 아니다 싶으면 그냥 죽여도 무방해."

그래도 저렇게 말을 했으니 최소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은 해야겠지. 나는 보이스 레코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우리는 그런다고 치고..."

나와 서지현의 시선이 이시은에게로 향했다. 너, 사과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갑작스럽게 쏘아지는 두 쌍의 시선에 이시은이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할 거야. 한다고."

서지현이 잠깐 이시은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또 찾아가서는 '하지만 오빠도 잘못한 건 있잖아?!' 같은 소리만 안하면 될 거야."

그 말을 듣고 나서 떠오른 이시은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서지현이 귀신같이 찝어낸 모양이다.

"그건 어떻게..."

"당신 같은 성격이 하는 사과라고 하면 뻔하지. 사과 받은 사람도 기분이 애매하고, 사과 한 사람도 기분이 애매한 어중간한 사과. 다른 말로는 하느니만 못한 사과."

나 그거 알아.

"대기업에서 홈페이지에 게재하는 사과문 같은 거?"

서지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었어..."

결국 그런 식의 사과를 했다는 건 부정하지 못하는구만.

"사과는 하는 사람 마음이 편하라고 하는게 아니라 듣는 사람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는 거지."

그렇지. 나는 이시은이 건네주었던 서류를 내려놓고 말했다.

"표시해 놓은 다섯 명의 신상정보를 좀 보고 싶은데."

이시은이 내 말에 대답했다.

"새벽까지 기다려."

"그러는 편이 좋겠네."

이시은이 갑자기 파악해 놓은 생존자들의 신상명세를 뒤져서 몇 개를 추려내더니 우리가 머무르는 방으로 향하는 그림은 의심을 받기에 딱 좋다. 밤까지 기다렸다가 하는 편이 좋을거다.

"저기."

이시은이 막 문을 나서려고 하는 우리를 불러세웠다.

"왜."

내 말에 이시은이 잠깐 우물쭈물하다가 시선을 약간 옆으로 돌리고 말했다.

"오빠, 그냥 내가 찾아가면 아마 열어주지 않을거라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알겠다.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지금 찾아 갈 생각이었다. 갔다 와서 여기로 돌아와 말해줄테니, 화해는 오누이가 알아서 잘 해봐."

안 하기로 했다면 몰라도 하기로 했으면 신속하고 빠르게 해결해야 하잖아.

"고마워."

이시은의 말에 나와 서지현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이시은과는 이야기가 끝났으니, 다음은 이경석을 찾아 가 볼 차례다.

"뭐야, 술 먹고 있었냐."

녀석의 방 테이블 위에는 빈 캔 두 개가 놓여있었다. 내 말에 녀석은 슬쩍 테이블 위를 보고는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냥, 조금 답답한 일이 있어서 마셨습니다. 아, 원래 제 몫으로 떨어져 있던건데. 좀 처럼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거든요."

이경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쪽 구석에 놓여있는 맥주 박스를 가리켰다. 이경석은 캔을 치우면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야기 들었습니다. 일왕저수지에서 물을 퍼오시는데 성공했다고요. 덕분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시은이가 걱정이 많았을텐데. 한시름 놓았겠네요."

그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꼭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던데요."

서지현의 말에 이경석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렇습니까."

"우리 손에 들어가 있던 자료에 관해서, 오빠에게 심한 말을 했다고 후회하고 있던데."

이경석이 내 말에 잠깐 멍하니 책상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심한 말이라. 그렇지는 않아요."

이경석의 말에 나는 슬쩍 맥주 박스를 보고는 말했다.

"더 마실 수 있으면, 나랑 한 캔 하지."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두 분이 해주신 일이라면 맥주 한 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서지현 양도 한 캔 하시겠습니까?"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 세 캔이 앞에 놓이고, 서지현이 살짝 손을 움직이자 맥주에 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차갑게 식었다.

"... 이건."

서지현이 이경석의 말에 검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말했다.

"상점에서 구매한 스킬이죠."

"그런가요."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맥주캔이 열리고 잔에 맥주가 따라진다. 벌컥 벌컥 맥주를 마신 이경석이 입가를 닦고 나서 한숨을 팍 쉬었다.

"시은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남의 가족에 대한 평가는 함부로 하지 않는게 좋다고 하던데."

내 말에 그가 희미하게 웃고는 대답했다.

"자랑스러운 여동생이에요. 머리도 좋고, 결단력도 있고, 냉정 할 때는 냉정하죠. 보고 있으면 눈이 부실 지경입니다."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다음에 말했다.

"사람들은 너를 좋아하지 않아?"

내 말에 이경석이 대답했다.

"맞아요, 어물거리는 성격도 그렇고 잘 웃고,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어주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 안전지대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시은이지, 제가 아니에요. 저 같은 건 없어도 괜찮을겁니다. 하지만, 시은이가 없으면 이 안전지대는 유지도 못할 걸요."

말을 마친 이경석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요. 곁에 있으면 위축되고, 오빠라는 녀석이 사람 구실도 제대로 못하는 것 같아서 부끄럽고... 이야기를 나누면 항상 느끼니까. 나는 먼저 태어났을 뿐이지 시은이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는 초라한 녀석이구나."

이경석은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도 잘 하고 싶어요. 잘 하고 싶은 걸 넘어서...!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내 여동생에게, 오빠가 그렇게 무능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싶습니다, 시은이가 저를 짐으로 생각하는 건 싫어요. 오누이잖아요. 서로가 서로에게 짐이 되면 안되는 거잖아요. 근데 저는... 요즘 계속 실수만 하고."

이경석이 혼잣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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