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
물배달
이시은이 대답했다.
"댁들 알 바는 아니잖아."
그래, 우린 외부인이니까. 그 와중에 이경석이 우리를 보고 말했다.
"넘겨주기로 한 정보는 검토를 마치고 내 방에 보관 중이야. 물통이 들어있는 가방을 받고, 서류는 돌아가는 길에 받아가."
어제 말했던 그 정보들인 모양이다.
"알았어, 그 서류 가방 줘."
내 말에 이시은이 휙 하고 서류 가방을 우리 쪽으로 던져주었다.
"이미 안에 빈 물통이 가득 차 있어."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언제?"
이경석의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어제, 자료 정리 시키면서 함께 지시했지."
저런, 형 만한 동생은 없다고 하더니만 오빠보다 나은 여동생은 있는 모양이네. 하지만 당사자가 앞에 있으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이경석 자신도 그걸 느끼고 있는 모양인지, 약간 편하지는 않은 표정이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저 친구는 계속해서 쿠사리를 먹고 있다. 아마 우리가 오기 전에도 쭉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었겠지.
"그럼,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도록."
내 말에 이시은이 가보라는 듯이 휙휙 손짓을 했다. 이경석도 잠깐 이시은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을 나와 이경석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머무르던 녀석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우리에게 정리된 서류뭉치를 건네주었다.
좋아, 받을 걸 받았으니 이제 일을 하러 갈 시간이군.
"뭐, 따로 챙길게 있을까요?"
"딱히 없지 않을까. 이미 배낭 안에 다 챙겨두었잖아."
고로, 바로 출발하면 된다. 우리는 쇼핑몰을 나가기 위해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내려가기 시작했다.
"이경석이네."
내려가면서 보니, 한쪽 구석에서 이경석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경석의 표정이 썩 밝지는 않아 보인다. 이경석이 우리를 확인하고는 다가온다.
"출발하는 건가?'
"하기로 한 건 빨리 끝내야지."
대화를 마치고 쇼핑몰 밖으로 나오자 곧바로 느껴지는 이 말도 안되는 따스함.
"참나."
환장하겠네. 그래도 밤에서 낮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온도가 올라가는 간격은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냥 대뜸 아침에 해 떴다고 이렇게 더워지는게 어디있어.
"이동하기 전에, 온도부터 조절하죠."
서지현이 곧바로 주변의 온도를 조절하기 시작하고, 돌아다닐만한 온도로 우리 주변의 기온이 떨어졌다. 온도를 맞추고 난 다음, 나와 서지현은 모래에 뒤덮힌 도시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좋은 환경은 확실히 아니네."
지나가던 와중에 소형차 정도 크기 되는 전갈 몇 마리가 우리에게 시비를 털었다. 꼬리에는 독침 대신에 코브라가 달려 있는 녀석들이었다. 우리를 지들 밥으로 알고 기세 등등하게 덤볐던 녀석들은, 반질거리던 갑각이 작살나고, 꼬리 대신 달려있던 코브라가 숯검댕이가 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거 봐요."
죽은 시체는 순식간에 몸 안의 수분을 잃어버리고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 버린다. 그래, 미라처럼. 물기라는 물기는 기다렸다는듯이 죄다 빨려나가버린다. 실시간으로 눈동자의 먹물이 쫙 빨려나가 쪼그라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어딘지 소름이 조금 끼칠 지경이다.
"기가 막히네. 이건 또 뭐야."
근처에 모래로 뒤덮여 있는 정육점 안으로 들어가자, 생고기 그대로 수분이 쫙 빨려서 말라 비틀어진 고깃조각들이 보인다.
"먹을 수는 있을까."
"글쎄요. 생으로 말라버린 고기를 보는 건 처음이라서."
말 그대로 급속 건조가 따로 없잖아. 나는 그 말라 비틀어진 조각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일왕 저수지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햇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바로 수확자를 허공에 휘두른 다음, 그걸 손으로 붙잡고 올라가기를 반복했다. 꽤나 높게 올라간 나는 수확자가 만들어낸 장밋빛 궤적 위에 몸을 올리고 주변을 훌터보았다.
"아하."
저기있네. 수원의 물을 죄다 먹어치웠다고 하길래 좀 커졌을 줄 알았더니, 저수지 자체의 크기는 그렇게 커지지 않은 모양이다. 대신, 물가 주변에 이런 저런 식물들이 자라나 있는게 보인다.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리던 나는 이내 기겁했다.
"이야, 저게 여기에서도 보이네."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거대한 산 같은 거북이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걸 보고 기겁했다. 거리는 여기에서 꽤 멀어 보인다. 한 5-7km 정도 떨어져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거리에서도 육중한 몸집이 확실히 눈에 잡힌다. 당연히, 녀석이 이리저리 움직며 만들어진 지진으로 인해 무너지고 박살난 건물들의 잔해가 주변에 한 가득이다.
장밋빛의 궤적이 서서히 희미해지기 시작하고, 덩달아 거기에 의존해 주변을 바라보던 나는 다시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착지했다.
"일왕 저수지의 모습은 어때요? 감상이 궁금한데."
"글쎄, 굳이 따지자면 오아시스."
삭막하기 짝이 없는 모래에 뒤덮힌 세상에 혼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저수지. 그리고 그 주변에 자라난 식물들. 오아시스라는 단어 말고 무슨 단어를 떠올릴 수 있을까.
"그리고, 여기에서 좀 떨어진 곳에 그 거북이가 자리잡고 있어."
내 말에 서지현이 지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왕 저수지에서 화성 장안문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으니까요. 기껏해야 2km 정도?"
그렇구만. 그럼 지금 녀석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딱 집어서 장안문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같다. 대충 그 근처라고 해야겠지.
"어차피 저 녀석이 먼저야."
랜드 클리어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수원에 온 목적은 파백과 짝을 이루는 절혼이라는 돌이다. 그리고 그 돌은 저 거북이의 마빡에 떡하니 박혀있지. 저 녀석을 잡고 나서 랜드 클리어를 해야 한다.
"그럼 내일 가야 할 곳은 정해졌네요."
"그런 셈이지."
일왕 저수지에 도착한 서지현이 주변의 나무를 살펴보다가 말했다.
"이건... 야자수 같은데요."
정확한 지식은 없어서 뭐라고 딱 집어서 말하기는 힘들다. 그냥, 야자수 잎이 달려있는 나무니까 야자수라고 하는 거다. 야자수에는 뭔가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서지현이 그걸 가만히 바라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추야자 잖아."
"뭐야 그게, 대추 같은 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조금 다른 거에요. 한 번 먹어본 적이 있는데, 무지하게 달더라고요."
서지현은 대답을 돌려주고 나서 조심스럽게 야자수 쪽으로 접근해 열매를 몇 개 따냈다.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열매는 기다렸다는 듯이 수분이 빨려나가 그대로 말라 비틀어져 크기가 확 쪼그라든다.
"으으."
쬐끄만 열매의 한 귀퉁이를 살짝 뜯어먹은 서지현이 몸을 살짝 떨었다.
"왜 그래?"
내 말에 서지현이 내 쪽으로 대추야자를 건네주며 말했다.
"제가 먹어본 것들 보다 훨씬 달아서. 일단 독은 없는 것 같네요. 한 번 먹어볼래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마른 대추야자를 한 입 먹었다. 곧바로 내 입에서도 으으, 하는 소리가 나왔다. 뭐야 이거, 과일 맞아?
"곶감에 시럽 뿌려놓은 느낌인데."
단 거 좋아하는 사람들은 환장 할 것 같다. 온 목적이 이건 아니었으니까. 나와 서지현은 물가로 다가갔다. 저수지에는 물이 한 가득 모여 있었다. 물을 바라보던 나는 밧줄을 꺼내서 끝에 돌덩어리를 묶은 다음 호수 안으로 던져보았다. 주르르르, 밧줄이 물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뭐가 이렇게 깊어."
밧줄이 전부 다 호수 안으로 들어갔지만, 바닥에 닿는 느낌은 전혀 없다.
"빨아들인 물로 호수가 커지는 대신, 깊어진 모양이네요."
그러게. 수원의 물이란 물을 죄다 빨아들인 일왕 저수지가 아래로 얼마나 깊을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대충 궁금증을 해결한 우리는 곧바로 서류 가방을 꺼내서 안에 들어있던 물통을 전부 꺼내놓고, 물을 채우기 시작했다.
"물가에서 바로 작업을 해야 하는게 조금 그렇네요."
물을 퍼낸 다음 곧바로 서류 가방 안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호수에서 물통을 들어올리자마자 곧바로 다시 물이 빨려나가 호수로 돌아가기 시작하니까. 당연히, 미리 물통을 전부 꺼내서 채워놓은 다음 한 번에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나씩, 물통을 꺼내서 채우고 재빨리 서류가방 안에 넣기를 몇 번이나 했을까.
"... 그래, 얌전히 물 받아서 가게 해줄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니들은 뭔데, 오아시스의 정령 같은 거냐. 시퍼런 피부를 한 녀석들이 뭉글거리는 안개에 휘감긴 채로 모습을 드러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알라딘에 나오는 지니가 분노조절 장애에 걸리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니면 스테로이드를 과다 투여한 스머프. 어찌 되었건 구름에 휘감긴 채로 울룩불룩한 근육을 펄떡거리며 눈에서 싯누런 안광을 발하는 모습은 꽤나 살벌했다.
"저는 물 계속 퍼내면서 지원만 할게요."
그러는 편이 좋겠다. 결국 우리 중 하나는 계속 물을 퍼내야 하니까. 나는 서지현이 물을 퍼내는 동안 이 녀석들이랑 싸우면서 버티거나, 싸워보고 할 만하다 싶으면 싹 쓸어내면 될 일이다. 녀석들이 중 몇 녀석이 커다란 곡도를 집어든 채로 나에게로 날아온다.
빠르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녀석들 중 하나에게 검을 휘둘렀다.
"... 뭐야."
수확자가 훅 하고 녀석의 몸을 후려쳤지만, 칼을 타고 전해지는 감촉이 없다. 시간이 느려지고, 나에게로 날아오는 검이 보인다. 이건 막을 수 있는거지? 못 막을 경우를 대비해 피할 준비를 하면서, 검을 들어올렸다.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휘두른 무기가 검에 막혔다.
"무기는 막을 수 있는데."
다시 재빠르게 수확자를 휘두르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눈 앞에 떠 있는 시퍼런 녀석을 그대로 통과해버린다. 녀석은 공격을 무시하고 내 머리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타이밍에 맞춰 머리를 살짝 뒤로 빼자 코 앞의 공간을 칼날이 스치고 지나간다.
"뭐 이렇게 이기적인 새끼들이 다 있어?!"
나는 맞고, 너는 안맞고? 물리적인 제제 수단은 먹히지 않는 모양인데.
"그럼 이건 어떨까."
곧바로 손동작을 취한 나는 녀석들을 향해서 손을 휘둘렀다. 바닥을 타고 퍼져나가는 창백한 스파크가 녀석들의 몸을 타고 날뛰기 시작한다. 파파팍, 하는 스파크와 함께 녀석들이 잠깐 움찔한다. 마법은 그래도 어느정도 통하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녀석들의 몸 주변에 일어나던 구름들이 확 짙어진다.
"저 뭉게 구름은 또 뭐야?"
다시 한 번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쇼크를 뿌려보니 확실하게 알 것 같다. 쫙 퍼진 스파크는 구름으로 다가가자 잠깐 파지직, 하는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마력 저항 같은 건가.
이거 상황 참 잘 돌아간다. 녀석들이 다시금 나와 서지현을 노리고 공격을 하기 시작한다.
녀석들의 공격을 피하면서 서지현을 보호하던 나는 뭔가를 꺠닫고 얼굴을 팍 구겼다. 녀석들을 감싸고 있는 구름은 검이나 주먹 따위를 휘둘러 흩어버릴 수 있다. 검이 구름에 닿으면, 칼로 찹쌀떡을 썰어내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구름이 한 뭉터기 떨어져 나가 흩어진다.
물론, 휘두른 검이나 주먹 같은 건 구름만 흩어놓을 뿐이지 녀석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못한다. 피해를 주고 싶다면 검을 휘둘러 녀석들을 감싸고 있는 구름을 뜯어내고, 마력으로 공격해야 한다.
물리 공격은 무효, 마력을 이용한 공격은 한정적으로 무효.
"쌩양아치 같은 새끼들이잖아."
강하다기보다는, 무지하게 성가신 것들이다. 조건을 충족해야 때릴 수 있다니. 서지현이 새로 길어올린 물을 재빨리 서류 가방 안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구름만 흩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해볼테니."
마력을 사용해서 피해를 주는 건 서지현이 나보다 더 우위에 있고, 큰 피해를 줄 수 있을거다. 몸을 움직여야 마력을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물을 길으면서 내가 구름을 흩어놓은 녀석들만 요격할 생각인 모양이다.
"노력은 해보지."
그렇다고 해도 구름을 흩어놓을 틈이 쉽게 나지는 않는다. 서지현에게로 향하는 공격도 내가 다 받아주어야 하니까.
지금 이 순간 굉장히 아쉬운 장비가 있다면, 바람개비다. 그거 하나 있었으면 이렇게 개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을텐데. 바람개비로 녀석들을 감싸는 구름을 싹 다 쓸어내버리고 서지현이 마법으로 쓸어버렸으면 되는 거잖아.
없는 장비가 더 아쉬운 법이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라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