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물배달
몇 시간 뒤, 나와 서지현은 함께 이시은을 찾아갔다. 혼자 가도 상관없다고 서지현이 말했지만, 나라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따라와 본거다.
"몸은?"
남아있는 수액을 확인하며 던진 서지현의 물음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많이 나아진 것 같아."
"그렇겠지."
옛날 어르신들이 수액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겼던 이유가 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핏줄에 바늘 박아넣고 구멍을 통해서 액체를 흘려넣는 것 뿐이지만 그게 맛탱이가 간 사람의 몸에는 꽤나 큰 도움이 되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탈수였잖아, 탈수에는 수액이 직빵이지. 서지현은 남은 수액이 거의 없어진 걸 확인하고 말했다.
"뽑는다."
수액을 다 맞은 이시은이 잠깐 머리를 흔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옆에 앉아있던 이경석이 그런 이시은을 보고 말햇다.
"시은아, 조금 더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이경석의 말을 들은 이시은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내가 하는 일은 누가 할까?"
이경석이 도움을 요청하는 것처럼 서지현을 바라봤다. 전문가의 의견으로 저 제멋대로인 여자를 찍어눌러 달라는 뜻이겠지.
"멋대로 해. 내 입장에서는 다음에도 수액 놔주고 뭐라도 받는게 이득이니까."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잠깐 그녀를 째려보다가 말했다.
"그럴 일 없어."
서지현은 다 쓴 수액과 도구를 정리하며 한 마디 던졌다.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으으으! 하는 소리를 낸 이시은이 잠깐 서지현을 보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안 그래도 물이 귀한 동네인데, 수액은 말할 것도 없겠지. 쇼핑몰에서 수액을 파는 경우는 없잖아. 여기에서 수액을 구할 수 없다면 물이 싹 말라버린 바깥에서도 구할 수 없다.
구하기 어려운 물건을 제공해서 목숨줄을 살려놓은 사람의 말투를 트집잡아 화를 낼 수는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아 그리고 오늘 밤 중으로, 잊지 마라."
내가 여기에 온 것은 사실, 이경석에게 볼일이 있어서다. 내 말에 이경석이 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맞다. 까먹고 있었네요."
하긴, 자기 여동생이 탈수가 와서 쓰러졌으니 정신이 없을만도 하지. 당사자는 꽤 너그럽게 넘어가 주려고 하는데, 누워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시은이 울컥한 표정으로 한 마디 했다.
"또? 이 화상이. 하다못해 다른 사람한테 지시라도 내려놓았어야 할 거 아니야. 덜렁 와서 옆에 있겠다고 할 떄부터 알아봤어!"
이시은이 부리는 성질에 이경석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잠깐 자기 오빠 되는 사람을 노려보던 이시은이 손으로 이마를 짚고 중얼거렸다.
"장담하는데, 탈수가 안 왔어도 스트레스로 쓰러졌을거야."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이시은이 그 말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말했다.
"오빠 어제 밤에 나가서 일했잖아. 오늘 잠은 잤어?"
이경석이 그 말에 다시 침묵한다. 어우! 하는 소리를 내고 이시은이 자리에서 팍 하고 일어나 문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 하나를 붙들고 뭐라고 말을 한다. 대화를 마친 이시은이 가보라는 눈짓을 하고, 그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이시은이 다시 돌아와서 침대에 풀썩 드러누우며 말했다.
"다른 사람 시켜놨어. 오늘은 그냥 때려 자고, 내일 새벽 중으로 일어나서 사람들이 정리해놓은 자료 검토해서 저 사람들에게 넘겨줘."
말은 마친 이시은이 다시 이불을 덮었다.
"이제 다 나가. 피곤해."
이시은의 말에 나와 서지현은 곧바로 고개를 까딱 하고는 문을 나섰다.
"내일 중으로 받을 수는 있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내가 언급하지 않았다면 내일 못 받았을 수도 있었겠는 걸. 오빠가 여동생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
그로 인해서 깜박했다고 해도 뭐라고 막 화를 낼 할 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좀 황당할 뿐이지.
"정작 그 여동생은 오빠의 걱정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지만요."
걱정으로 해결되는 일은 없는 법이니까. 물론 아플 때 누가 옆에 있는 건 큰 위안이 되는 법이지만, 해야 하는 일도 까먹고 옆에 있는 건 좀 그렇지.
"그래도 아플 때 가족이 옆에 있어주는 걸 진심으로 싫어하는 사람은 없어."
내 말에 서지현이 애매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괜찮아, 한 방에 이해시켜줄게.
"아플 떄 내가 옆에서 간호해주면 불쾌해?"
그제서야 서지현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잠깐 얼굴을 붉히고 있다 대답했다.
"그럴리가요. 일부러 아파보고 싶을 정도인걸요."
쓸데없는 소리. 나와 서지현은 대충 물티슈 같은 걸로 몸을 닦아낸 다음에 잠자리에 들었다.
잠든지 얼마나 지났을까. 밖이 소란스럽다.
"뭐 하는 새끼들이야!"
눈을 떠보니 새벽이다. 이시은의 목소리 같은데. 외침이 얼마나 카랑카랑한지 잠이 다 깰 지경이네. 야참으로 오토바이 머플러를 구워 먹었나. 자다가 깬 사람은 나만 있는게 아니었다. 서지현도 눈을 떴다.
"무슨 소란일까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어깨를 으쓲했다. 우리는 잠에서 꺤 채로 잠깐 밖에 귀를 기울이고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분위기가 점점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이불깃으로 몸을 가리고 있던 서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속옷과 옷을 챙겨 입는다. 나도 마찬가지로 다시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와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니, 사람들 대부분이 잠에서 꺠 있었다.
사람 몇 명이 붙잡힌 채로 이시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이시은은 그들에게 꽤 강렬하게 화를 내는 중이었다.
"하지만, 배급이 부족하단 말이다."
한 녀석의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지금 여기, 이 장소에 물이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어?!"
"이야,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탈수였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는데."
피곤하지도 않은건가.
"배급으로는 한참 부족하다는 건 당신도 알잖아요!"
다른 녀석의 말에 이시은이 팔을 꼰 채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그래서, 주는 물로는 부족하니까 훔치려 들었다? 기가 막혀서 정말."
이시은은 말을 마치고 나서 벽에 기댄채로 잠깐 있다가 말했다.
"너희들 나름대로 사정이야 있겠지. 단순히 목이 말라서가 아닐지도 모르고."
이시은의 말에 묶여있는 사람들의 눈에 잠깐 희망이 자리잡았다. 하지만 그 다음에 이시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들의 기대를 정면으로 배반했다.
"사람이 300명이면 핑계는 400개가 나오는 법이야. 일일히 다 들어주고 배려해 주려고 하면 똥 싸고 밑 닦을 때도 물로 닦으려 들겠지. 너희는 아끼고 아껴도 부족한 물은 훔치려 들었어. 범죄자 였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범죄자는 우리의 안전지대에 필요없어."
잠깐 말을 마치고 마른 기침을 한 번 한 이시은이 손짓을 했다.
"너희는 추방이야. 다시는 돌아올 생각 하지마."
다른 말로는 죽으라는 소리다. 그 말에 묶여 있던 녀석 중 하나가 울컥 한 표정으로 이시은을 보며 외쳤다.
"이런, 새파랗게 어린 년이!"
죽을 떄가 되면 막말이 나오는 건 본능에 가까운 행동이라지.
"뭐라는거야. 도둑놈이."
냉막한 표정을 지은 채 이시은이 녀석을 바라봤다.
"아껴 쓴다고? 어차피 네 년은 필요한 만큼 멋대로 물을 쓰고 있겠지. 젠장맞을, 세상이 망하고 나서도 갑질 하려는 새끼들은 꼭 생겨난다니까."
이야, 그런 사람이 탈수가 와서 다 죽어가고 있었다고 생각하기는 힘든데.
"애초에, 우리가 왜 일일히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네가 뭐라고 우리 위에 올라앉아서 멋대로 고나리질이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시은이 입을 열었다.
"아, 그래. 추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네. 그 의견은 잘 들었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이시은은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에 심호흡을 잠깐하고 옆의 녀석에게 뭔가를 속삭였다. 그 사이에도 녀석들은 이시은에게 막말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야기를 듣는 이시은 본인은 별 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내기할까?"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지금 묶인 사람들이 다 죽는다는데 오백원 걸래요."
저런, 내가 거기에 돈을 걸고 싶었는데. 녀석들이 이시은을 향해서 쏟아내던 막말은, 자연스럽게 이시은이 활을 집어들면서 멎게 되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묶인 녀석 중 하나가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곧바로 녀석의 마빡에 화살이 박혀들었다. 묶여 있는 녀석들의 시선이 마빡에 화살을 맞고 죽은 녀석 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뚝 하고 멈췄다. 활시위에 화살을 먹이며, 이시은이 입을 열었다.
"더 말하지 않는거야? 계속해보지."
다시 한 번 화살이 공중을 가르고 날아가 묶인 녀석의 머리를 꿰뚫었다. 하나씩, 머리에 화살이 박힌채 시체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이곳에 머무르는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떠나. 안 막아. 어차피 물도 부족한데 스스로 떠나서 입을 줄여주겠다고 한다면 내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지."
마지막 남은 한 명, 이시은이 그 여자를 바라보다가 머리에 화살을 박아넣었다.
"죽거나, 안전지대를 떠나거나. 선택지는 언제나 두 가지야. 너희들이 두 가지 중 어떤 걸 선택해도 나는 상관없어."
말을 마친 이시은이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말했다.
"시체, 치워."
지시를 마친 이시은이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나와 서지현은 잠깐 죽은 시체들을 바라봤다.
"어떻게 생각해요?"
"어떻게 생각하긴."
자기 입으로 독재자라고 불려도 상관없다고 말했던 여자다. 독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항하지 못하도록 하는거다. 그런 의미에서 이시은의 조치는 꽤 적절했다고 볼 수 있다.
"자유보다 통제라."
현대 교육을 받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라는 개념은 굉장히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장 쓸 물도 부족해서 오늘내일 하는 위태로운 조직에서도 정말로 자유라고 하는 개념이 그렇게 큰 가치를 가지고 있는걸까.
나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내가 그런 걸 생각할 이유도 없긴하지. 그냥, 순수하게 감상평을 내려보자면...
"이시은 입장에서는 해야 하는 일을 했을 뿐이야."
단어가 적절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직 안의 반동 분자들은 제거해야 하는 법이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눈치를 보다가 흩어지기 시작한다. 지시를 받은 사람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를 치우기 시작한다. 잠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와 서지현은 잠에서 깬 김에 이경석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자료를 받기로 했으니까.
"이시은, 아무리 그래도 방금 전에 그건...!"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경석과 이시은이 창 밖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런, 별로 좋은 타이밍에 찾아온 건 아닌 모양이네. 이시은이 얼굴을 구긴채로 이경석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두 사람은 우리가 들어온 것도 모른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오빠는 그게 문제야. 착한 걸 너머서 그 정도면 맹한거라고."
이시은이 차가운 목소리로 이경석의 말을 자르고 들어갔다. 이시은의 대꾸를 들은 이경석이 잠깐 멈칫한 다음에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이경석의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아니, 죽일 필요가 있었어. 이 주제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
"너!"
이시은이 이경석의 말에 확 하고 짜증을 냈다.
"시끄러! 애초에 더러운 일, 욕 먹을 만한 일은 전부 내가 하고 있잖아. 오빠는 그걸로 부족해!? 내가 뭘 더 어디까지 해야 하는건데?!"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머뭇거리다 몸을 한 번 떨었다.
"나는, 나도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이시은이 그 대답을 중간에 잘라버렸다.
"최선을 다하지 말고, 잘 해야지."
이시은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자기 오빠를 바라봤다.
"잘 할 자신이 없으면 최소한, 나에게 뭐라고 따지고 들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시은아, 오늘 네 손에 죽은 사람이 다섯 명이야. 사람의 목숨은..."
"사람의 목숨은 저울질 할 수 없다고? 웃기는 소리 하지마. 할 수 없는게 아니라 하기 힘든 거야. 손에 피가 묻는 일은 누구든지 꺼리니까."
이시은의 말에 이경석이 후우, 하고 숨을 내쉰다음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말을 마친 이시은이 잠깐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가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물을 훔치다가 붙잡히고, 거기에 더해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가 이 안전지대를 관리하는 행위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했어. 그걸 그냥 넘어가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게 아니잖아."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제서야 두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토론 잘 들었어."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시은이 얼굴을 구겼다.
"손은 배고파서 베어먹고 의수로 갈아 끼웠나보지, 들어오기 전에 노크도 못해?"
나는 양 손을 살짝 들어올려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의수는 개뿔, 다 내 손이다. 그나저나 그 다섯 명을 죽인 이유라면.
"굳이 그렇게 거창한 이유를 끌어다 붙일 필요는 없잖아."
밑이 빠져라 개고생하면서 물도 제대로 못 먹어서 탈수에 시달리고 있는데 그렇게 아끼고 아낀 물을 훔쳐가려고 들던 새끼가 눈 앞에서 '이 새파랗게 어린 년아, 너는 물 많이 마시지?' 같은 소리 떠들고 있으면...
말보다 칼이 먼저 날아가는 상황이 이해하지 못할 만큼 잔학무도한 일은 또 아닌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