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모래의 도시
추가 휴식 뒤에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서지현과 함께 이시은의 오빠라는 사람을 찾아갔다.
"이경석입니다. 안전 지대의 물자 보급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에 대해서는 시은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머리를 스포츠로 시원하게 밀어버린 남자가 마른 수건으로 창을 닦고 있었다. 다소 날카로워보이던 이시은과는 다르게 생김새가 꽤나 서글서글하다. 그래도 몸에 붙어있는 근육을 보면 요 근래 꽤나 몸을 쓸 일이 많았던 모양이다.
"랜드 클리어에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그래, 관련된 정보가 있으면 좀 공유받고 싶은데."
이경석이 잠깐 우리를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안전지대는 사정이 좋지 못해요. 랜드 클리어보다는 식수 확보가 더 중요합니다. 당장 일주일 뒤에는 마실 물도 부족할 지경이니."
이경석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랜드 클리어는 당연히, 우리가 추구하는 최종 목표에 해당됩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진행할 여유는 없으니. 두 사람도 마음에 여유를 가지고 목전에 두고 있는 현안의 처리에 집중해셨으면 좋겠습니다. 서지현 씨는 간호사였다고 하셨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쯔쯔즈, 하는 소리와 함께 혀를 찼다.
"미안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에요."
서지현의 반응에 이경석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하시는 말씀은."
나는 옆에서 보충 설명을 들어갔다.
"댁들의 사정이 궁핍한 건 알겠지만, 우리는 랜드 클리어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이지. 덤으로 우리가 수원으로 향한 목표도 달성하고."
절혼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해줄 생각은 없다. 그냥 목적을 가지고 수원으로 향한 거다 정도만 언급해주면 충분하지. 이경석이 허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미안하지만, 허락해주기 곤란한 이야기 같습니다."
허락이라. 나는 녀석의 말에 픽 웃었다.
"우리도 댁에게서 허락 받자고 이런 말을 꺼낸게 아니야."
니들이 뭐라고 하건 우리는 랜드 클리어에 집중할거다. 그러기 위해서 온 거다. 여기에서 몇 주고 시간을 보내면서 안전 지대가 정상화 되는 걸 기다릴 생각은 없어.
"안전지대는 나와 시은이의 통제에 따라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각자 지정된 역할을 최선을 다해서 수행하고 있지요."
다소 당황한 것 같은 이경석의 말에 서지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예외를 하나 만들면 되겠네요."
이경석이 고개를 저은 다음,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저기...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 참, 나는 녀석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웃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찬찬히 이야기를 나눠보자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가 으르렁거리지 않고 무사히 갈등을 해결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성실하게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과 시비를 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왔..."
문을 열고 들어오던 이시은이 나와 서지현을 보고는 하던 말을 멈췄다.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졌던 모양이네."
"이야기가 길어졌다기보다는, 댁 오빠를 찾아가는 시간이 예상과는 다르게 약간 늦어졌어."
내 말에 이시은이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얼굴을 제대로 확인해보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표정에 피로가 가득하고, 혈색도 별로 좋지 않아보인다.
"말하는 투로 봐서는 당장이라도 찾아 갈 것처럼 굴더니만."
이시은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오빠를 바라봤다.
"어디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이경석이 우리와 나눈 대화를 이시은에게 들려주었고, 이시은의 표정은 확 구겨졌다.
"무슨 말도 안되는 개소리를 하는거야."
이야, 성질머리 하고는. 이시은이 앉은 자세 그대로 우리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충분히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해줬다고 생각했는데, 그걸로는 알아먹지를 못했던 모양이네."
서지현이 엉덩이를 책상에 걸친채 다리를 꼬았다.
"아니, 이해는 충분히 했어."
"이해를 했는데도 그런 식으로 삐딱선을 타려 드는 의도가 뭘까. 못 알아먹은 거면 머리의 문제이지만, 알아먹고도 그러는 건 인성의 문제인데."
서지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채로 대답했다.
"스물 넘어서 인성 좋다는 소리를 들어본 기억은 없지."
이시은이 푸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와 서지현은 번갈아 바라봤다.
"되지도 않을 고집은 부릴 생각도 하지마. 좋든 싫든 상황을 쥐고 있는 건 우리야. 랜드 클리어를 위해서는 충분한 사람을 동원 할 수 있어야 하고, 인력을 동원할 권한이 있는 건 우리야. 우리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안전지대의 사람들은 움직이지 않아."
아하. 인력이라.
"그 부분에서 우리 사이에 작은 오해가 발생한 모양이군."
나는 그렇게 말하고 책상을 탁 하고 쳤다.
"나와 지현이는 이미 세 번의 랜드 클리어를 끝냈지. 단 둘이서. 당연히 이번에도 그렇게 진행할 생각이고."
어중이 떠중이들이 한 가득 딸려와봤자 옆에서 죽어나가면 신경만 사납고, 크게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다. 앞으로 또 랜드 클리어를 할 일이 생기면 일단 이 점 부터 확실하게 언급을 해둬야겠어. 내 말에 이시은과 이경석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었잖아."
이시은의 말에 서지현이 옆에서 대답을 돌려주었다.
"물어보기는 했었나?"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응시한다.
"당연히 안 물어보지. 단 둘이 랜드 클리어라니, 상식적으로 물어 볼 만한 질문이 아니니까."
나는 책상을 노크해서 똑똑, 하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인력을 동원하는 부담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그럴 필요 없어. 어차피 랜드 클리어는 우리 둘이 진행할 예정이니, 안전지대의 생존자들은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이시은이 내 말에 코웃음을 쳤다.
"거참 신뢰가 가지 않는 발언이네. 두 명이라. 어차피 오늘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니 랜드 클리어를 하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도 우리가 잃을 건 달리 없지."
건조하고 냉정한 감평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 김용천이 유달리 유난을 떨었을 뿐이다.
"밑져야 본전이잖아. 혹시나 우리 둘이 가서 랜드 클리어를 성공한다면 너희들은 앉아서 떡고물을 주워먹는 격이고, 실패한다고 해도 딱히 잃을 건 없지. 잃거나 따거나 둘 중 하나인 도박이 아니야. 따거나 못 따거나 둘 중 하나인 도박이지."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다. 내 이야기를 듣던 이시은이 입을 열었다.
"두 사람, 잠깐 나가있어. 오빠와 이야기를 나눠봐야 하니."
작전타임인가. 내가 서지현을 바라보자, 책상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서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둘은 함께 문 밖으로 나가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해 봐도 괜찮겠죠?"
"아마도."
한 30분 정도 지나고 나서, 문이 열리고 이경석이 우리를 불렀다.
"어떻게, 회의는 잘 끝내셨나?"
내 말에 이시은이 입을 열었다.
"몇 가지 확인해야 할 점이 있어. 두 사람의 목적은 서울행이라고 했으니까. 어차피 여기에 계속 머무를 생각은 없는거지?"
"맞아. 랜드 클리어를 끝내고 해야 하는 일을 마치고 나면 수원을 떠날거다."
옆에서 이경석이 그 이야기를 듣고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좋아, 그럼 두 사람은 외부인으로 쳐줄 생각이야."
외부인이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단어는 부가적인 설명을 통해서 의미를 가진다고 하던데."
내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우리가 아닌 남이라는거지. 잠깐 지나가면서 방 빌려 쓰는 나그네 같은 취급. 당신들이 우리의 지시를 따를 이유는 없어. 당신들 하고 싶은 일을 해."
이야, 듣기 참 좋은 이야기이기는 한데.
"아무 조건도 없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서지현의 말에 이경석이 대답했다.
"우리를 위해서 해주는 일이 없으니, 당연히 우리도 당신들에게 물자를 제공해주기는 힘듭니다."
주는게 없고, 받는게 없을 예정이라는 건가. 나쁘지 않은 조건이다. 어차피 배낭 안에는 당분간 먹을 수 있는 물과 식량이 있고, 매일 상점을 이용해서 포인트로 필요한 물을 확보 할 수도 있으니까. 서지현이 이야기를 듣다가 대답했다.
"랜드 클리어는 당신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닌가요?"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독감 예방 주사도 마찬가지지. 내가 독감에 걸리기 싫어서 맞은 주사 덕분에 이웃 사람들도 독감에 걸릴 가능성이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웃 사람들이 나에게 주사 비용을 제공해주지는 않잖아."
우리에게도 득이 되고 자기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니, 랜드 클리어에 대해서는 대가를 제공하지는 않겠다는 건가.
"좋아, 딱히 상관없어. 그럼 우리에게 제공된 식량과 물도 다시 가져가는 건가?"
내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위험에 빠진 나를 구해줬어. 내가 죽었다면 그만큼 안전지대에 보충되는 물의 양도 줄었을테니까. 오늘 제공된 물자와 침구, 앞으로 머무를 공간은 그 점에 대한 대가로 해둘게."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이야기다.
'좋아, 서로간의 오해가 풀리지 마침내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하는군. 그럼 이제 랜드 마크에 대한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은데."
이시은이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에 우리가 합의한 건 랜드 마크의 정보 제공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잖아. 두 사람이 여기에 머무르면서 랜드 클리어를 진행하는 건 이제 괜찮아."
"정보 제공은 별개다?"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중 하나겠네. 뭘 달라고 하거나, 뭘 시키거나."
내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시키고 싶은 일이 있어. 성공적으로 마치게 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공유해줄게."
시키고 싶은 일이라. 그렇겠지. 이 상황에서 쓸데도 없는 돈 같은 걸 내놓으라고 할 리도 없고.
"우리가 싫다고 말하면?"
사실, 정보를 주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여기에 머무를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우리에게 물자를 공유해주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거기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물자가 부족한 것도 아니거든. 녀석들이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게 없다고 해서 우리가 랜드 마크를 찾아낼 가능성이 없냐고 하면 또 그것도 아니다.
내 말에 이경석이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안전지대 안에 있는 생존자들이...!"
"오빠, 그런 건 중요한게 아니잖아. 저 사람들은 외부인이야."
이시은이 자신의 오빠를 제지했다. 그래, 나 대신에 말해줘서 참 고맙네. 이시은이 잠깐 심호흡을 한다.
"당신의 말대로야. 당신들이 우리에게서 정보를 확보하는 건 어디까지나 선택지일 뿐이지.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받게 된다면 분명히 많은 시간을 절약 할 수 있을텐데?"
"글쎄, 오히려 당신들이 우리에게 부탁하는 일을 하는 과정에서 소모되는 시간이 더 많을 가능성도 있죠."
이시은이 한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린채 선서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건 확실하게 말해 줄 수 있어. 우리가 요청하는 부탁을 들어주고 정보를 확보하는 편이, 당신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정보를 취득하는 것 보다는 훨씬 빠를거야."
다시 손을 내린 이시은이 우리를 바라봤다.
"하루가 멀다하고 불어오는 모래 폭풍에, 모래로 만들어진 지형은 주기적으로 모양과 형태를 바꾸지. 길을 찾는 지표가 될 만한 건물들은 모래에 파묻히거나 무너져서 그 역할을 하기가 힘들어. 돌아다니면서 정보를 취득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니잖아?"
말이야 그럴듯한데.
"좋아, 하지만 정보를 먼저 제공받아야겠어."
선불로 합시다. 나는 저 녀석들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공유해준다면 부탁한 일을 해줄 것이다. 하지만 저 오누이가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일만 시키고 나서 입만 닦으려고 드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우리가 당신들의 뭘 믿고?"
보자, 이 정도 했으면 약간은 강업적으로 나가줘야 할 차례인가. 이시은의 말에 나는 픽 웃고는 녀석에게 살짝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 믿는게 좋을 거야. 우리가 조금 더 거친 방식으로 당신들에게서 정보를 얻어낼 생각이었다면, 방법은 무수히 많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신사적으로 거래를 하자는 제스쳐를 취하는 중인데 의심을 하다니. 용인을 거쳐오기 전이였다면 모를까, 용인에서 목숨걸고 레벨업을 한 우리라면 이 안전지대에 머무르는 사람들 전원이 달려든다고 해도 승산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