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모래의 도시
쏟아지는 모래폭풍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격렬했다. 여름이 되면 비오고, 겨울이 되면 눈 오는 한국에서 모래폭풍을 경험하는 건 사실 상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래도 어떻게든 버텨내는데 성공했네요."
서지현은 약간 피곤한 표정으로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고생했어.
모래폭풍은 분명히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용인에서 거듭해왔던 레벨업 또한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성장을 우리에게 가져다주었던 모양이다.
한 바탕 모래가 휘몰아치고 나자 다시 펼쳐지는 것은 모래에 파묻인 도시의 풍경과, 하늘에서 좋다고 뜨거운 햇살울 수백발의 화살처럼 쏴재끼는 태양이었다.
죽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한 열기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겁지 않은 곳이 없다. 심지어 걷다보면 달궈진 모래가 신발 속으로 빨려들어가 발가락을 바싹 달궈주기까지 한다.
"안전지대 안도 이렇게 더우면 미칠 것 같은데."
서지현이 내 말에 혀를 쭉 내밀고는 대답했다.
"신기한게 땀은 한 방울도 안 나네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나는게 아니야. 우리의 몸은 지금도 열심히 땀을 흘리는 중이야."
땀이 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말라버리는 것 뿐이다. 아주 작게, 서지현의 피부 위에 물기가 생겼다가 말라버리는게 눈에 잡힌다. 참나, 도대체 온도가 얼마나 되는거야.
"쇼핑몰은 수원역 근처에 있으니까. 여기에서 걸어가려고 하면 꽤 시간이 걸릴걸."
건물이 죄다 모래에 파묻혀 버려서 제대로 된 지도를 구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수원의 쇼핑몰이라고 한다면 이전에 한 번 가봤던 기억이 있다.
"어머나 좋아라. 솔직히, 더는 못 참겠어요."
갑자기 주변이 서늘해지기 시작한다. 숨을 쉬기가 힘들 정도로 조여오던 뜨거운 공기가 서늘하게 식어서 폐 속으로 밀려들어오자,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다.
"마력, 괜찮겠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용광로를 식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걸어다니는 에어컨의 기능 정도는 충분히 오래 유지 할 수 있어요. 더 이상 참고 버티다가는 마력이 아니라 물이 먼저 동나겠어."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퍼석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소리."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
"사람들 소리가 들려, 네 명 정도. 무기 같은 것도 들고 있는 모양인데."
서지현이 들을 수는 없을 거다. 내 귀에도 굉장히 희미하게 들리는 중이니까.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사람이 확실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또는, 괴물들 중 하나가 자기 이름을 오달수라고 지었을 수도 있긴 하지."
분명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지칭하면서 오달수 씨!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내 말에 서지현이 쓴웃음을 지었다.
"오달수라. 사람 맞는 모양이네요."
서지현은 허리 위에 한 손을 올린채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꺼내놓은 물이 증발하는 속도를 생각해보면 거처를 안전지대 밖에 둘 수는 없어요."
"쇼핑몰 안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자들 중 일부일거야. 좋은 인상을 심어줘서 손해 볼 건 없겠지."
안전지대는 우리에게도 절실하다.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물은 먹어야 하니까. 물론 상점에서 계속해서 구입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구매한 물을 사이비 교회에서 강제로 십일조 뜯어가듯이 일정 비율 허공으로 헌납해야 하는 현 판국에 안전지대 밖에서 마음 편히 물을 마실 수는 없다.
"그럼 정해졌네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가보죠."
나는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아, 이제 저도 들리네요."
한 50m 정도를 더 걸었을까. 마침내 소리의 원인을 찾아 낼 수 있었다.
"참나."
노출이 많은 무희복을 여자가 입가를 가리는 베일과, 보석으로 장식된 차도르를 쓴 채로 네 개의 손에 시미터를 들고 휘두르는 광경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하반신이 뱀이라는 점이다. 그 괴물이 휘두르는 시미터 중 하나가 상처를 입은 남자에게 휘둘러지는게 보인다.
까앙, 하는 쇳소리와 함께 내가 뽑아든 정글도가 그 시미터를 막았다. 곧바로 녀석이 나를 향해서 마구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쇳소리가 계속해서 울려퍼진다.
"팔이 네 개면 뭐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시미터를 막아내다가 틈을 봐서 녀석의 배를 발로 강하게 차버렸다. 허리가 확 휘면서 상반신 여자에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하고 잇던 괴물이 뒤로 쭉 밀려난다. 녀석의 꼬리 끝에 달린 방울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 방울뱀이셨어?"
뭐 하는 거지, 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녀석의 주변에 모래 폭풍이 매섭게 몰아치기 시작한다. 나는 잠깐 인상을 쓰고 얼굴을 가렸다. 모래 먼지가 가라앉고 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도망친건가.
"..."
멍하니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충 봐도 마흔은 넘어 보이는 중년이다.
"고마워, 하마터면 큰 일이 날 뻔했어."
"뭘, 돕고 살아야지."
그 와중에 뒤편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기는 뭐가. 당신들 때문에 도망쳐버렸잖아."
이야, 말하는 뽄새 봐라. 도와주고 저런 소리를 듣는 건 또 각별한 경험인데. 나는 그 말에 중년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여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아마,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나이인데.
"뭐해 오달수, 일어나. 돌아가자. 안 그래도 더운데 허탕만 쳤네."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우리를 무시 한 채 중년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하, 이 중년의 이름이 오달수였던 모양이군.
거 참, 날도 더운데 짜증나게 하네. 내가 칼자루에 손을 올리고 녀석에게 다가가려고 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중년이 내 옷깃을 잡았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지만 그러지 말아주게. 자네들이 생각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야."
중년의 말에 서지현이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죠?"
내 말에 중년이 대답했다.
"이시은, 안전지대를 지배하는 오아시스라는 조직의 두목이 저 소녀의 오빠야. 그의 허락이 없이는 안전지대 안으로 들어 갈 수도 없고, 배급도 받을 수 없어."
그러니까, 오빠 잘 둬서 천방지축으로 날뛰고 다니는 고딩이라는 거군. 성격부터 배경까지 미움받기 딱 쉬운 조합이다. 최소한 지금까지 본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렇다는 거다.
"뭐해?!"
그 말에 중년이 우리를 한 번 슥 보고 다시 한 번 꾸벅 인사를 한 다음에 상처를 입은 채로 허겁지겁 소녀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서지현이 중얼거렸다.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네요."
"그러게."
절혼을 확보하고, 랜드 클리어를 마친 다음에 이 동네를 뜨는게 좋을 것 같다. 괜히 이 동네 사람들과 얽혀서 좋을 일은 없어 보인다.
"너희들도 따라와."
"별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우리가 네 시다바리도 아닌데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야 하나? 서지현의 말에 이시은이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안전지대로 들어 올 생각인거 아니었어? 나랑 같이 들어가는 편이 절차가 훨씬 간단할텐데.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을테고."
그 말은 확실히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다. 나와 서지현은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녀석들을 따라 걸어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신음 소리 좀 그만 내면 안될까?"
이시은이 오달수를 보고 얼굴을 잠깐 구기고 있다가 뭔가를 꺼내서 오달수에게 건네줬다.
"마셔."
얼씨구, 저건 포션이잖아. 오달수는 이시은이 건네준 포션을 마시고는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시끄러. 빨리 걷기나 해. 해 지고 나서 안전지대로 들어 갈 생각이야?"
얼마나 걸었을까. 우리는 쇼핑몰 입구에 도착했다.
"돌아오셨습니까. 뒤에 있는 사람들은?"
이시은이 그 말에 대답했다.
"본의 아니게 도움을 받았어. 길이나 비켜."
이시은의 말에 경계를 서던 남자가 대답했다.
"하지만, 안에 들어오기 전에 소지품 검사와 신원 파악 같은 절차가..."
이시은이 그 말에 잠깐 하늘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하, 그럼 나는 날도 더워 죽겠는데 여기에 서서 니들이 그 시시콜콜한 절차 끝낼 때 까지 땀이나 흘리고 있어야겠네?"
"아가씨는 먼저 들어가셔도 괜찮습니다."
이시은이 인상을 쓰고 있다가 말했다.
"내가 들여보내겠다고 하는데 혀도 참 길다. 안 비켜?"
그 말에 남자가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길을 비켜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수원의 안전지대인 쇼핑몰 안으로 들어 설 수 있었다. 계속 걸어가면서 이시은이 입을 열었다.
"백화점 7층에 가면 돈까스집 간판을 달고 있는 곳이 있어. 안에 가구 따위는 다 들어냈으니까. 거기에 머물러. 설마 덮고 잘 모포도 없이 굴러온 건 아니겠지."
"없다면?"
내 말에 이시은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와 서지현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럼 바닥에서 자야겠지. 니들 참 대책도 없이 발을 들였네."
그렇게 대꾸한 이시은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고 말했다.
"너, 잠깐 와봐."
그리고는 녀석에게 뭔가를 말하고는 턱짓을 했다.
"알아들었으면 가서 시킨 일 해. 그리고 너희 둘은, 내가 말한 곳으로 향해서 짐 풀고 기다려."
말을 마친 이시은은 휭 하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일단, 머무를 곳이 정해졌으니. 나와 서지현은 잠깐 멀어지는 이시은을 보다가 그녀가 말한 장소로 향했다.
"진짜 텅 비었네요."
"그러게 말이다."
잠깐 바닥에 앉아서 쉬고 있으려니, 방금 전에 이시은이 뭔가를 지시한 녀석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치 식량과 물이다. 그리고..."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이불을 턱 하고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럼 이만."
그는 슬쩍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다음에 돌아갔다. 이불을 살펴보던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참 감을 잡기 힘든 사람이네요. 말로는 성격을 박박 긁어놓더니만."
그러게 말이다. 이 이불과 물, 식량을 누가 우리에게 주라고 한 건지는 굳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시은이겠지. 잠깐 기다리고 있으려니 에스컬레이터 쪽에서 방금 전에 들었던 그 카랑거리는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말했지, 물은 무조건 한 사람당 1.5 리터! 우리가 물이 썩어나는 줄 알아?"
이시은은 팔을 꼰 채로 앞에 서 있는 녀석을 보면서 화를 쏟아내는 중이었다.
"나도 알고 있어."
"알고 있는데 왜 그래, 오빠 대가리 안 돌아가? 숫자를 못 세는 거야? 퍼 달라는데로 다 퍼주고 뭐, 함께 손 잡고 오줌이라도 퍼먹자는거야? 개소리 하지 말라고 해. 아니, 됐어. 물을 더 달라는 사람들 오늘 저녁에 다 1층에 모아. 내가 직접 말할테니까!"
"시은아. 하지만 하루에 1.5리터면..."
"이 쇼핑몰에 모인 사람이 354명이야, 하루에 1.5리터씩만 제공해도 매일 531리터가 사라진다고! 달라는데로 다 주고, 해달라는거 다 해주고! 그러다가 마실 물이 없어서 함께 갈사하고 싶어?!"
그런 외침이 끝나고, 이시은이 벌컥 문을 열고 우리가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마자 시선이 향한 곳은 아까 받은 물과 식량, 그리고 이불이다. 그걸 확인한 이시은이 입을 열었다.
"내가 밖에서 하는 이야기 들었겠지. 안전지대 안에서 물은 무조건 한 사람에게 1.5 리터만 주어져. 불만 있으면 나가. 안 붙잡아."
"안 붙잡아도 안 나갈거고, 나가라고 해도 안 나갈 생각인데."
내 말에 이시은이 대답했다.
"시끄러, 농담 따먹기 하자고 찾아온거 아니니까."
그럼 뭐 때문에 찾아오셨을까. 이은아는 노트 한 권을 펼치더니 입을 열었다.
"이름이랑, 세상이 이 꼴이 나기 전에 하던 일."
호구조사 같은 건가. 내가 빤히 이시은을 보고 있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귀가 어두운거야?"
거 참 사람 성격은 참 기가 막히게 긁어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