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마녀가 사는 저택
15분이라니, 고작?
"그 퍼레이드 규모는 우리도 눈으로 봐서 알잖아. 너무 짧은데."
퍼레이드와 함께 이동하는 괴물들의 숫자는 문자 그대로 드글드글했다. 3분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데. 도중에 다시 재료를 꺼내서 얼굴에 워페인팅 덧바르려 들어도, 가면 쓴 친구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있어주지는 않을거다.
"15분 안에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죠. 퍼레이드는 각 파트별로 지휘자를 따로 두고 있는 모양이에요."
서지현은 말하면서 양피지 하나를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퍼레이드에 관련된 꽤 정교한 그림이 그러져 있었다.
"연주를 담당하는 지휘자, 뒤에 묶어놓고 끌고 다니는 포로들을 통제하는 지휘자, 춤추는 괴물들을 관리하는 지휘자. 세 마리의 지휘자를 다 죽이게 되면 퍼레이드는 끝이에요. 더 이상 검은 염소를 재울 수 없을 거에요."
"그럼 우리의 우선순위는 음악 연주를 총괄하는 지휘자겠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살짝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노래 연주를 막을 수 없게 되면 솔직히, 자신이 없으니까요."
나도 자신없다. 그 녀석들의 가장 큰 무기는 그 망할 연주다.
"다소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일단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다는 것에서 만족해야하나."
서지현이 양 손으로 자기 뺨을 가볍게 치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죠. 어차피 15분 안에 세 마리의 지휘자 중 하나도 처리 할 수 없다면, 하루 종일을 줘도 우리는 퍼레이드를 멈출 수 없을걸요."
"도대체 그 생각의 어느 부분이 긍정적인 생각이야?'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물컵에 물이 반 잔 남았을 때, 누가 컵에 담긴 물을 빼앗아서 다 마셔버렸다면 어차피 저거 먹었어도 감질나서 목만 더 말랐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마이너스 곱하기 마이너스는 플러스라지. 부정적인 상황에 부정적인 상상을 곱하면 긍정적인 생각으로 변모하는건가.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지현을 보다가 말했다.
"돌아가서... 아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저택을 슥 바라봤다. 여기는 아무것도 과자가 아니다. 나는 대충 바닥의 먼지를 쓸어내고 주저앉으며 말했다.
"지현아, 스팸 굽고 밥 하자."
내 말에 서지현이 눈을 빛냈다.
"좋은 생각이에요."
안전지대 안에서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는 안전지대가 아니고, 우리는 내일 큰 싸움을 하게 될 예정이다. 사지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한 조각 위안이 될 수 있는 건 맛있는 식사인 법이지. 며칠만에 먹게되는 제대로 된 식사인지 모르겠다.
스팸이 구워지고, 밥이 완성되고, 된장국이 끓기 시작한다.
"밥은 얼마나 하는게 좋을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곧장 대답했다.
"한 5인분 어떨까."
내 말에 서지현이 애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 먹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지현은 순순히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그리고, 둘이 먹어치우기에는 확실히 많아보이는 양의 음식들이 우리 앞에 놓였다.
30분 뒤. 둘이 먹기에는 많아보이던 음식들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먹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그냥 구워놓은 스팸과 밑반찬 몇 가지에 쌀밥일 뿐이었지만, 마치 프링글스 같은 중독성을 자랑한다.
폭식은 수명을 단축하는 지름길이라고 하던데. 방금 전의 식사로 수명이 한 3년은 줄지 않았을까. 식사를 마친 우리는 냄비밥에 눌어붙은 누룽지로 만든 숭늉을 한 잔씩 손에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7인분을 할 걸 그랬나봐요."
서지현이 숭뉸을 홀짝거리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더 먹었으면 백프로 체했을 걸."
"맞아요, 그냥 아쉬운 마음에 해본 소리에요."
내일 성공한다면 조만간 또 통조림에 담긴 스팸을 곁들여 먹는 쌀밥 같은 거에는 금방 질려버릴 것이다. 상황이 상황이라 못먹다가 먹어서 맛있는 것 뿐이지, 사실 그렇게 맛과 영양가가 뛰어난 식사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일 실패한다면 어쩌면 우린, 다시는 이런 식사를 하지 못하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한 번 경험해 본 죽음의 문턱은 나와 서지현에게 심각한 위기감을 심어주었다.
끅. 하는 소리를 내고 서지현이 멍하니 남아있는 잔해를 바라보다가 입맛을 다시고 자기 배를 몇 번 두들겼다.
"..."
별 다른 말 없이 잠깐 쉬고있던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가죠."
이제 여기에서 볼 일은 끝났다. 우리는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서 저택을 나섰다.
안전지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2시 정도가 되어있었다. 운동장을 서성거리고 있던 김용천이 우리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젠장맞을, 걱정했잖아!"
김용천의 말에 나는 픽 웃고 대답했다.
"핸드폰으로 연락이라도 해둘까 했는데, 권역 밖이지 뭐야."
내 말에 김용천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핸드폰이 터질리 없지 않나. 이런 세상인데."
에라이.
이 친구는 사람도 좋고 뭐도 좋고 다 좋은데 유머 감각이 너무 없단 말이야. 하긴, 생각해보면 또 그런 점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력으로 어필 될 수도 있겠네. 사람들의 취향은 다양한 법이니까. 게다가 먼저 자지도 않고 걱정하면서 운동장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고 하면 감동을 받을 여자들은 꽤 많을 것 같다.
"뭐 하다가 이렇게 늦은거야."
김용천의 말에 서지현이 입을 살짝 가리고는 어깨를 뜰썩였다. 아마 몰래 트림을 한 모양이다. 나는 재빨리 김용천의 시선을 내 쪽으로 고정시켜줄 한 마디를 던졌다.
"생존자들이 말했었던 마녀의 집을 다녀왔지."
김용천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무사히 돌아왔다는 건."
그제서야 서지현이 간단하게 한 손으로 브이를 만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정리 끝냇어요. 그리고, 놀이동산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 것들도 조금 얻었죠."
서지현의 말을 듣고 턱을 쓰다듬던 김용천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쉽게 말해서..."
그래 임마.
"우리 준비 끝났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영양바 챙겨먹고 놀이공원으로 향할거야."
내 말에 김용천이 작게 숨을 몰아쉰 다음 양 손을 뻗어 나와 서지현의 손을 하나씩 잡았다.
"두 사람 모두, 그 동안 고생 많았다."
나는 잡혀있는 손을 보다가 대답했다.
"아직 끝난 거 아니야. 샴페인은 나중에 터뜨리는게 좋을 것 같은데."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래, 아직 끝난 건 아니지. 잘 부탁하마."
잠깐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내일 성공하면, 당분간 우리를 다시 볼 일은 없을거야."
내 말에 김용천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랜드 클리어를 성공한다면 우리는 바로 목적지로 이동할 예정이고, 실패한다면야 재수가 좋으면 다시 얼마 전처럼 반 시체가 되어서 돌아올테고, 재수가 나쁘면 못 돌아오겠죠."
나와 서지현을 번갈아 보던 김용천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왕에 못 보게 된다면 일이 잘 풀려서 못보게 되는 거면 좋겠군."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는 대답했다.
"바로 근처에 이천이 있어."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한국 사람이니까 알지. 갑자기 이천 시 이야기는 왜 꺼내는 건가?"
"가면 우석진 부부라는 사람들이 자리잡고 있을거야. 생각이 있으면 합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걸."
꽤 좋은 사람들이고,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 좋은 거로 치면 김용천보다는 아무래도 좀 부족한 느낌이지만. 그거야 김용천이 여지껏 우리가 봐왔던 사람들 중에서 독보적으로 사람이 좋은 것 뿐이니까.
"우석진 부부라."
서지현이 김용천의 중얼거림을 듣고는 말을 덧붙였다.
"재주가 많은 부부에요. 나름대로 생존자들을 이끌고 있는데,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거든요. 서지현과 오현석이 말해줘서 왔다고 하면 바로 싸움이 벌어지는 일은 없을거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몇 가지의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용천이 턱을 쓰다듬었다.
"나 혼자서 정할 문제는 아니야."
사람들이 반대하지는 않을거다. 그냥 아래로 들어가는게 아니라, 농사 지을 줄 알고 사냥한 괴물들의 고기로 보존식과 가죽을 만들 줄 아는 사람들과 합쳐지는거다. 꾸준한 체력단련을 통해 노동력은 어느정도 확보했지만 기술과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 기술력은 충분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한 사람들.
둘이 합쳐지면 우리가 방금 전에 먹었던 구운 스팸에 쌀밥만큼이나 훌륭한 궁합이 될 거다.
"일단, 내 입장에서는 괜찮은 제안 같아. 뭐, 자네들이 괜찮다고 말한 사람들이니 어련하겠냐만."
이야, 내가 김용천이라는 사람을 잘 몰랐다면 방금 전 저 녀석의 발언을 약간 비꼬는 식의 농담인 줄 알았을거다. 옆에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서지현을 보니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은 아닐걸요."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이 대답했다.
"자네들이 나쁜 사람들이었다면, 나는 왜 아직도 살아있는건지 이해가 안가는데."
그 말에 나와 서지현은 할 말을 잃었다.
"죽여야 할 이유는 또 뭔데."
내 말에 김용천이 대답했다.
"맛이 없다고 하지만 어쨌든 먹으면 배를 채울 수 있는 영양바도 제법 모아놓았고, 물도 있어. 거기에 더해서 학교에서 주워모은 소소한 물건도 있지. 게다가 부려먹으려고 든다면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력. 이런 세상에서 이 정도의 이득이라면...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 드는 녀석들은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을거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나와 서지현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사람이 물러 터져서 그렇지 생각을 못하는 건 아니야. 나로서는 그런 상상을 실행으로 옮길 엄두가 나지 않을 뿐이지."
생각과 행동이 꼭 일치하는 법은 아니니까. 게다가 딱히 그런 생각들은 행동으로 옮긴다고 해서 자랑스러워 할 만한 일도 아니다.
"자네들은 이 안전지대에 머무르면서 한 번도 우리에게 물을 달라고 하거나, 영양바를 달라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우리가 비축해 놓은 게 제법 있었으니까. 딱히 필요가 없었을 뿐이야."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비축해 놓은 게 있어도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어."
"구정물이랑 똥물을 비교하면 당연히 똥물이 더 더럽겠지만, 그렇다고 구정물이 깨끗한 건 아니죠."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이 잠깐 있다가 대답했다.
"물이라. 3급수는 열심히 정화하면 어떻게든 식수로 쓸 수 있지만, 4급수는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 정수를 해도 마실 수 없지. 3급수와 4급수 둘 다 그대로는 마실 수 없는 더러운 물이지만, 그 점이 틀려."
김용천은 말을 마치고 나서 우리를 바라봤다.
"물론 자네들도 여기까지 오면서 사람을 죽일 일이 많았겠지. 내가 두 사람을 오래 본 건 아니지만. 만약에, 정말 만약에 이 세상이 지금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면, 자네들은 이후에 뭘 하면서 어떻게 살 생각인가?"
서지현이 잠깐 있다가 대답했다.
"해야 하는 일이 끝나고 나면 저는 이 사람이랑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생각이에요. 다른 걸 딱히 바라지는 않아요."
나 또한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와 서지현을 보던 김용천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굉장히 가능성이 낮고 이루어지기 힘든 일이겠지만... 틀림없이 소박한 꿈이군. 그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착취하며 편하게 살 수 있을텐데. 왕처럼 말이지. 나쁜 사람이라... 내 기준에서 나쁜 사람은 무서운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야."
김용천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당장 가진게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남들 비위를 맞추는 사람이라고 해서,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이 세상을 한 번 보게. 지금 남들을 착취하며 악독하게 구는 사람들 중에서는 분명히, 세상이 망하기 전까지는 착하게 살던 사람들도 있었을거야. 자기가 그렇게 살고 싶었던게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 착하게 사는 거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기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 착하게 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이 지독한 행동을 해도 누구 하나 잡아가는 사람 없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각자의 본색이 드러나는 세상이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와 서지현의 어깨를 몇 번 두들기고 말했다.
"내일 일 떄문에 긴장해 있을텐데 괜히 자리에 붙잡아 둔 것 같군. 돌아가서 푹 쉬고, 내일 잘 부탁한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돌아갔다. 나와 서지현은 잠깐 녀석을 보고 있다가 교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