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파밍
너무 오래 걸리면 안된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짧게 잡아도 안된다.
"이런 경우에는 구체적인 목표가 필요하다고들 하죠."
해가 저물고 밤이 된 다음, 서지현은 노트 한 권을 펼쳐놓고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조명은 서지현이 만들어 놓은 큼지막한 화염 덩어리다. 저런게 떠 있으면 더워야 정상이지만 저 화염구가 만들어내는 열기는 마찬가지로, 서지현의 통제에 의해서 무사히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목표라."
서지현은 내 중얼거림을 듣고 나서 대답했다.
"사실 뭐라고 해야 할까. 우리는 클리어에 의의를 두고 있었잖아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클리어를 위해 레벨업을 해야 한다는 상황이 되었으니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내가 의견을 하나 던졌다.
"그럼 달성해야 하는 레벨이 목표가 될 수 있겠네."
서지현에 입에 펜을 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에요. 어느 정도를 예상하고 있으신지?"
"글쎄..."
고민하는 나를 바라보던 서지현이 대답했다.
"좋아요, 저도 50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했어요. 현명하네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게다가 50이라니.
"너 지금 레벨이 얼마야."
내 말에 서지현이 펜으로 수첩에 글을 쓰면서 대답했다.
"34네요."
이야, 대충 70이 아니라 딱 70이었잖아.
"34에서 50이라, 그렇게 쉬워 보이는 일은 아니네."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인생의 목표는 높을수록 좋아요. 당연히, 달성한다는 전제가 있어야하지만."
그래, 달성한다는 전제가 있어야지.
"세상에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지 못하는 경우는 많아. 대표적인 예는 저축이라고 할 수 있지."
돈 모아서 뭐 사겠다고 한 사람들 중에 진짜로 뭘 산 사람을 내가 본 적이 극히 드물어서 말이야. 서지현이 내 말에 대답했다.
"외부 요인으로 인한 달성 실패는 어쩔 수 없는 사안이죠. 저축 같은 경우에는 그런 요소가 많이 작용해요. 돈 모으겠다고 아픈데 병원을 안 가거나, 경조사에서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하지만, 괴물을 잡아서 경험치를 받고 레벨업을 하는 것 뿐이잖아요. 거기에 외부의 요소가 개입될 예지는 적어요. 그래, 굳이 따지자면 레벨업이라는 건 성적향상 같은 목표와 비슷하죠."
자기가 열심히 할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달성 할 수 있다. 그게 서지현의 지론이었다. 초중고를 모범생을 마친 여자다운 대답이군.
"용인 시의 괴물이 다 죽어버리면?"
내 말에 서지현이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해낼 자신이 있으세요?"
글쎼, 해보면 되지 않을까. 지금 나와 서지현의 기세만 따지자면 개미굴을 만난 세스코에 비할 만 한데. 나는 서지현의 말에 잠깐 고민하다가 손짓을 했다.
"좋아. 50으로 하자."
목표로 설정한 레벨은 50이다. 사람이 꿈은 크게 꿔야 한다고 하잖아. 그리고...
"내가 입은 상처에 저주가 깃들어 있었다고 하던데."
내 말에 서지현이 흠, 하는 소리를 냇다.
"제르멩이 한 말인가요?"
그래, 제르멩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럼 저주에 대한 방비책이 필요하겠네요. 상점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또는 김용천이 조사해서 발견한 장소들 중 몇 곳에서 쓸만한 장비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구역 안에는 꼭 랜드 마크 하나만 덜렁 있는 것은 아니다. 김용천을 포함한 고등학교 안의 생존자들이 우리를 지원해준다는 뜻은 뭐 목욕할 때 시중을 들어주겠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레벨업과 장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레벨업을 할 수 있고, 장비를 얻을 수 있을 만한 곳을 찾아내야 한다.
그 찾아내는 과정을 김용천과 남은 생존자들이 도와주겠다는 뜻이다.
"이러면 우리가 너무 콩고물만 받아먹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해지는 느낌이지만요."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기는 하다. 빠른 사냥과 고속 레벨 업을 위해서 사냥터를 몰아주는 느낌이지. 우리가 이해득실은 따지지만, 날먹을 하지는 않는다.
"일이 끝나고 나면, 김용천에게 이천시에 머무르고 있을 우석진 부부를 소개해주는 건 어떨까. 물론, 김용천이 마음내켜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김용천은 그래도 여기에서 왕고 노릇을 하던 사람이다. 이제와서 자기 지위를 버리고 우석진 부부 아래로 들어가고 싶어할까.
"글쎄요, 제가 봤을 때 그 사람은 용인에서 왕고노릇을 하는 것에 상당한 부담을 가지고 있어 보였어요. 우석진 부부 아래로 들어가는 일을 싫어할 것 같지는 않네요. 문제는, 우석진 부부가 이를 반길지 어떨지."
서지현의 말에 나는 슥 하고 창 밖을 바라봤다.
"이 고등학교에 남아있는 생존자들 중에서 의지가 약한 사람은 없다고 보는 편이 좋아."
정문만 나가면 바로 만나 볼 수 있는 수많은 과자의 해일 속에서도 꿋꿋히 여기에 남아 맛대가리 없는 영양바 따위를 씹으며 버틴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어서 그런지 다들 몸이 꽤 좋은 상태다.
"건강하고 의지가 강한 생존자, 거기에 더해서 사람들의 체력을 체계적으로 늘려 줄 수 있는 운동 방면에 박식하고 사람 좋은 체육관 관장."
받아들이기 꺼려지는 조합은 절대로 아니다. 게다가 우리에게 괴물과 포인트를 몰아주기로 했다고 해도 이 녀석들 중에 상당수는 이미 안전지대를 나와 용인시를 돌아다닌 경력들이 있다. 레벨이나 장비, 스킬 같은 건 이천 시에 있을 우석진 부부 휘하의 사람들에 비해 딸리지 않을 것이다.
"사냥을 함께해도 괜찮고, 농사일을 부탁해도 괜찮지."
둘 다 노동력이 많이 필요한 일들이다.
"합방을 할 가능성은 충분하네요. 다른 사람들 사정은 여기까지만 생각하죠. 제가 저도 모르게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네요."
다시 서지현과 나는 당면한 과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레벨은 50까지, 저주에 대한 대항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듯한 방어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으니 그것도 장만해야 한다.
"스킬은?'
그래, 안 그래도 내가 거기에 대해서도 조금 고민이 있었지. 나는 약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모처럼 네게서 마력 스탯을 나눠 받았는데. 그걸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턱을 쓰다듬었다.
"외도라. 나쁜 생각은 아니네요. 단기간에 확 하고 실력을 높히려면 새로운 카테고리를 열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저도 하고 있었거든요."
투자 대비 효율이라는게 있다. 물론 카테고리를 하나 더 열어버리게 되면 상점에서 제공하는 한정된 스킬 목록에 두 가지 카테고리에 해당되는 스킬들이 생겨서, 한 가지 스킬을 쭉 집중투자할 수 있는 기회는 좀 상실되겠지만...
지금 와서 반사신경 카테고리의 스킬 가격을 살펴보면 눈이 돌아갈 지경이다. 기본 천 몇 포인트부터 시작하는 스킬들 뿐이니까. 그 정도의 포인트라고 하면 새로운 카테고리를 열었을 때 아마 그 카테고리를 2단계에서 3단계 사이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막 카테고리를 네 가지 다섯 가지 열어버리면 문제가 분명히 심각해지겠지만...
두 개 정도로는 얻는 이득이 많지, 손실이 클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저는 육탄전 관련 카테고리를 하나 열고, 당신은 마력 관련 카테고리를 하나 여는 편이 좋겠네요."
서지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수첩을 닿았다.
"레벨, 장비, 스킬. 사실 상 이 세 가지에 대한 향후 방침을 짰으면 그걸로 계획 단계에서 고려할 건 더 이상 없다고 봐야겠죠."
그래, 남은 건 실행 뿐이다.
"내일부터 바로."
내 말에 서지현이 곧바로 내 가슴을 살짝 밀었다. 등에 힘이 가해지면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머리통을 떄린다.
"바로는 무슨 바로. 회복이 우선이에요. 가만히 계시니까 몸이 다 나은 줄 아셨나보네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드레싱을 너무 잘해줘서 그만 아픈것도 까먹어버렸지 뭐야."
"아부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단 상점을 이용해 스킬을 배우고, 파는 물품을 뒤져보는 것부터 하죠. 돌아다니는 건 회복이 끝나고 나서."
몸을 쓸 수 없으니, 몸 안 쓰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살피면 된다. 물론 상점에 마음에 드는 스킬이 튀어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경우에는 그냥 해당 날의 상점은 스킵하면 된다. 어차피 레벨업 목표를 달성하기 전까지는 시간 여유가 제법 있으니까.
설마하니 그 긴긴 시간동안 마력이 관련된 스킬 하나가 랜덤으로 안 튀어나오겠어? 서지현은 내 옆에 앉아서 지도를 펼쳐들었다. 김용천이 건네준 지도다.
"확실히, 놀이동산에 랜드 마크가 있다는 걸 알고 난 다음부터는 그쪽 주변의 조사를 충실히 한 티가 나네요."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한 두 군데가 표시되어있고, 나머지 표시들은 죄다 놀이동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특이사항들 뿐이다.
"우리와 협의는 이미 끝났으니까. 앞으로는 다른 곳 위주로 조사를 하겠지."
지도를 살펴보던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역북 터널 주변에 뭔가가 있는 모양이에요. 잠깐 지도 좀 들고 계세요."
서지현은 나에게 지도를 건네주고, 옆 책상에 놓여있던 노트를 펼쳐들고 내용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있다."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내 옆에 앉아서 나에게 노트를 보여주었다.
"커다란 아이스크림 트럭과 앞치마를 한 아저씨라. 미국적인데."
내 말에 서지현이 어꺠를 으쓱했다.
"누가 알겠어요? 그 검은 염소인지 뭔지 하는 괴물이 꿈 속에서 미국 드라마라도 본 건지."
나는 서지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자면서 드라마를 볼 수가 있나?"
내 말에 서지현이 입맛을 다셨다.
"뭐, 한반도 전역의 랜드 마크를 유지시키는 괴물이라면 자면서 미국 드라마 정도는 쉽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말고. 어쨌든, 이 고등학교에서 그렇게 멀지도 않은거 같은데. 회복하고 나면 이곳부터 먼저 노려보죠."
말을 마친 서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배낭에서 물을 꺼내 수건을 적셨다.
"벗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흠칫하고는 양 팔로 가슴을 가리며 대답했다.
"저기,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어."
"안 씻은지 3일이나 지났고, 그 와중에 당신 꽤 고통스러웠는지 땀도 엄청 흘렸어요."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뭔가를 휙 나에게 던져주었다. 구릿한 쉰내가 풀풀 나는 옷이었다.
"이건 뭐야."
"당신이 어제 입고 있던 옷이죠. 지금은 갈아입어서 잘 안 나는 모양인데. 시간 있으면 겨드랑이 냄새 한 번 맡아보세요."
서지현이 시키는 대로 겨드랑이의 냄새를 맡아본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는 말했다.
"그 뭐냐, 나한테는 역겨울 수 있지만 여자들에게는 페로몬 같은 효과를 내지 않을까."
서지현이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페로몬 같은 소리. 구토 유발과 식욕억제 페로몬을 말하는 건가요? 그거라면 확실히 효과는 입증되었어요. 그 옷 냄새 맡고 있으면 구역질과 함께 식욕이 확 떨어지니까요. 입에 물고 있으면 일주일만에 10kg은 감량될걸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군말없이 옷을 벗었고, 서지현이 다가와서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젖은 수건은 그 사이에 서지현이 덥혀 놓아서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