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92화 (92/237)

# 92

월드 앵커

월드 앵커? 녀석은 그렇게 대답을 돌려주고 나서 다른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있던 곳에서 여기까지는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바로 옆에 두고도 못 찾을 정도라니. 봉인을 참 세심하게 해둔 모양이군. 굉장한 우연 아닌가. 물론 기대를 가지고 표식을 남겨두기는 했지만... 설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표식을 남겨놓은 인간들이 핵심 요소 중 하나를 찾아내다니."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있다가 대답했다.

"칭찬은 고맙지만, 내가 지금 그 말을 일일히 들어주기는 좀 곤란한 상황이야. 월드 앵커에 대해서 말해줘."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닻이라는 뜻이지. 월드 앵커는 우리를 이 세상에 붙들어 주고 있는 닻 같은거라네. 또한 랜드마크와, 각 랜드마크가 격리하고 있는 구역을 유지하는 힘의 원천이기도 하지. 그 아이가 없으면 괴물들은 여기에 남아있을 수 없고, 랜드마크와 구역의 격리 또한 유지될 수 없어."

나는 녀석의 말을 듣고 침을 삼켰다.

"그럼, 그 검은 염소라는 괴물이 죽으면 지구 상에서..."

내 말에 녀석이 웃음을 터뜨리며 지팡이를 가볍게 몇 번 돌렸다.

"그 아이가 비록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제법 힘이 강하다지만. 그 정도는 아니야. 내가 말하는 월드는 지구를 뜻하는게 아니야. 더 좁은 개념이라네. 그래, 그 아이의 힘이라면 최소한 한반도 정도는 붙들어 두고 있겠군."

제르멩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해했나? 그 아이가 제거되면 이 땅은 우리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야."

[미션 힌트, 월드 앵커 획득]

나는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럼, 그 검은 염소인지 뭔지 하는 녀석이 월드 앵커이자 용인 시의 랜드 마크라는 뜻인가."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지. 별개라네. 용인 시의 랜드 마크는 그녀를 재워두고 있는 퍼레이드고, 자고 있는 그 아이는 월드 앵커인거야. 퍼레이드를 멈추면 잠에서 꺤 그 아이는 자연스럽게 한반도 어딘가에 자리잡게 될거야. 그 아이가 꿈에서 깨었으니 그 아이의 꿈으로 변질되었던 용인시는 제 모습을 되찾을테고. 용인시가 제 모습을 되찾았으니 랜드 클리어는 성공하는거지."

제르멩이 설명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월드 앵커는 월드로 지정된 구역 중 어딘가에 랜드 마크의 형태로 봉인되어있다가, 봉인되어있던 지역의 랜드 클리어에 성공하게 되면 풀려난다. 봉인이 풀리고 나면 월드 앵커를 찾아서 제거 할 수 있고, 월드 앵커가 제거된다면 랜드 클리어와 마찬가지로 월드로 지정된 구역 안의 괴물들이 싹 쓸려나가게 된다.

그런 시스템이다.

"용인시의 랜드 클리어에 성공해서 검은 염소가 잠에서 깨어나면, 그 녀석이 어디로 향할 지 알고 있나?"

내 말에 제르멩이 대답했다.

"이미 이 정도만 해도 꽤 많은 도움을 준 것 같은데. 욕심이 많군."

나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 해결하는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고 했었지. 하지만 이것만 해도 큰 도움을 받은 셈이다.

"그래, 고맙다."

"감사 인사라. 그런 것도 할 줄 아는 성격이었는지는 몰랐는데."

도움을 받은 건 받은거다. 괴물이건 뭐건, 이 녀석이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으면 나와 서지현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계속 고생하게."

"... 너는 어디가는거냐."

물어보고 싶은 일이야 산더미처럼 많지만, 저 녀석은 내 질문에는 아마 한 마디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을거다. 제르멩이 지팡이로 바닥을 탁 치고는 대답했다.

"피라미드."

녀석은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나는 서지현을 안은 채 다시 안전지대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서지현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누가 보면 어디가서 맞고 온 줄 알겠다."

그 이쁜 얼굴에 쌍코피가 터졌네. 나는 비틀거리며 배낭을 뒤져 휴지를 꺼내 코를 막아주었다.

"으윽..."

조금 뒤, 서지현이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뜬 서지현이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 피나요."

코가 막혀서 맹한 목소리가 들린다. 곧바로 서지현은 안겨있던 자세를 풀고 일어났다. 나는 서지현을 보고 있다가 중얼거렸다.

"일어났구나, 다행이다. 미안한데 교대 좀 하자."

더 못 걷겠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풀썩 서지현 쪽으로 쓰러졌다.

***

서지현은 곧바로 오현석을 업고 안전지대 쪽으로 향했다.

"잠깐 멈춰!"

서지현이 그 말을 듣고 살벌한 목소리로 말했다.

"5초 안에 꺼져, 다 불태워 버리기 전에!"

말로만 끝나는게 아니라, 서지현의 몸 주변에는 살벌한 소리를 태며 타오르는 불꽃이 한 무더기 떠 있었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서지현이 그 말에 고개를 들어서 잠깐 하늘을 보고 심호흡을 한 다음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그럼 그 망할 놈의 쿠키나 던져, 빨리!"

휙 하고 곧바로 쿠키가 날아오고, 서지현이 그걸 한 손으로 척 하고 받은 다음에 다시 휙 하고 바리케이트 쪽으로 던졌다. 쿠키를 받은 녀석이 밧줄을 내려주기 위해 아래쪽을 뒤적이는 걸 보고 있던 서지현이 으, 하는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오현석을 안아든 채로 훌쩍 바리케이트를 뛰어넘었다.

김용천이 놀란 표정을 짓고 서지현을 바라봤다.

"병... 아니, 간호실."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이 그녀가 뒤에 업고 있는 오현석의 상태를 확인하고 곧바로 위치를 알려주었다. 서지현이 곧바로 그쪽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김용천은 그제서야 오현석의 등 상태를 볼 수 있었다.

살이 터지고 찢어져 뼈가 살짝 드러나 보일 정도로 심각한 상처.

"하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다룰 수 있을 만한..."

"그건 나도 알아!"

서지현은 그렇게 외치고는 곧바로 양호실 쪽으로 달려갔다.

그녀의 머리 속이 굉장히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남아있던 물약은 이미 오면서 먹였다. 하지만 상처의 회복은 그다지 빠르지 않다.

"마력."

오현석의 상처에는 마력이 느껴진다. 상처를 제대로 회복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거다. 등을 천장 쪽으로 향하게 오현석을 눕힌 서지현이 그 상처를 바라보다가 자기 뺨을 한 번 강하게 때렸다.

당황해서 어버버 한다고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해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로 처리를 해야 한다. 상처를 소독하고, 항생제를 주사한 다음 서지현은 곧바로 손을 상처 쪽으로 가져갔다.

마력이 문제니, 그것부터 제거해야 한다.

"..."

서지현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너무 급했던 걸까. 깃들어 있는 마력을 뽑아내려고 들자, 지혈해 놓은 붕대에 피가 번지는 속도가 확 늘어난다. 가까스로 지혈해놨다고 생각했는데. 뻘겋게 물든 붕대 위에 새 붕대를 덧대고 이마를 훔쳤다. 그 와중에 손에 묻어있던 피가 서지현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한 번에 너무 많이 뽑아낼 수는 없겠어."

서지현은 자신의 얼굴로 튄 피를 닦을 여유도 없이 다시 천천히, 조금씩 오현석의 상처 치료를 방해하고 있는 마력을 뽑아내기 시작했다. 분무기로 물을 뿌려 사탕을 녹이려는 것과 비슷 할 정도로 깃들어 있는 마력을 뽑아내는게 힘들다.

서지현은 오현석의 상처에 깃든 마력을 뽑아내면서 혈압을 확인한 다음 작게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얼마나 피를 흘렸는지 알 길이 없어. 그래도 다행이네."

능력치가 좋아서 그런걸까. 분명히 피를 많이 흘렸을텐데 용케 저혈량성 쇼크는 어떻게든 피해간 모양이다. 증상이 나타나고 있지는 않다.

조치만 제대로 취하고, 상처의 회복을 막고 있는 마력만 다 끌어낸다면 충분히 나아질 것이다. 서지현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니었다. 마력을 뽑아내는 와중에 서지현은 몇 번 헛구역질을 하면서 입에서 피를 흘렸다.

해가 저물었고, 다시 떠올랐다.

서지현은 상점에서 포션을 구매해서 하나 마시고, 다른 하나는 오현석을 먹였다.

다시 저물고, 다시 떠오른다. 서지현은 이틀 째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해서 상처 안에 잔류하는 마력을 뽑아내는 중이었다.

긴 시간에 걸쳐 상당량의 마력을 뽑아내는데 성공했고, 오현석의 몸은 거기에 반응해서 서서히 상태가 나아지고 있었다. 혈색은 어느정도 돌아왔다.

마침내 삼일째의 새벽 오현석의 몸 안에 남아있던 마력이 모두 사라지는데 성공했다. 심각하기 짝이 없던 상처에는 서서히 새 살이 차오르는게 보인다.

"다 했다."

입에서 내뱉은 말 한 마디가 방아쇠가 되어, 견디기 힘들 정도의 피로감이 서지현을 덮치기 시작한다. 사실, 서지현의 몸 상태도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물약을 먹어서 더 이상 피를 토하는 일은 없었지만, 물약이 회복시켜주는 건 몸에 난 상처지 정신의 피로감이 아니었으니까.

그녀의 피로를 붙들고 있었던 두려움과 걱정이라는 족쇄가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피로가 온 몸을 날뛰기 시작한다.

"으.. 윽..."

서지현은 멍하니 그걸 바라보다가 신음소리와 함께 그대로 퍽 하고 오현석이 누워있는 침대에 머리를 처박았다.

오현석은 나을 것이다. 가능하면 눈을 뜨는 모습까지 지켜보고 싶지만, 더 이상 정신줄을 붙들고 있기가 힘들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런 결론을 내렸다.

이내, 얼굴을 침대에 처박은 서지현에게서 코를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

눈을 떠보니 양호실 비슷해 보이는 공간에 엎드려 있었고, 고개를 돌려보니 서지현이 시트에 머리를 박은 채 코를 골고 있다. 서지현은 무사한 모양이었고, 어떻게든 나도 무사히 돌아오는데 성공한 모양이다.

"... 아이고."

일어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누가 등짝에다가 쇠파이프라도 쑤셔넣은 것 같은 통증이 달린다.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엎드린 채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크어어억, 켁..."

코를 고는게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거 같은데. 저 정도의 코골이면 이미 걱정해야 하는 수준이 아닐까? 그래도 코골이를 하고 있다는 건 최소한, 숨은 쉬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니까. 나는 허리에서 밀려오는 고통을 참고 억지로 서지현을 침대로 끌어올렸다.

내 손에 끌려서 침대 위로 올라오면서도, 서지현은 잠에서 일어날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난 도대체 얼마나 누워있었던거야."

대답해 줄 사람이 저렇게 격렬하게 자고 있으니 꺠워서 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흐어억..."

나는 숨을 확 들이키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양호실에서 같은 침대를 쓰고 있던 여자가 나를 끌어안았다. 평상시면 저런 소리를 내지는 않겠지만 내가 지금 허리 상태가 매우 좋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엄청 심하게 다쳤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여기에서 조금만 더 세게 끌어았았으면 나 고통으로 쇼크사하지 않았을까. 그래도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가만히 통증 속에 의식을 유지하던 나는.

"끄어어어..."

서지현이 등짝에 얼굴을 비비면서 지옥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신음소리를 흘려야 했다. 그리고, 격렬하게 온 몸으로 달려들던 고통이 가시고, 욱신거리는 통증만이 등에 잔류한다.

"저기, 미안해요. 괜찮아요?"

서지현이 풀린 눈으로 허둥지둥 몸을 움직인다.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때 사람들이 보일 법한 전형적인 움직임이다.

"지현아, 괜찮아."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나를 바라보고 있다가 울기 시작했다. 눈과 코가 함께 울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서지현의 얼굴 중에서는 가장 추하면서, 또한 가장 가슴이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의 가장 훌륭한 표본이다.

서지현은 뭐라고 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내 귀에 들리는 건 최소한 말은 아니었다.

"고생했어."

서지현이 나를 끌어안고 울려고 하다가 손을 멈추고는 침대 시트로 얼굴을 훔치고는 말했다.

"무사해서 다행이네요."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나서 내 등의 붕대를 한 참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붕대를 풀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지났어?"

서지현이 내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제가 기억하는 건 3일까지네요. 그 뒤에 기절해서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런가. 어쨌든 나는 최소한 3일은 누워있었다는 거네. 설마 서지현이 포션을 먹이거나 바르지 않았을리는 없을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3일이나 지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면.

"와, 진짜 죽을 뻔했구나."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우리 정말로 죽을뻔했어. 그 퍼레이드, 아무리 랜드마크라고 하지만 너무한데요."

그 점에 대해서는 내가 서지현에게 해줄 말이 있을 것 같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