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환장의 나라로 오세요
교실에 짐을 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김용천이 교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내 말에 김용천이 대답했다.
"뭐, 혹시 필요한게 있나 싶어서."
서지현이 김용천의 말에 픽 웃고는 대답했다.
"어차피 물자는 부족하잖아요. 지붕 있는 곳에서 잘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해요."
서지현의 말에 김용천이 뒷머리를 긁고는 대답했다.
"그건 그렇지."
녀석에게서 시선을 치워 창 밖을 바라보던 나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사람들이 운동을 하고 있는 모양인데."
철봉을 하는 사람도 보이고, 학교 운동장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달리는 사람들도 보인다. 공통점은, 전반적으로 다들 몸의 균형이 잘 잡혀있다는 점이다.
내 물음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할 줄 아는게 운동 말고 뭐가 있겠나. 여태동안 체육관 관장으로 있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줄 거라고 해봐야 운동 정도가 고작이지. 그래서 모여있는 생존자들에게 운동하는 법을 좀 알려줬는데, 모두 곧잘 따라하더군."
서지현이 창가에 기댄채 밖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안전지대 밖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굉장한 차이가 보이는군요."
저 말에는 나도 동감한다. 안전지대 밖에 있는 녀석들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미쉐린 타이어 마스코트가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이 세상에 강림한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살이 투실투실했는데, 안전 지대 안에 있는 사람들은 딱 봐도 몸이 건강해 보인다.
"먹는거라고는 영양바와 물 말고는 없으니까. 환경이 좋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스트레스가 쌓이기 마련이지. 나는 사람들에게 쌓여있을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어주는 것 뿐이야."
하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꽤 힘든 상황일 것이다.
"우리도 해야 하는 건가?"
내 말에 김용천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강요하지는 않아. 다들 자발적으로 하는 거지. 혹시 생각 있으면 언제라도 나를 찾아오게. 이래뵈도 꽤 경력이 있는 관장이야. 운동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최선을 다해서 알려주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이건?"
"근무표 같은 거야. 이해해주게. 물론 그 과자 괴물들이 안전지대 안으로 침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가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과자를 먹은 다음 안전지대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거든."
나는 그 근무표를 확인하면서 말했다.
"그래, 그러고 보니 들어오기 전에 바리케이트 앞에서 뭔 쿠키 하나를 던져 줬었지."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는 길에 과자를 먹은 녀석들은 그 쿠키를 먹지 않을 수 없거든. 경계를 하는 사람들의 주 업무는 그거야."
오는 길에 과자를 주워먹은 녀석들을 색출하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나?"
내 말에 김용천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과자들을 먹다가 안 먹으면 사람이 폭력적으로 바뀌어. 처음에는 작은 일에도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하다가...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고 들지. 내 말을 믿어, 그건 중독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지경이야."
뭐냐 그게. 먹다가 안 먹으면 현기증이 나기라도 하는 건가.
"안 그래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생존자들이 적은데, 사상자가 발생하도록 둘 수는 없지. 피해가 엄청날거야. 우리가 소지하고 있는 과자의 총량은 이미 파악해두었으니, 누가 먹거나 했다면 바로 알게 될 거야."
김용천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슬쩍 떠보듯이 한 마디를 던졌다.
"그래서, 과자를 먹은 사람이 있으면 그 녀석은 죽이는 건가?"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저었다.
"같은 사람끼리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그냥... 격리를 할 뿐이지."
격리라. 나는 녀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별로 현명한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문제의 씨앗이 뭔지 모른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안다면 뿌리를 뽑아야 한다. 내 말에 김용천이 나를 보고 있다가 말했다.
"글쎄... 나는 그렇게까지 모진 사람이 되지는 못하는 것 같아."
김용천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잠깐 있다가 근무표를 내려놓고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김용천이 나간 문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입을 열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착실한 아저씨네요."
서지현의 말에 동감한다.
"오래 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말에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우리 알 바는 아니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것보다 중요한 건 다른 거다.
"일단, 배낭 안에 있는 식량은 꺼내 먹을 수 없겠어."
다른 사람들 전부 맛대가리 없는 영양바를 씹고 있는데 우리만 따로 밥 지어서 반찬이랑 냠냠하고 있으면 아마 다른 녀석들 눈깔이 돌아가버릴거다. 영양바의 맛은 충격적으로 별로였지만, 맛있는 거 좀 먹어보겠답시고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끌 수는 없지.
자기들은 벽돌 비슷한 걸 씹어먹고 있는데 우리가 막 쌀밥 지어서 장아찌 같은거 곁들여 먹고 있으면 백프로 연장 챙겨들고 찾아와서 귀찮게 굴 거다.
"물론이죠. 그리고, 영양바를 오래 먹기는 싫으니 최대한 빨리 랜드 클리어를 위한 조사도 시작해야겠네요."
그래야겠지.
"김용천이 랜드 마크에 대해서 조사를 해놓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녀석도 랜드 클리어는 꽤 관심이 있어보였으니까. 아예 아무 것도 모르지는 않을거다. 문제는, 녀석이 얼마나 착실하게 자료를 종합했느냐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책상 위에 올라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가서 좀 보여달라고 하면 보여줄 것 같던데요."
그건 그럴 것 같다. 서지현은 슥 아래에 놓여있는 근무표를 살펴보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관련 일을 하겠다고 하면 쓸데없는 근무에서도 해방 될 수 있을테고."
아까부터 뭔가 말에 가시가 뾰족하게 돋을락 말락 하나 싶었는데.
"근무가 마음에 들지 않나봐?"
내 말에 서지현이 곧장 근무표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거 봐요. 당신이 월요일과 수요일에 밤 11시에 나가서 새벽 2시까지 있고, 내가 화요일과 목요일에 같은 시간에 근무를 나가잖아요."
그래, 근무표에 따르면 그런 식으로 근무를 서게 되겠지. 하지만 그게 서지현이 근무에 불만을 가진 것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 표정을 보던 서지현이 한숨을 푹 쉬고 말했다.
"이렇게 근무를 나가면 우리는 언제 같이 잠을 자는데요? 일주일에 3일만 같이 잠자리에 누울 수 있다니. 무슨 견우와 직녀도 아니고.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눈치가. 보면 모르나?"
그 뭐라고 반응해야 할 지 모를 불만을 표출하는 서지현을 보고 있던 나는 한숨을 쉬고 나서 말했다.
"어쨌든, 김용천에게는 가서 의사를 전달해볼게."
"다녀오세요. 저는 이 교실을 조금 더... 사람이 잘 만한 곳으로 만들어 볼게요."
사람이 잘 만한 곳이라.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잠자리를 따지는 타입은 아니지 않았어?"
"먹는게 부실하면 다른 곳에서라도 즐거움을 찾아야 하잖아요? 기대하고 다녀오세요."
교실을 나온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김용천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는데."
녀석은 뭔가 서류로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근육질 몸에 걸맞지 않게 노트와 볼펜을 든 모습은 꽤나 어색해 보인다.
"운동 때문은 아니고."
내 말에 김용천이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뭐 때문에 찾아온걸까."
녀석의 말에 나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길이었고, 서울로 가기 위해서는 용인을 벗어나야 하거든."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다들 목표가 있기 마련이지. 어쨌든 그 이야기를 들어서 기쁜데. 새로 들어온 생존자들이 랜드 클리어에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야."
상냥하기도 해라.
"랜드 클리어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면 이런 저런 조사를 많이 진행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김용천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꾸준히 진행 중이기는 한데..."
딱 봐도 표정이 석연치가 않다.
"생각만큼 수월하진 않았던 모양이네."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어. 모두가 하나같이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을수는 없는 법이지 않겠나."
나는 그 말에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래, 이 안에 짱박혀 있으면 최소한 주변에 먹을거리는 영양바 말고는 없겠지만..."
밖에 나가면 온 천지에 깔린게 먹을 것 뿐이다. 안에 있으면 최소한 눈 앞에서 유혹에 시달리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나가게 되면 그 순간 온 천지에 깔린게 유혹이다.
"내보낸 사람들 중 과자를 먹고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나보지."
"그래, 그 때문에 희생이 좀 있었지. 하지만 아무 성과도 없었던 건 아니다."
김용천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머리를 긁었다.
"일단 지역을 상당히 좁히는데는 성공했어.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나가서 이루어낸 성과야."
그는 그렇게 말하고 벽에 붙어있는 지도를 툭 하고 쳤다.
"놀이동산."
나는 그 말에 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용인 하면 놀이동산이 유명하지. 어떻게 또 인연이 닿아서 거기를 가게 생겼군 그래.
"놀이동산이라. 그걸로는 범위가 조금 애매한데."
좁은다고 하면 좁은데, 넓다고 하면 또 넓다.
용인의 놀이동산은 그냥 놀이동산이 아니다. 크기도 엄청 거대하고, 안에는 미술관이나 수영장, 동물원은 물론이고 호텔에 팬션 같은 것까지 있다. 과장 조금 보태서 그 지역만 통째로 뭐 바티칸 같은 도시 국가로 독립시켜도 크게 문제가 없을 정도로.
"그래, 구체적으로 놀아동산의 어디에 랜드마크가 자리잡고 있는지는 파악하는데 실패했어. 거기부터 일이 어려워지기 시작했지."
놀이동산이라. 나는 잠깐 지도를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그 놀이동산, 우리가 한 번 가보고 싶은데."
내 말에 김용천이 잠깐 내 눈을 바라보다 대답을 돌려주었다.
"안전구역에 머무르고 있던 녀석들 중 꽤 실력이 있다고 자부하던 자들이 놀이동산에 가서 돌아오지 못했어. 다들 주변에 접근하는 정도가 한계였고, 안에 들어간 사람들 중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지."
"그래서?"
김용천이 곧장 대답을 돌려주었다.
"실력이 증명되지 않은 사람을 함부로 보낼 수는 없다는 뜻이야."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내고 벽에 몸을 기대었다.
"그냥 속는 셈 치고 한 번 보내보지 그래."
"아니, 누군가 여기를 떠나 놀이동산으로 향하게 되면 남아있는 생존자들이 기대를 하게 될거야."
김용천은 말을 하고 나서 한숨을 깊게 쉬고 바닥을 바라봤다.-
"그리고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지. 나는, 그리고 여기에 남은 생존자들은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떠난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되는 걸 너무 많이 봤어. 그 놀이동산으로 간 사람들 숫자가 벌써 30명 언저리야."
말을 좀 돌리시는데.
"본론으로 바로 들어갔으면 하는 작은 바램이 있어."
내 말에 김용천이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믿고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는 이야기네. 우리가 놀이동산으로 가도 괜찮다는 걸 증명하라는 거구만."
간단하게 말하면 실력평가라는 거다.
물론, 냉정하게 생각해본다면 굳이 김용천의 장단에 맞춰줘야 할 이유는 없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냥 랜드마크 조사를 하고 싶다고 결정을 내린다면 김용천의 판단과 통제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지.
하지만, 그런식으로 할 거라면 애초에 바리케이트를 지키는 녀석이 쿠키를 던져 줬을 때부터 지시에 따르지 않고 그냥 바리케이트를 날려버리고 안으로 들어가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거다.
나는 어지간하면 한 조직을 통제하고 있는 대장의 역할을 꽤 중시해주는 편이다. 김아은 떄도 그랬고, 우석진 떄도 그랬지. 김용천이라고 갑자기 태도가 달라질 이유는 없다.
"그래서, 방법은?"
내 표정을 보고 있던 김용천이 입을 열었다.
"현재까지 용인에 머무르고 있는 생존자들 중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사람은 나였지."
"그렇군. 하긴, 그 근육이 닭가슴살 먹고 바벨만 들어서 생겼다고 보기는 어려웠어."
직업이 종합격투기 체육관 관장씩이나 되는 사람인데, 설마 싸움을 못하려고. 내 말에 녀석이 희미하게 웃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대련을 한 번 해봐야겠다. 실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야겠어. 만약에 내가 판단했을 때 두 사람이 놀이동산까지 가기 힘들다고 판단되면, 보내줄 수는 없어."
"고민할 거 없는 제안이군."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 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