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사이비
서지현은 말을 마치고 뒤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제 저 사람들에게 받기로 한 것들을 받죠."
"군말없이 곱게 주겠지?"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우리가 저질러 놓은 일을 봤는데 이제와서 다른 말 하면, 저 친구들은 바보겠죠."
그건 그렇지. 우리의 시선을 받은 우석진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공책에다가 우리가 아는 내용을 적기 시작하지. 완성되면 건네주겠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거야. 농사에 쓸 만한 종자는 미리 준비를 해두지. 이제 좀 편히 자겠군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대충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은 나는 녀석을 슥 보고는 말했다.
"나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
내 말에 우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는 일이 뭔지는 알아.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테니 걱정하지 말게. 방금 전에 자네들이 벌인 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장수하고 싶다면 상대를 잘 가려야 하는 법이지."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손을 내밀었고, 나는 그 손을 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최대한 빨리 받아 볼 수 있으면 좋겠어. 너도 우리가 여기에 눌러 앉아서 밥을 축내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을테니."
내 말에 우석진이 으하핫, 하는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도 자네들이 밥을 축낸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야. 당신들이 없었으면 우리가 어떤 끝을 맞이하게 되었을지 모르지는 않아."
서지현이 나와 우석진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말했다.
"죽은 건 최 바오로라는 또라이 뿐이에요. 마음 같아서는 추적해서 전부 쓸어내고 싶었지만 여력이 되지 않아서 실패했죠."
서지현의 말에 우석진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최 바오로가 죽었다고 이천에 머무르던 사람들이 바로 자기들의 공동체를 해산하지는 않을거야."
기왕에 모인 사람들이다. 자기 교주들이 선택받은 선지자가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서로 악수하고 제 갈 길 알아서 찾아가지는 않을 거다. 이렇든 저렇든 이천시는 녀석들의 기반이고, 지금 도망친 녀석들은 당연히 이천시에서 몸을 추스리고 있을거다.
"도망쳤다고 하지만 여전히 숫자는 여기에 모인 사람들보다 많아. 모르지는 않을텐데."
내 말에 우석진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 하지만 녀석들도 바로 제정신을 차리기는 힘들겠지. 우리 쪽에서 어느정도 정비가 끝나고 나면, 이천으로 역습을 들어갈 생각이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최미진이 곧바로 말했다.
"이천은 쌀농사 잘 되기로 유명한 곳이죠. 굳이 그 사이비 종교의 잔당들이 아니더라도 가서 자리를 잡으면 나쁠게 없어요."
방어를 성공한 다음 역습을 준비하는 건 정석 중에 정석이다.
"우리는 서울로 가는 길이다. 뭐, 여기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의 선택지는 많지만."
내 말에 우석진과 최미진이 나를 바라봤다.
"기왕에 이천시를 잡고 있던 사이비 종교 교주의 멱줄을 따놓은 김이니. 이천을 통과해서 가는 것도 선택지 중 하나였어. 댁들이 이천에 자리잡을 생각이라면, 어떻게 좀 도와줄까?"
어차피 우리도 지나가야 하는 길이다. 내 말에 우석진이 잠깐 있다가 대답했다.
"그래주면 고맙겠는데."
좋아, 나는 벽에 기댄채로 우석진을 보며 웃었다.
"우리에게 주기로 한 것을 이 골프장에서 받고 나면 바로 이천으로 함께 향하지."
도움을 받고 싶다면 책의 완성을 서둘러라. 나는 간접적으로 그렇게 압박을 주었고, 우석진도 그 말을 알아들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녀석들이 이천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거야?"
내 말에 우석진이 잠깐 눈썹을 꿈틀거리며 고심하다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하고 쳤다.
"그래, 녀석들이 처음에 건네준 어설픈 팜플렛에 관련 내용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렇게 중얼거린 우석진이 곧바로 사람을 시켜서 그 팜플렛을 가져오게 했다. 잠시 뒤에 나는 팜플렛을 받아 볼 수 있었다.
"어설픈 팜플렛이라."
어설픈 정도가 아닌데. 그냥 알록달록하게 칠해놓은 유치한 종이 조각이잖아.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넘겨받은 종이 쪼가리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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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물 동산에 들어온 축복받은 어린양들의 성실하고 경건한 하루 일과
05:30 기상 및 세면
06:00 아침 기도회
07:00 조식
07:15 일과 시작
11:00 오전 기도
15:00 오후 기도
18:00 일과 종료 및 석식
18:15 선지자님의 복음 경청
19:30 찬양집회
21:30 기도회 및 신앙고백
00:00 개인 정비 및 취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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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일정봐라. 나는 그걸 살펴보다가 시선을 옆으로 돌려 우진석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기를 쓰고 샘물 동산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한 이유가 있었군 그래?"
뭐냐 이 경건하기 짝이 없는 하루 일과는. 이게 지금 사람이 살라고 짜놓은 일정이냐. 기도하다가 죽은 사람이 생겨도 놀라울 일이 아니겠는걸. 누가 보면 좌우명이 기도하다 뒤져라. 같은 건 줄 알겠다.
게다가 이 녀석들은 또 왜 하루에 두 끼를 먹어. 안동시에서도 그러더니만 요즘 한국 노동 트렌드가 하루에 두 끼 먹는건가. 서지현이 옆에서 고개를 내밀로 내가 들고 있는 팜플렛을 확인한 다음 쓴웃음을 지었다.
"이건 사람보고 들어오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들어오지 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말이다. 카레 전문점을 차리고 가게 이름을 설사라고 짓는 격이다. 뭐 그렇게 바라는게 많아서 하루에 기도를 네 번이나 하는거야. 복음 경청인지 뭔지까지 포함하면 다섯번이네.
"하루에 다섯번 기도하는 종교는 이슬람교 아니었나?"
내 말에 서지현이 하하, 하고 찬바람 나는 웃음을 터뜨린 다음에 대답했다.
"사이비 종교의 뿌리를 따지다니, 길고양이 족보 따지는 것 만큼 의미 없는 일이네요."
그건 그렇지. 내 기억에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사이비 종교는 부처님이 공자님이랑 손 잡고 무당집에 놀러가는 느낌의 잡탕찌개였으니까.
팜플레 안에는 위치 안내가 되어있었다.
"구 이천 시청 위치에 있는 성전이라."
원래 여기가 안전지대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의 뒤진 교주 최 바오로는 미쳐가지고 성전을 만든 답시고 멀쩡히 잘 있는 이천 시청을 뜯어 고친 모양이고.
"협력 공동체에 소속된 사람들은 도봉리 일대에 머무르고 있던 모양이네요."
서지현의 말에 최미진이 아는 눈치로 대답했다.
"아, 도봉리라고 하면 아파트 단지 하나를 제외하고는 주변이 모두 논밭일 거에요. 그 협업 공동체라고 하는 곳에 소속된 사람들을 시켜서 농사를 짓게 한 모양이네요."
뭐, 그래봤자 서지현이 말한 것처럼 보통 유통되는 종자로 농사를 지으면 한 철 농사 지어서 수확한 곡물은 다음 해에 농사에 쓰지 못하고 전부 먹어치워야 하겠지만.
지도를 살펴보던 나는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녀석들이 한 곳에 집결한다면 아무래도 이천시청을 중심으로 뭉치겠지."
"역습을 예상하지 못하는 건 아닐테니까요. 도봉리 일대가 최미진 씨가 말한 것처럼 사용되고 있었다면 제대로 요새화가 되었을리는 없어요."
어차피 대부분 광신도니 딱히 도망칠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한다고 해도 주변에 널려 있는 광신도가 한 둘이 아니니까. 서로 감시하다가 그대로 고발 해버렸겠지. 우석진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뭔가를 생각하나 싶더니 입을 열었다.
"서울로 간다고 했었지. 혹시 서울에 계속 머무를 생각인가?"
"그건 왜 물어보는 걸까. 대답해주자면,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서울로 가는 거기 떄문에 굳이 거기에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는 없어."
내 말에 우석진이 대답했다.
"그렇다면 볼 일을 마치고 나서 이천시 인근에 자리를 잡는 건 어떻겠나. 피차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에 흠, 하는 소리를 냈다. 글쎄다, 그게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맞으려나 모르겠네. 일단 우석진과 함꼐 하는 사람들이 얻게 될 것은 분명하다. 나와 서지현은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유사시에 도움을 받겠다는 계산이겠지.
내가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자 옆에서 최미진이 입을 열었다.
"농사에는 변수가 엄청 많아요. 토질도 중요하고, 날씨도 중요하고...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벽에 부딪치는 일이 많죠. 물론 저도 최대한 성실하게 아는 내용을 적어 드릴 생각이지만. 단순히 책에 적힌 내용만 가지고는 충분한 수확을 기대하기 힘들 수 있어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긴 다음에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이천과 가까이 자리잡을 생각은 없어요. 서울에서 일을 마친 다음에 자리를 잡는다면 용인 정도를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그 말에 서지현을 바라봤다.
"괜찮지 않아요? 그 뭐냐, 가깝기도 하고."
서지현이 굳이 용인을 언급한 이유는 짐작이 된다. 거기에 내 어머니와 누나가 쉬고 있으니, 근처에 자리를 잡는 게 좋겠다고 판단을 한 모양이지. 내 입장에서는 서지현의 생각이 싫을 리 없다. 게다가 이천시와 용인 사이의 거리는 길게 잡아도 20km 정도니까. 날을 잡아서 오간다면 하루에서 이틀 정도면 이천과 용인을 오가면서 해야 할 일을 마칠 수 있다.
"생각해 볼 만 하네."
내 말에 우석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었다.
"잘 생각해보라고. 물론 우리도 도움을 많이 받게 되겠지만, 두 사람 입장에서도 그렇게 나쁜 일이 아니야. 나와 내 아내는 자네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더 잡지식이 많다고. 서로 도움을 주게 된다면, 자네들에게도 분명히 큰 이득이 있어."
"알았어, 긍정적으로 생각해볼테니 영업 거기까지만 해둬."
그렇게 대화를 마친 다음, 나와 서지현은 최 바오로의 시체 쪽으로 다가갔다.
"창이 부러졌네요. 아까워라. 뭐, 주인 하나만 선택해서 평생 충성을 바치는 창이었나봐요."
최 바오로의 시체 옆에 박혀 있는 창은 허리가 뚝 부러져 있었다.
"그렇게 아까워 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우리는 이미 손에 많이 익숙해진 무기를 들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창의 성능은 꽤 훌륭했고, 부러지지 않았다면 유용하게 사용 할 수 있었겠지만 없다고 해서 우리가 땅을 치고 후회할 만한 물건은 또 아니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꼭 창이 아니라고 해도 명색이 사이비 교주니 이것 저것 챙겨놓고 있는 물건들이 좀 있을거다.
슬쩍 우석진 쪽을 돌아보니, 최 바오로의 시체에서 나오는 물건에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이 녀석 잡는 와중에 우석진의 도움을 받은 기억은 없으니까. 오히려 녀석이 날린 화살이 나를 노리고 다시 돌아오는 바람에 곤란하기만 했었지.
우리는 최 바오로의 몸을 뒤지기 시작했다.
"참나."
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물건을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선지자 씩이나 되는 놈께서 몸에 콘돔은 왜 지니고 있는거야. 비상시에 물통 대신으로 쓸 생각이었던 건가.
"우와, 이거 돌기가 달려있다고 하는데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 서지현이 크흠, 하는 소리를 내고 손을 휘휘 저었다.
"그냥 그렇다고요."
다시 우리는 녀석의 소지품 중에서 쓸만한 것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녀석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시커먼 보석이 박힌 목걸이가 눈에 밟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