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골프장의 원시인들
녀석에 대한 경험담이 필요하다. 밥상이 치워지고, 마른 오징어나 땅콩 같은 것과 함께 우리는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최 바오로라는 녀석과 싸워 봤다고 했지.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 것 같았냐?"
내 말에 우석진이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염동력이라고 해야 하나? 싸움에 들어갔을 때 우리가 날린 화살이 모두 녀석의 앞에서 멈춘 다음, 다시 우리 발 앞으로 날아와 박혔어."
나는 그 말에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럼 어깨 대장간에서 단검을 뽑아내서 던지는 건 포기해야 할 것 같은데. 우석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었다.
"그 뿐이 아니야. 갑자기 뭔가가 우리의 어깨를 꽉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릎을 꿇어야 했지. 나는 억지로 무게를 이겨내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는데, 녀석이 손을 휘젓자 그대로 내 몸이 공중에 붕 떠서 날아가더군."
말을 마친 우석진이 잔을 탁 내려놓고는 머리를 긁었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어. 공격이 보이지 않으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무기 같은 건 따로 소지하고 있지 않았고?"
내 말에 우석진이 대답했다.
"글쎄... 무기를 사용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아마, 골프장 친구들이 거기까지 녀석을 몰아붙이지 못했던 거겠지.
"다음은, 미친 정도인데. 어때 보였어?"
사이비 종교 교주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 교주 행세를 하면서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하는 욕심쟁이와, 진짜로 헤까닥 돌아버려서 자기가 진짜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믿는 또라이. 물론 전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결국 사이비 종교가 원하는 것은 신도들의 신앙이 아니라 돈이다.
이 세상에 자기가 예수의 환생이라느니, 다시 돌아온 미륵이라느니 하는 사이비 교주들은 한도 끝도 없이 많았지만 실제로 예수처럼 살거나, 부처처럼 생활하는 녀석들은 하나도 없었던 것도 녀석들이 원하는게 돈이었기 떄문이다.
"그냥... 단단히 미친 놈이야. 녀석을 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게 될 걸세. 어차피 조만간 찾아올 생각인 것 같으니, 그때 볼 수 있겠군."
방문을 기대하게 만드는 대답이 돌아왔다. 보면 알 거라니. 그 사제 복장을 하고 있는 녀석들이 돌아갈 떄 한 말을 봐서는 내일 당장이라도 방문할 기세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옥장판 같은 걸 들고 오면 귀엽기라도 할 텐데요."
다단계 상인처럼 말이지?
서지현은 그런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두어야 할 것들은 다 들은 것 같다. 술자리를 마치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일어난 나는 해야 하는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남은 포인트는 6580pt.
이걸로 뭘 해야 할까. 상점의 목록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스킬 두 개를 더 배우면 반사신경 카테고리가 한 단계 더 올라가게 된다.
[급발진 : 육체에 무리를 주지 않고 최고 속력에 달하기 위해서는 원래 일정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갑작스럽지만 확실하게 상대를 제압할 수 있도록, 당신의 몸은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육체가 낼 수 있는 최고 속력에 도달하는 시간이 25% 감소합니다. 1500pt]
[야생감각 : 맹수가 순간적으로 함정을 피하는 건, 덫의 작동원리를 알기 떄문이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위험하다는 걸... 그냥, 느꼈기 떄문이지요. 알 수 없는 위험을 피하는데 이해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마법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당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마법이 발동하기 바로 직전, 당신은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피하는 건 뭐, 재량껏 하세요. 1200pt]
두 가지 스킬을 추가로 구매하자, 2700pt가 날아갔다. 남은 포인트는 3880pt.
[반사신경 카테고리가 4단계로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배운 스킬을 강화할 수 있는 순간이 다가왔다.
[프릭션 컨트롤과 점프 스케어의 마스터를 선택 할 수 있습니다.]
그 문자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두 가지 스킬을 확인해보았다.
"이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머리를 긁었다. 이게 뭐야. 나는 눈 앞에 떠오른 문자들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프릭션 컨트롤 - 에어 그래퍼 : 손에 닿는 마찰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공기를 잡을 수 있게 됩니다. 공기를 붙잡아, 하늘을 납시다! 선택하면 프릭션 컨트롤 - 제로는 선택 할 수 없게 됩니다.]
이해하기는 참 쉬운 직관적인 강화다. 손으로 공기를 붙잡고 뛰어오를 수 있다니. 이 마스터를 선택하면 문자 그대로 날아다니게 생겼군.
[프릭션 컨트롤 - 제로 : 전신의 마찰을 제로에 가깝게 낮춥니다. 항력이 더는 당신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유체 동역학 족구하라지! 선택하면 프릭션 컨트롤 - 에어 그래퍼는 선택할 수 없게 됩니다.]
이건 조금 이해에 시간이 필요했지만, 어떻게든 이해했다.
설명이 단순해서 그렇지 에어 그래퍼 이상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기저항이 없어진다는 건 그 만큼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공기 저항이 없어지는게 아니라 항력이 없어지는 거다. 물 속을 헤엄칠 일이 생긴다고 해도 느려지는 일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바람이 몸을 스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테니 소음 없이 초고속으로 이동할 수 있을거다.
[점프 스케어 - 무의식 : 당신이 위협을 인지하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독극물? 손에 몰래 숨겨둔 무기? 어쨌든 무슨무슨 이유로 점프 스케어가 발동됩니다. 갑자기 세상이 느려지만 일단 몸을 피하세요!]
이건 점프 스케어가 위기 경보기 역할까지 겸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눈치채지 못한 위협을 점프 스케어의 발동으로 알아낼 수 있다면 몰래 다가오는 위험을 피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다. 좋기는 한데...
[점프 스케어 - 상대성이론 : 점프 스케어가 발동한 상황에서 당신의 몸은 느려지지 않고, 정상적으로 움직입니다. 다만, 5초 같은 1초가 되는 대신, 2.5초 같은 0.5초가 됩니다. 당신에게 기어오는 적들의 공격을 하품 한 번 하고 슥 피해주는 겁니다!]
... 아무리 그래도 이거만큼 좋을까? 발동 시간이 절반으로 주는 건 가슴이 아프지만. 다섯배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 혼자 멀쩡히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사실 상 점프 스케어가 발동되면 내 움직임이 다섯 배 빨라진다는 소리다. 지금도 점프 스케어가 발동되면 타이밍에 맞춰서 날아오는 화살이나 단검 같은 걸 잡을 수 있을 정도인데.
그 느려진 세상 속에서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날아오는 칼을 잡아서 주머니에 넣어놓은 사과도 깎아 먹을 수 있을거다.
역시 하나만 줄창 밀어붙이는게 정답이었던 것 같네. 반사신경 카테고리가 더 올라가게 되면 후발선타나 짐승의 시간 같은 경우에도 마스터를 고를 수 있겠지.
"문제는 값인데."
강화에 3000pt를 내놓으라고 한다. 완전히 강도나 다름 없잖아. 지금 가지고 잇는 포인트로는 점프 스케어나 프릭션 컨트롤 둘 중 하나만 마스터를 고를 수 있다.
일단은 상대성이론이겠지. 다 좋아보이지만 확 입맛을 당기게 하는 녀석은 이거 말고는 없었다. 무조건 점프 스케어가 발동하는 것도 좋고, 하늘을 나는 것도 좋고, 항력 무효화도 좋고... 하여튼 다 좋긴 하지만 가장 직관적으로 유용해 보이는 건 상대성 이론이었다.
나는 곧바로 포인트를 지불해서 상대성 이론을 선택했다.
"귀신 들렸어요?"
서지현이, 옆에서 눈을 감은채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귀신들렸냐니.
"아니, 상점 확인 중이었어."
"아하."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내 팔을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저도 까먹고 있었네요."
원주시에서 경험했던 일들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팔뚝에 말랑한 감촉이 닿자 나는 잠깐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무 가깝지 않아?"
"그럴리가요, 아직 멀어요. 더 가까워 질 수도 있는데."
서지현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내 팔에 몸을 더 바짝 붙였다. 희미하게 서지현의 체향이 내 코를 간지럽힌다.
"봐요, 아까보다 더 가까워졌지. 사실 이거보다 더 가까워질 수도 있어요. 내기해볼래요?"
나는 잠깐 그대로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너도 지금 상점 이용해두지 그래?"
내 말에 서지현이 입을 내 귓가에 가져가서 속삭였다.
"저는 이미 이용했어요. 그러니까 말 돌리지 말고..."
이불 아래에서 서지현의 손이 꿈지럭거리는게 느껴진다.
"지현아, 어젯 밤에도 했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대답했다.
"어제 밥 먹었으니 오늘은 굶을 거에요? 방금 전에 숨 쉬었는데 왜 또 숨을 쉬고 있어요?"
"아무리 그래도, 그런 일이랑 이건 좀 다르지 않을까."
숨은 안 쉬면 죽고, 밥도 안 먹으면 죽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서지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키스를 했다. 서로 혀가 오가고, 키스를 끝내자 서지현이 혀로 내 입술을 핥고 나서 말했다.
"그럼, 그만할까요?"
나는 그 말에 서지현을 끌어안고 말했다.
"이제와서, 안될 말을 하네. 니가 자극한 거니,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마."
"그럴 일 없을걸요."
그런 대화가 이어지며 이불 안에서 서로의 손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혀와 혀가 서로를 맞이해 부지런히 서로를 빨고 핥기 시작한다.
나는 커지고, 서지현은 젖기 시작하고. 그렇게 참 즐거운 시간이 이어지던 와중.
누군가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린다.
"씨팔."
서지현의 표정이 구겨지고, 내 입에서는 욕이 나왔다. 방금 전의 분위기가 농담이었던 것처럼 싹 가셔 버린다. 누가 머리에 얼음물을 한 바가지 쏟아버린 기분이다.
나와 서지현은 서로를 끌어안고 하던 일을 멈추고, 동시에 천장을 마주보고 누워서 허탈한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뭐야. 어떤 막되먹은 자식이...
"두 사람, 지금 안에 있나?"
이 집 주인인 우석진의 목소리였다. 망할, 아무리 집주인이라도 그렇지. 우리가 무슨 월세 살며 집주인 눈치 보는 신혼 부부도 아니고! 나는 머리를 푹 숙인채로 잠깐 있다가 입을 열었다.
"없어, 미국갔어."
내 말에 밖에서 우석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봐, 농담할 상황 아니야."
나도 농담할 기분 아니야 이 자식아. 니가 다 망쳤어. 니가 다 망쳤다고. 문 너머의 목소리는 꽤 진지했기에, 도저히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네요."
서지현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불로 몸을 가린채 상체를 일으켰다. 여전히 그냥 알몸을 보여주는 건 부끄러운 모양이다. 나랑 서지현이 방구를 트는 날은 언제가 되어야 찾아올까. 지금 이 기세라면 그 전에 내가 늙어 죽을지도 모르겠는데.
심지어 어제 화장실 가서는 소변 보면서 세면대에 물까지 틀어놓았었으니까. 말 다했지 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다시금 우석진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 작은 목소리로 말햇다.
"아 망할, 그냥 다 죽이고 골프장 차지할까."
내 말에 서지현이 웃음을 흘렸다.
"저는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말인데. 대신 해줘서 고마워요."
나와 서지현은 급하게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아 뭐야, 새벽 댓바람부터 왜 남녀가 함께 자는 방문을 두들겨. 너는 매너도 없냐. 아내도 있는 걸 보면 남녀가 한 방에서 아침에 자다가 일어나면 어떤 흐름이 이어지게 될 지 모르는 것도 아닐텐데 왜 저러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