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골프장의 원시인들
우석진을 따라서 골프장으로 들어온 우리는 멍하니 클럽 하우스 주변을 구경하고 잇었다.
"어떤가? 첫 인상이 궁금한데."
첫인상이라. 나는 가감없이 솔직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캠프장 같은 느낌이네."
나무로 뼈대를 삼고 괴물들에게서 벗겨낸 가죽으로 지붕을 덮은 텐트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동물에게서 벗겨낸 가죽에서 피와 지방을 긁어내고, 잿물에 담그는 사람들도 보이고...
"저건 뭐에요?"
사람들이 초콜릿 바 같은 형태의 덩어리를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다. 우석진이 서지현이 가리킨 곳을 슥 보고는 대답했다.
"페미컨. 이전에 만드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만들던 보존식이야. 대충 6개월은 보존 할 수 있을 걸. 먹고 남은 고기 중 지방이 적은 건 페미컨으로 만들고, 지방질인 많은 건 훈제를 한 다음 병조림으로 만들고 있지. 피로는 선지를 만들거야."
"이야,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페미컨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한국에서 그 단어를 들어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내 말에 녀석이 우락부락한 두 팔을 꼰 채로 대답했다.
"다큐멘터리 감독. 저거랑 무두질 같은 건 이전에 아메리카 원주민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하면서 배운거야.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인생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나는 그 말에 허, 하는 소리를 내고 녀석을 바라봤다. 우락부락한 몸이 어디 공사판 노가다 십장 같은 느낌이었는데 다큐멘터리 감독이라고? 이건 또 의외네. 서지현도 마찬가지로 꽤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군.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려보니, 저 뒤쪽에 밭 같은게 보인다.
"농사도 짓나 본데?"
내 말에 우석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는 그쪽 관련 지식이 많아서. 감자나 고구마 같은 걸 키울 생각인 모양이더라고."
서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주워들은 말이긴 한데, 어차피 농작물을 키워봤자 다음 해에 또 수확을 기대하는 건 힘들다고 들었어요. 종자 개량 과정에서 공급 회사들이 잔꾀를 부려서, 수확한 이후 다시 곡물을 심으면 수확량이 빈약하기 그지 없다고..."
서지현의 말에 우석진이 어꺠를 으쓱했다.
"아내가 농사 짓는다고 해서 주변 농가에서 곡식을 좀 구해다 준다고 했더니 비슷한 말을 했지. 아내가 심는 건 따로 연구소 같은 곳에서 보관하고 있던 종자들이야. 문제 없다고 하더군. 예전에 살짝 빼돌려 두었다나."
서지현이 그 말에 입을 살짝 벌렸다.
"아내는 뭐 하던 사람이에요?"
"연구원. 몇 년 전에 국립농업과학원에서 종자 개량 관련된 일을 했었지. 일 그만두고 나오면서 종자를 좀 챙기고, 밭에 심어서 키워먹기 시작했는데 그게 벌써 5년 전 일이야."
뭐냐 이 복받은 사람들은? 세상이 망해도 잘 먹고 잘 살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고 하더니, 이 두 사람이 그런 부류인 모양이다. 남자는 고기 가지고 보존식량을 만들거나 무두질 하는 법을 아는 다큐멘터리 감독에, 여자는 농사를 지을 줄 알다니.
"자자, 그런 것 보다 우선 들어가서 말하자고."
우리는 녀석과 함께 클럽 하우스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것은 그럴듯하게 사제복 비슷한 걸 챙겨입은 남자 두 명이 30대 중반의 여성 앞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젠장."
우석진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얼굴을 팍 구겼다.
"당신들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 뿐이 아니지요.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 모두 기회를 얻었습니다. 다가오는 구원을 멀리 하지 마세요. 받아들이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시는 겁니다."
여자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분명히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요. 저희는 댁들에게 소속될 이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요.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서 사람을 귀찮게 구는 이유가 도대체...!"
사제복을 입은 남성들에게 성질을 내고 있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우석진을 보고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어이, 안 꺼지냐?'
우석진은 활에 화살을 먹인 채 녀석들을 노려봤다. 사제들은 우석진의 흉흉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눈썹 하나 깜박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형제님, 벌써 일주일 째 찾아오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문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석진이 그 말에 곧바로 녀석들을 겨눈 채 활을 당겼다.
"지랄 옆구리 차는 소리 하지말고 당장 꺼져. 니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하늘나라의 문 앞에 서고 싶지 않으면."
"선지자께서 여러분을 원하십니다. 마땅히 춤추고 노래부르며 맨발로 나와..."
쒜엑, 하는 소리와 함꼐 날아간 화살이 녀석들 뒤편의 벽에 박혀서 부르르 떨린다.
"나가라고 했다. 다음에는 벽이 아니라 머리에 날린다. 나가서, 다시는 찾아오지마. 우리는 그 망할 놈의 사이비 종교에 관심 없으니."
녀석들은 하던 말을 멈추고 작게 한숨을 쉰 다음 우석진을 노려봤다.
"선지자께서 가로되, 설득은 다음 한 번이 마지막이라 하셨습니다. 일주일의 설득 끝에도 이렇게 나오신다면, 저희는 부득이하게 예리코의 전투를 이 땅에서 재현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데, 우리가 말과 웃음 대신 칼과 창을 드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다음에는 마땅히 하늘에 올라 왕관을 받게 될 숭고한 분, 선지자님과 함께 찾아뵙겠습니다."
녀석들은 그 말을 끝으로 물러났다.
"미진아."
여자가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섯시간 쨰 저러고 있더라. 미치는 줄 알았어."
말을 마치고 물을 한 모금 마신 여자는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이 사람들은?"
우석진이 아차, 하는 소리를 내고 우리를 돌아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거, 미안하게 됐구만. 그 뭐냐, 별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은 아니었는데. 이쪽은 내 아내인 최미진이다. 여보, 인사해. 오늘 사냥에서 도움을 준 사람들이야. 도움 받고 그냥 보내기가 좀 뭣해서 하루 쉬다 가라고 했어."
간단하게 통성명을 한 다음, 우리는 우석진과 함께 소파에 앉았다.
"방금 전에 그 친구들은 뭐지? 복장과 대사는 꼭 사제 같던데."
내 말에 우석진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천 시에 자리잡고 있는 개또라이 사이비들이야."
서지현이 그 말에 입맛을 다셨다.
"어차피 사이비는 다 또라이인데. 굳이 또라이 사이비라고 할 이유는 없죠."
맞아, 우석진처럼 말하면 또라이가 아닌 사이비 종교인도 있는 줄 사람들이 착각 할 거 아니야. 그나저나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이천이라."
거긴 우리가 지나갈 예정이었던 곳인데.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로 들을 문제가 아닌걸. 우석진이 한숨을 푹 쉬고 나서 입을 열었다.
"얼마 전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어. 랜드 클리어 미션이 뭔지는 아나?"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댁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잘 알고 있을 걸."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한 번 들어가면 미션을 클리어 하기 전까지 이천 시를 나올 수 없으니, 나와 아내는 이천 시로 들어가지 않고 그냥 이 골프장에 자리를 잡았어. 어차피, 식량과 물자는 어느정도 자급자곡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으니까."
그래, 방금 전에 본 풍경을 생각해보면 지금 이 골프장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들은 굳이 도시 안의 물자를 탐낼 필요 없이 충분히 필요한 것들을 확보할 능력이 있었다. 이천 시 안의 물자들을 필사적으로 탐낼 이유가 없으니, 안에 들어갈 생각을 포기한 거겠지.
"이 장소에 자리잡고, 함께 다니던 사람들과 으쌰으쌰 해서 나름대로 규모도 불리고, 이런 저런 일에도 모두가 능숙해지고 있었지. 이런 나날만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크게 부족할 것 없이 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양 손으로 자기 얼굴을 비볐다.
"1주 전에 저 녀석들이 찾아왔어."
우석진의 아내가 우리에게 차를 한 잔 씩 내주면서 그 말을 받았다.
"샘물동산이라는 이름의 사이비 종교에요. 교주는 최 바오로. 자기들 말로는 선지자이자 구원자라고 하더군요."
서지현이 찻물을 한 모금 마시고 어깨를 으쓱했다.
"흔한 레파토리네요. 망한 세상에 사이비 종교 한두개 정도 안 생기는게 오히려 이상하잖아요?"
그야 그렇지. 세상이 하 수상하다 싶으면 으레히 튀어나오는게 신 이름 빌어서 미친 짓 하는 작자들이니까. 나는 찻잔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아까 찾아온 녀석들, 그냥 제거하면 될 일 아닌가?"
죽은 녀석들은 말도 없고, 전도도 못하고, 귀찮게 굴지도 않을 거 아니야. 굳이 협박만 해서 내쫒은 이유를 모르겠네. 내 말에 우석진이 고개를 저었다.
"최 바오로라는 녀석, 실력이 굉장해. 일주일 동안 끈질기게 찾아오는 저 사이코 새끼들의 말에 따르면 혼자서 이천 시의 랜드 클리어를 성공했다고 하더군. 그 이야기의 진위여부는 둘쨰쳐도, 골프장에 머무르고 있던 사람들 전원이 무기를 들고 달려들었지만 순식간에 제압당했어."
나와 서지현은 순간적으로 서로를 마주봤다. 이야,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녀석이 있을 줄은 몰랐네. 근데 왜 하필 사이비 교주 짓을 하고 있는거야.
"게다가, 그 샘물동산의 광신도들은 자기들의 선지자인 최 바오로를 열렬히 믿고 있지. 죽으라고 하면 기꺼히 죽을거야."
뭐, 녀석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최 바오로라고 하는 녀석이 혼자 랜드 클리어를 성공시켰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숭배하는 이유가 납득가지 않는 건 아니다. 어쨌든,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불가능 할 것 같은 일을 해낸거니까.
"유능한 사이비 교주라."
무능한 사이비 교주보다 더 질이 나쁜 종류다. 성경으로 치면 적그리스도 같은 존재잖아.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 사이비 교주는 남들 보기에는 우스울 뿐이지만, 기적 비슷한 일을 일으키는 사이비 교주는 남들이 보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왜 사이비 교주들이 기를 쓰고 마술을 배워서 심령치료 비슷한 짓거리를 하려고 들겠어.
뭔가 보여주면, 사람들이 홀리기 마련이다. 최 바오로라는 녀석이 보여준 것은 혼자서 이천 시의 랜드 클리어를 성공시키는 업적이었다.
"자자, 어차피 우리 사람들 일일 뿐인데 괜히 손님들 붙잡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군. 어떻게든 되겠지."
우석진이 우리의 표정을 보고 있다가 박수를 한 번 치며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옆에 있던 최미진이 우리에게 키카드를 내밀었다.
"자요, 머무르실 방의 카드키에요. 저기, 방을 두 개 제공해드리는 편이 좋으려나?"
서지현이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내 손을 잡았다.
"아니요. 방은 하나가 좋아요."
그 말에 나와 서지현을 번갈아 보던 최미진이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묘한 웃음을 짓고는 우석진을 바라봤다.
"그럼, 식사 준비 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주세요."
우석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우리를 보고 말했다.
"그럼 쉬고 있으라고, 준비가 되면 말해줄테니."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공해준 방 안에 들어갔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 최 바오로라는 녀석을 말하는 거겠지.
"슬프게도, 우리는 이천을 지나갈 계획이었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했다.
"하지만 다른 길이 없는 건 아니에요. 여기에서 위로 올라가면 여주시가 나오잖아요. 살짝 돌아가기는 하겠지만. 여주시를 통과해서 광주시를 거친 다음 서울로 진입하는 법도 있어요."
그건 그렇지.
"하지만 이천시는 랜드 클리어가 끝났어."
내 말에 서지현이 팔을 꼰 채로 입맛을 다셨다.
"그렇죠. 랜드 클리어 한 번을 다시 하느니, 차라리 사이비 교주 한 녀석 모가지를 따는게 더 시간 절약이 될 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