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
여왕 죽이기
여왕이 죽자, 나는 완전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내 가족을 죽이는 것 같은 감정에서 벗어난 나는 비로소 고개를 돌려 서지현을 바라봤다.
"저기, 지현아. 미..."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서지현이 뭔가를 휙 던져줬다. 휴지다.
"눈물 닦고, 코 풀고 나서 말해요. 사과 할 거면 상대를 제대로 보면서... 또박또박, 알아들을 수 있는 발음으로 해야죠."
나는 그녀가 던져준 휴지로 눈물을 닦고, 코를 풀었다.
"고생했어요. 얼마나 힘들게 저지른 일인지 짐작이 되지는 않지만.... 아마 저였다면 훨씬 쉬웠겠죠."
나는 그 말에 잠깐 주저하다가 말했다.
"미안해."
내 말에 서지현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세요. 잘 풀렸으면 전 그걸로 괜찮으니까. 미안할 필요도 없고, 고마울 필요도 없어요."
서지현이 시선을 머리가 박살난 여왕의 시체 쪽으로 향한다. 불덩어리가 날아가 시체를 박살낸다.
"아, 조금도 안 후련해. 화만 더 나잖아."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신발코로 바닥을 한 번 팍 찬 다음 주변에서 눈을 크게 뜨고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는 서큐버스들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어딜 가려고? 여왕이 죽었는데 신하들이 같이 죽지는 못할 망정, 도망을 치려하네."
방금 전 사태에 크게 마음을 졸였던 서지현이 화풀이 대상으로 남아있는 서큐버스들을 택했다. 서큐버스들은 대항 할 수 없었다. 도망치려고 기를 썼지만, 결국 순식간에 서지현의 손에 정리되었다.
"이건 뭐 천 쪼가리가 작아서 닦기도 힘드네."
서지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큐버스의 시체가 입고 있는 속옷이나 다를 바 없는 옷에 에노테르의 날을 문질러 피를 닦아냈다.
"아직, 미션 클리어라는 메시지가 뜨지 않았어."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을 죽인 것 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네요."
정신을 차린 나는 여왕이 문을 열고 넘어온 건너편을 가리켰다.
"저 안에 뭔가 있지 않을까."
여왕이 들어온 방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들어오는 것은 말도 안되게 거대한 크기의 침대였다. 연한 붉은빛이 도는 조명 아래에 희미하게 불빛을 흘리는 아로마 캔들.
방 안을 뒤지던 와중에 서지현이 어떤 장식을 툭 하고 쳤다.
"이거 봐요."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여자의 조각상이다. 당연히 나신이다.
"그래, 예술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네."
서지현이 내 말에 잠깐 인상을 쓰고 대답했다.
"그게 아니에요. 이 입에, 뭔가를 물려야 하는 것 같아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저 자세에서 저렇게 입을 벌리고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조각상에 넣어야 하는 물건이라. 나는 양 손으로 바지를 가리고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나는 싫어."
"넣으라고 할 생각도 없었거든요?"
서지현은 한 마디 쏘아붙이고 나서 밖에 나가서 여왕의 보석을 챙겨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입을 벌리고 있는 여자 모양의 조각상에 그 보석을 물렸다.
둔중한 소리와 함께 벽을 구성하고 있던 돌 중 하나가 툭 하고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이건, 술잔이잖아."
딱 맥주잔 정도 되는 크기의 유리잔 안에는 반짝거리는 액체가 한 가득 담겨있었다. 이 공간 안에 있는 화려하고 음란한 조각이나 장식들과는 다르게, 이건 아무런 무늬나 장식이 없는 단순한 유리잔이다.
나는 그 그릇을 꺼내들고, 조각상의 입에 물려 있던 보석도 다시 뽑아냈다. 뽑혀져 나왔던 벽돌이 귀신같이 다시 제 자리를 찾아 쑥 하고 들어간다. 살펴보자, 눈 앞에 문자가 떠오른다.
[계승의 잔 : 서큐버스들은 자의로, 또는 타의로 인해 오랜 세월 키워온 자신의 보석을 깎아내거나, 뽑아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깎여나간 보석 조각과 뽑힌 보석들은 계승의 잔이 먹어치웁니다. 서큐버스들의 여왕이 죽게 되면, 성배는 이를 인지하고 먹어치운 보석을 녹여 잔을 액체로 가득 채웁니다. 잔이 만들어낸 액체를 섭취한 서큐버스는 퇴화했던 생식기관이 제 역할을 되찾아 불임에서 벗어납니다. 수컷의 정을 받아 새로운 서큐버스를 잉태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꼬리의 보석 또한 급격히 발달해 새로운 여왕이 됩니다.]
설명을 확인한 나는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쉽게 말하면 서큐버스들의 로열젤리 같은 거네."
먹으면 여왕이 되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액체라. 장난 삼아 벌이나 개미에 비유했지만, 진짜로 그게 맞았던 모양이다. 나와 마찬가지로 설명을 확인한 서지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게 랜드마크인 모양이네요. 안동시의 그 거대한 물건과는 사이즈가 좀 틀리지만."
뭐, 꼭 거대하다는 조건 같은게 설명에 붙어있었던 건 아니잖아. 게다가 이 술잔의 역할을 생각해보면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 하다. 우리는 여왕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이 술잔의 내용물을 살아남은 서큐버스가 마시면 마시면 다시금 그 서큐버스가 새로운 여왕이 되어 서큐버스를 이끌기 시작할 것이다. 즉, 원주 시를 서큐버스에게서 완전히 구원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여왕을 죽이는 걸로는 부족하고, 이 잔까지 부숴야 한다.
설사 랜드마크가 아니라고 해도, 그냥 남겨두기에는 찝찝한 물건이다. 궁 안에 있던 서큐버스들은 모두 죽였지만, 원주 시에는 아직 돌아다니는 서큐버스들이 꽤 많을 것이다. 녀석들 중 하나라도 여기를 찾아내 이 액체를 마신다면 다시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간다.
뭐, 시험 삼아 부숴도 손해 볼 일은 아니니까. 나는 곧바로 바람개비를 휘둘렀다.
튼튼할 줄 알았는데, 휘둘러진 바람개비에 후려맞은 유리잔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잔 안에 들어있떤 액체가 바닥에 닿았다. 따닥, 하는 소리를 내며 액체가 순식간에 단단하게 굳어 크고 작은 보석 조각으로 변해버린다.
[미션 클리어]
눈 앞에 떠오른 문자를 확인한 나는 씨익 웃었다. 그래, 이거였구나. 검을 집어넣은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서지현이 곧장 내 옆에 앉는다.
"이걸로 끝이네."
"그러게요. 원주시라."
생각해보면 몸이 힘들었다기보다는 마음이 고생했던 장소였다.
툭, 하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 클리어 보상인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든 서지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건, 반지네요."
두 개의 반지였다. 서지현이 옵션을 보고는 흐흥, 하는 소리를 내고는 빙글빙글 웃으며 반지 중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안 낄 생각은 하지 마세요."
굉장히 기분이 좋아보이는데, 도대체 이유가 뭘까. 방금 전에 서큐버스들을 전부 쓸어버린게 기분 전환에 유효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반지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새가 한 마리 자리잡고 있었다. 이거 그거잖아, 원앙이라고 하는 새.
[일편 : 단심과 함께 한 세트로 구성된 반지입니다. 끼우게 되면 단심을 낀 사람의 허락 없이는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장착하게 되면, 단심을 낀 대상 이외의 대상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육체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게 됩니다. 단심을 장착한 대상의 능력치 50%를 보너스로 받게 됩니다. 둘 중 하나가 죽게 되면 더 이상 능력치를 나눠받지 못하고, 3년간 모든 능력치가 50% 감소합니다.]
뭐야 이건, 정조대 같은 건가.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지현을 바라봤다. 서지현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우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른 손가락 말고, 꼭 약지에 끼워요."
저게 저리 좋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손가락에 반지를 끼웠다.
곧바로 서지현이 가지고 있던 능력치의 50%가 공유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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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 31.
육체 : 42+15 체력 : 42+15
정신 : 32+25 마력 : 3+35
감각 : 62+22 기교 : 22+10
카테고리 : 반사신경 3단계
스킬 : 점프 스케어, 후발선타, 프릭션 컨트롤, 짐승의 시간
수행 가능한 미션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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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치를 확인한 나는 입을 헤 벌려야 했다. 그건 서지현도 마찬가지였다.
"감각 능력치를 도대체 얼마나 올렸던 거에요?"
내가 감각 능력치가 원래 62였고, 거기에 더해서 반사신경 3단계 보너스로 12정도를 더 받고 있었지? 그럼 74네.
그렇게 치면 너는 마력에다가 얼마를 때려박았길래 꼴랑 3이었던 능력치가 갑자기 38로 변해버렸냐. 나와 서지현은 잠깐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반지의 효과는 굉장했다. 물론, 하나가 죽으면 더 이상 능력치 공유가 되지 않고, 3년간 각 능력치가 50% 감소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서로의 능력치 50%를 받는다는 이야기는 상대의 레벨 50%를 나눠 받는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내 레벨은 사실 상 적게 잡아도 이제 45 정도는 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 그래도 마력 능력치가 너무 적어서 따로 찍어야 하는 건가? 하고 고민이 되려던 찰나에 마침맞게 딱 서지현의 능력치 50%를 적용받아서 참 다행이다. 앞으로도 서지현이 레벨업해서 능력치를 얻을 때 마다, 나도 50%의 능력치를 추가로 받게 되겠지.
손뼉을 한 번 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이제, 도시를 나설 준비를 하자."
물론, 원주시에는 아직 서큐버스들이 남아있긴 하다.
이후 원주시에 도착하는 녀석들 중에서는 아직 생존한 서큐버스에게 홀리는 녀석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녀석들도 있겠지만... 우리가 고려할 바는 아니다.
어차피 원주시의 랜드 클리어는 종료되어서 이 도시를 나갈 수 있게 되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지금 서큐버스들은 종족 자체가 거세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치악산의 폐광을 나와 다시 안전지대로 돌아온 우리는 지도를 펼쳐놓고 고민하는 중이었다.
"원주시는 이제 끝났으니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이동할 생각이세요?"
"이천 쪽으로 가자."
이천에서 용인으로 향하고, 용인에서 성남을 거쳐 서울의 강남 쪽으로 진입할 생각이다. 내 말에 서지현이 지도에 선을 쭉 그은 다음 고개를 끄덕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안동에서 걸어서 도착하려고 했으면 시간이 얼마나 필요했을지..."
헬기를 타지 않았으면, 과장 조금 보태서 내년 이맘 때 쯤 서울에 도착했다고 해도 놀라울 일이 없었겠지.
"이천, 용인, 성남이라... 랜드 클리어를 앞으로 세 번 정도는 더 해야 하는 걸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세 곳 전부 랜드클리어가 되어있지 않을 확률은 꽤 낮다고 생각해."
한국에 랜드클리어를 도전하는 사람들이 나랑 서지현 단 둘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원주시에 도착하고 나서도 시간이 꽤 흘렀으니까.
아마 이쯤 되면 하나 둘 씩 랜드 클리어에 성공하는 장소도 나오지 않을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벽에 옆머리를 기댄채 말했다.
"그건 그렇네요. 가능성은 여러가지에요. 뚜껑 열고 살펴보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겠네요."
이천이라. 원주를 벗어나 이천에 접어들게 되면 마침내 경기도로 진입하게 되는 거다. 강원도에서 서울 간다는 문장과 경기도에서 서울 간다는 문장은 벌써 말에서 느껴지는 거리감부터 확 다르다.
"거기 그걸로 유명한 곳 아닌가."
서지현이 내 말에 반응하듯이 한쪽 구석에 두고 있던 쌀봉지를 툭 하고 발로 차며 말했다.
"쌀 말이죠?"
그래, 그 근방에 자리잡고 있는 괴물들은 혹시 뭐 허수아비에 낫 같은 거 들고 사람 목을 잘라내며 '벼에서 쌀을!' 막 이지랄 떠는 건 아닐지 모르겠네.
"어쩌면, 구역으로 설정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죠."
뭐, 우리가 지나간 구역이라고 해봤자 냉정하게 말해서 안동과 원주 말고는 없으니까. 이천시는 구역으로 설정되어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가 봐야 아는 거지. 오늘은 푹 쉬며 짐을 싸고, 내일 출발하자."
여기에서 이천까지 가는 길은 거리가 50-60km 정도는 된다. 가는 길에 물자를 얼마나 확보 할 수 있을지 확실치 않으니까, 배낭 안에 최대한 많은 물자를 챙겨야 할 거다.
대화를 마친 우리는 한 동안 안전지대 안을 돌아다니며 필요한 물자를 잔뜩 쟁여놓은 다음,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