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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72화 (72/237)

# 72

여왕 죽이기

열린 문 너머에서 괴물이 한 명 걸어들어온다. 옷을 입는 대신 커다란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새하얀 나신에 금발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꼬리에 달려 있는 무겁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커다란 보석까지.

"그만, 더 이상 남의 거처에서 소란을 피우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너희들도 그만하렴."

괴물의 말에 방금 전까지 우리를 보며 투지를 다지고 있던 서큐버스들이 곧바로 무기를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네 녀석이 여왕이구나. 그렇다면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지. 나는 곧장 녀석의 심장을 검으로 겨눈 채 달려들었다.

"찌르게?"

그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얼굴을 타고 뭔가가 흐르고 있었다. 눈물이다. 괴물들의 여왕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와, 내가 들고 있는 검 앞에 자신의 가슴을 들이밀었다. 하얀 젖가슴에 칼끝이 살짝 닿으며 생긴 작은 생채기에 핏방울이 맺힌다.

그리고, 나는 견딜 수 없는 경악에 휩싸였다. 지독한 충격과 공포. 자신이 이 여자를 상처입혔다고 하는 일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슬픔.

"자. 그게 네가 원하는 일이라면."

말을 마친 그녀가 손을 움직여 내가 들고 있는 칼끝을 살짝 움직였다.

"여기야, 내 심장. 찌르면 그대로 죽겠지."

나는 그 말에 몸을 흠칫 떨었다. 뒤편에서 화악 하고 뜨거움이 느껴진다. 서지현에 쏘아낸 불꽃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서지현이 쏘아낸 불꽃을 내가 막아버렸다.

"당신, 뭐하는 거에요! 정신 차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돌려 서지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내 눈 앞에서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봤다. 찌르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

"나한테 뭘 한거야."

"성욕이라는 건 참 복잡한 물건이지."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는 가슴에 칼 끝이 닿은 채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오려고 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푸른 눈동자가 나를 한 번 보고, 시선을 돌려 서지현을 한 번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는다.

곧이어, 손을 뻗어 내가 들고 있는 칼을 살짝 쓰다듬었다.

"나의 페로몬은 사랑이라고 하는 개념까지 손이 닿는단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 사랑없는 성교는 공허하다고. 나와의 성교는 그렇지 않아. 마음과 몸이 하나되어 충족되는 진정한 의미의 잠자리지. 왜냐하면, 지금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거든. 이런걸 뭐라고 하지. 순애라고 하던가."

말을 마친 그녀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쓰다듬는다.

"나에게는 정을 내려줄 남자가 필요해. 그리고 좋든 싫든, 너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지. 너와 내가 서로 원하는 것이 함께 충족 될 수 있는거야."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왕은 말을 마치고 나서 눈을 가늘게 뜨고 서지현을 바라봤다.

"참 마음에 드는 몸이었는데. 깃들 수 없는 이상에는 어쩔 수 없지. 저 아이를 죽여."

나는 고개를 돌려 서지현을 바라봤다. 서지현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아니죠?"

서지현을 바라보던 나는 고개를 다시 돌려 여왕을 바라보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싫어."

미쳤냐, 내가 서지현에게 검을 왜 겨눠. 이번에는 서지현이 아니라 여왕이 놀랄 차례였던 모양이다. 나와 서지현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가 눈웃음을 짓는다.

"아아, 그 명령까지는 안 따르는구나? 거기 있는 암컷은 기뻐해도 좋아. 이 남자가 지금, 너를 나만큼 좋아한다는 반증이니까. 저 암컷이랑 자서 순결을 빼앗은게 너였던 모양이네."

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푸른 눈동자는 여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자연스럽게 생겨난 감정은 변질되고, 풍화되기 마련이지. 하지만 나에게 향하는 너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을거야. 저 여자에게 질리는데 얼마나 걸릴까. 1년? 10년? 생겨난 감정이 영원하지 않듯, 지금 저기에 서 있는 저 암컷의 젊음과 아름다움도 영원하지 않겠지."

그녀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 이제 저 여자의 몸이라면 모르는 곳이 없게 되어서 따분해질거야. 5년이 지나면, 저 그럴듯한 아름다움은 서서히 빛을 바래기 시작할 테지. 가슴은 쳐지고, 배에는 군살이 끼고, 피부는 거칠어지고, 주름이 생기고."

"닥쳐! 그 이상 떠들면...!"

뒤편에서 서지현이 발악하면서 화염구를 만들어내 서큐버스의 여왕에게 던진다. 내가 그 경로를 막아서자, 맹렬하게 쏘아지던 불꽃이 결국 사라져버린다.

"제발, 오현석씨, 그러지 마요."

그 와중에 서큐버스의 여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언제나 젊고 아름답단다. 언제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네 곁에 있을거야. 또한, 나를 향한 네 마음도 변할 일이 없지."

"네 보석에서 나오는 페로몬 때문에?"

내 말에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떄문에.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 로맨틱하지 않아? 우리는 내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서로를 열렬히 사랑할거야. 이 장소는 우리의 보금자리가 되어서,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서큐버스들이 하늘을 뒤덮겠지."

말을 마친 서큐버스가 양 손을 활짝 펼쳤다.

"네가 나에게 품고 있는 감정, 그리고 저 여자에게 품고 있는 감정은 굉장히 닮았어. 그렇다면, 그 달콤함을 더 오랜 시간 즐길 수 있는 쪽을 택하는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저기에서 발악하는 꽃이 품은 꿀은 시간이 지나면 줄어들겠지만, 나라는 꽃이 품고 있는 꿀은 마르는 법 없이 네 갈증을 축여줄텐데."

여왕이 팔짱을 끼고, 팔뚝에 자기 가슴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저 여자, 잠자리에서 완전 목석이 따로 없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어설프기 짝이 없잖아. 나는 아닌데. 수백년 동안 남자를 기쁘게 하는 법 하나만 보고 살아왔단다. 네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쾌락을 줄 수 있어. 품고 있는 감정이 상품의 가격이라면, 밤기술은 상품의 가치겠지. 같은 값이라면 더 좋은 성능의 상품을 사는게 어때? 저 암컷을 버리고, 나를 선택하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여왕의 눈에 조금 짜증이 어리기 시작한다.

"머뭇거리기는."

그리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여왕의 입가에 미소가 생겼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서지현에게로 향했다.

"암컷, 그거 알아? 사랑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남녀간의 사랑에만 적용되는게 아니란다."

서지현의 눈이 멍하니 나와 여왕을 번갈아 보고 있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이 나를 해칠 리 없어."

서지현의 말에 여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짜증나게도 네 말이 맞아. 남자와 여자 사이의 연애감정으로는 이 수컷이 너를 죽이도록 만드는데 좀 부족한 모양이네. 그럼, 다른 종류의 사랑은 어떨까. 더 숭고하고, 더 가치있는 종류의 사랑."

여왕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 턱을 쓰다듬고 있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래, 요컨데 가족. 우리 내기해보지 않을래?"

여왕의 말을 들은 서지현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가족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서지현의 말에 여왕이 미소를 지었다.

"어머, 자신없어? 이 수컷이 자기 가족보다 너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너를 공격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가족을 너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너는 네가 사랑하는 이 수컷의 손에 죽겠지. 재미있겠는걸. 내 몸이 될 예정이었던 주제에 엉덩이를 헤프게 놀려서 순결을 잃은 죄는 그렇게 징죄하도록 할까."

말을 마친 여왕이 혀를 날름 핥았다.

"너는 네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두들겨 맞은다음 사지가 묶이고, 나와 잠자리를 가지는 네 수컷을 바라보는거야. 너무 길게는 말고, 한 30년 정도만. 그럼 내 화가 풀리겠지. 그때는 이 수컷에게 너를 죽이라고 해줄게."

서지현의 눈이 떨리는게 보인다. 그리고, 여왕의 꼬리에 달린 거대한 보석이 다시금 짙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그 감정까지 건드려 본 적은 없지만... 욕심을 좀 부려서 완벽하게 정리를 하는 편이 나에게 좋거든. 도전 할 가치는 충분하지. 있지, 나를 봐주지 않을래?"

내 시선이 다시 여왕에게로 향했다. 아까와는 또 다른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여왕의 눈이 순간적으로 나와 서지현 사이를 오간다. 그 다음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여왕이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에게 있어 지금의 나는 어떠니?"

편안함, 연대감... 무수한 감정들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엄마. 아니, 누나."

그 말에 여왕이 미소를 짓고, 서지현의 표정은 점점 더 안좋게 변하기 시작한다. 여왕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래, 나는 네 누나란다. 저 발칙한 암컷이 누나를 해칠 생각인 모양이야. 누나를 위해서, 저 암컷을 흠씬 두들겨주지 않으련. 자기 다리로 서 있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누나를 지켜줘."

나는 손을 들어올려, 내 머리를 쓰다듬는 여왕의 손 위에 내 손을 올렸다. 여왕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부탁할게. 누나를 위해서 조금만 고생해줘."

가만히 여왕을 보고 있던 나는 손에 힘을 주고, 그대로 녀석의 가슴에 바람개비를 밀어넣었다.

"커... 헉?!"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왕이 나를 바라보며 입으로 피를 흘린다.

"제르멩이 한 말이 이거였나."

여왕이 욕심을 부리면 나와 서지현 누구 하나 다치지 않는다고 했었지.

"미안한데, 이 씨팔년아. 내 누나는 죽었어."

감정 가지고 장난치는 건 조심해야 하는거야. 그러다가 뭐 하나 잘못 건드리면 큰 일이 나는 수가 있거든.

여왕이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고민 끝에 서지현을 공격했을거라고 생각한다. 여왕이 말한 것처럼, 그녀의 페로몬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남녀간의 사랑 그 자체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서지현을 모질게 몰아붙이지는 못했을거다.

서지현이 각오하게 된다면, 나는 죽었을거다. 내가 서지현을 죽일 수는 없었을테니. 나를 죽인 서지현은 연달아서 여왕까지 죽여버렸겠지.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는 깊은 상처가 남게 되었을거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괴물년이 서두르고 싶은 욕심에 건드리면 안될 감정을 건드려버려서.

지금도 이 괴물년을 보고 있으면 가족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내 누나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감정에 휩싸인다.

"내 누나는 죽었어. 내가 두 눈깔로 그 처참한 시신을 확인하고, 내가 장례식을 치르고..."

나는 말을 하다가 녀석의 심장에 찔러넣은 칼을 다시 한 번 깊게 밀어넣었다.

"화장터에서 시신을 태우고, 유골함에 담아서... 납골당에 그녀의 일기와 함께 넣어두었어. 알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녀석의 머리를 붙잡고 그대로 땅바닥에 쉬지 않고 내려찍기 시작했다.

"죽었다고, 죽었어! 이 씨팔년아. 뭐, 내 누나라고? 가족이라고? 좆까는 소리 하고 있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그야 그렇지. 이 녀석이 내 누나가 아니라고 하지만, 받고 있는 감정은 한치의 틀림이 없다. 나는 지금 내 가족의 가슴에 칼을 박아넣고 머리를 바닥에 찍을떄 느낄 법한 감정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내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견디기 힘든 슬픔이 밀려든다. 쿵, 쿵. 아직 살아있는 서큐버싀 여왕의 몸이 머리가 바닥에 내려찍힐때마다 꿈틀거린다.

하지만, 내 가족은 죽었다. 어머니도, 누나도. 세상에 없다. 내 두 눈이 두 사람의 죽음을 보고, 머리가 기억하고 있다. 여왕의 머리는 흔적도 남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났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감정은 여러번 왔다 갈 수 있다. 이별하고 나서 다른 여자를 만나서 사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두 사람에게 동시에 사랑을 느끼는 상황도,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람피는게 잘하는 짓이 아니기는 하지만, 바람피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잖아. 품으면 안되는 감정도 품게 되는게 사람이다.

하지만, 가족은 아니지. 내가 어머니를 보면서 느끼는 사랑과, 누나를 보면서 느끼는 사랑은 내 인생 딱 한 번 씩만 존재해야 하는 감정이다. 어머니를 보며 느끼는 사랑은 어머니에게서만 받을 수 있는게 정상이고, 누나를 보면서 느끼는 사랑은 누나에게서만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는 감정이다. 거기에서 이 녀석이 실수한거다.

이 괴물은, 한 사람이 두 번 느낄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을 모사했다. 당연히 뭔가 이상하고, 어긋난 느낌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는 형체도 남지 않고 머리가 박살나고 가슴에 칼이 쑤셔박힌 채로 죽은 이 시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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