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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71화 (71/237)

# 71

여왕 죽이기

우리의 전투는 처절하면서 격렬하고, 굉장하면서 비참했다. 밝아오는 아침해를 보고 있던 와중에 옆에 누워있던 서지현이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어때요?"

나는 그 말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하얀 천장이 노랗게 보이는데. 혹시 잘 아는 안과 의사 없어?"

슬쩍 고개를 돌리니 사방에 굴러다니는 것은 이틀간 이어진 격전의 현장이었다. 형형 색색의 고무들이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 꼭 죽은 시체 같다. 우리는 승리한 것이다. 마침내 스물에 달하는 고무장화 병정들은 우리의 공투 앞에 패배를 선언하고 백탁의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내 몸에 남아나는게 없을 정도로 쥐어 짜여야 했다. 물론 당하는 서지현의 입장에서도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던게 확실하다. 잠깐씩 화장실을 갈때 걸음걸이를 보면 이상하기 그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젠장, 내가 더 힘들었을거라고 확신한다. 손가락으로 콧구멍을 쑤시면 콧구멍보다는 손가락이 더 힘들 수 밖에 없잖아. 물론 너무 후비면 콧구멍에서 피가 나오기는 하겠지만 피가 나는 거랑 힘든 건 틀리잖아. 허리 근육이 덜덜 떨리네.

"훌륭하네요."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천장이 노랗게 뵈는게 칭찬받을 정도로 훌륭한 일인지는 몰랐는데. 시선을 돌려보니 서지현이 손에 서큐버스의 보석을 들고 있었다.

"지금 설마."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흥분시키는 중이에요."

효과가 거의 없다. 뭔가 체온이 살짝 뜨거워진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그것 뿐이다.

"하지만 감각 쪽은 어쩔 수 없잖아."

감각이 민감해지는 건 내 흥분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건 보석으로 중화시킬 수 있으니 괜찮아요. 한 번 체크를 해본 것 뿐이에요. 정말 완전히 다 빨린건가 아닌가."

빨리다니, 함께 고생한 입장이면서 그런 식으로 표현하지마. 너 근데 피곤해 보이는 주제에 왜 그렇게 피부에 윤이 뺸질거리는 것 같냐. 기분탓인가. 잠깐 쉬고 있으려니 다시 몸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회복되었다. 이건 내가 회복속도가 빠른 것도 있지만 어깨 대장간의 효과 덕분이기도 하다. 시간을 확인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움직일 수 있겠어? 이거 빌려줄까?"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몸을 움직여보고는 대답했다.

"컨디션이 살짝 안좋은 거지,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 없어요. 배불리 밥 먹고 출발할까요."

그래야지. 서지현이 뭔가를 턱 하고 꺼내왔다.

"고기? 갑자기 어디에서 난 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제가 잡혀왔을 떄 좀 땡깡을 피우면서 고기가 먹고싶다고 했었죠. 그랬더니 녀석들이 어디에선가 고기나 달걀 같은 걸 구해서 온 모양이더라고요. 지하에 보관하고 있다가 방금 전에 해동시켰어요."

지하라고 하면, 여자들 시체가 굴러다니는 곳이잖아. 나는 그 말에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먹성도 좋다."

거기에 식량으로 쓸 고기를 보관하다니. 서지현이 내 말에 흐흠, 하고 웃으면서 부루스타를 꺼내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금세 고기 구워지는 냄새가 방 안에 가득 차오른다. 얼마만에 맡아보는 고기 구워지는 냄새인지 모르겠네. 게다가 이거 소고기잖아.

서지현이 손에 쥔 집게를 딸각거리며 말했다.

"보관 장소가 마음에 안 들어서 못 드시겠다면, 저 혼자 먹을게요?'

그건 아니야. 나도 부루스타 앞에 자리잡았다. 고기는 대충 봐도 1kg 정도는 있기에 나와 서지현이 먹기에는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다. 우리는 배터지게 고기를 구워먹고 나서, 입가에 감도는 기름을 훔쳤다.

"끄윽."

서지현이 옆에서 트름을 하고 벽에 등을 기대고 있다 나를 바라봤다.

"갈까요?"

밥 먹었으면 이제 가야지. 나와 서지현은 곧바로 필요한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폐광산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인지 알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

"별 다른 정보를 찾을 수 없었지."

애초에 폐광산은 아무도 사용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폐광산이 된 거잖아. 문을 닫은 광산에 대한 자세한 정보 같은게 남아있을리는 없었다.

"게다가 폐광의 모습도 분명히 많이 변해있겠죠. 그 제르멩이라는 녀석이 손을 썼다고 했으니까."

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X자 표시가 생겼었던 손등을 바라봤다.

"살아있다는게 대단한 거지."

싸웠으면 우리 둘 다 죽었다. 여태동안 싸워왔던 모든 녀석들은 그냥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거나, 잘 준비를 해서 간다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지만 그 녀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다는 건 그 제르멩이라는 괴물이 정말로 인간에게 적의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 자식은 도대체 뭐하는 녀석일까. 다시 찾아온다고 했었나. 녀석이 만족할 만한 성취란게 뭔지도 잘 모르겠다.

뭐, 상관없겠지. 내가 녀석의 졸개도 아니고. 녀석이 나에게 기대하고 있는 점이 있다고 해서 내가 꼭 그 기대를 충족시켜줘야 하는 건 아니다. 내가 녀석에게 돈을 받고 고용된 입장은 아니잖아.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 강력한 괴물이 남기고 간 표시 따위는 내 알 바 아니다.

미리 챙겨두었던 등산화를 신었다.

"짐 다 챙겼으면, 가자고."

배낭과 바람개비를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지현이 에노테르를 손에 쥔 채로 내 뒤를 따랐다. 치악산에서 내려와 원주시에 들어섰는데, 이번에는 원주시에서 나와 거꾸로 치악산으로 향하는구나.

"폐광의 위치는 성남리 외곽 쪽이에요, 거리가 꽤 되는군요."

원주시에서 치악산 국립 공원의 등산로로 가는 길은 내가 이용했던 행구동 쪽의 등산로가 가장 가깝다. 거기에서 출발해 목적지에 도착하려고 한다면 단순히 비로봉에서 내려가는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이다.

"힘들면 말할테니 업어주세요."

"그럴 레벨 아니잖아."

서너시간 산 타면서 힘들어서 업어달라고 할 정도라면 서큐버스 여왕을 잡으러 가겠다는 거대한 포부는 재빨리 접는게 좋을 것 같은데.

"정도 없어라."

어느정도 등산로를 따라서 이동하던 우리는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 나침반을 꺼내들고 주변을 살피며 등산로를 벗어나 도로도 없는 산 속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조심해. 내가 걸은 자리로 따라와."

수풀이나 낙엽에 땅이 가려져 있어도 감각 능력치에 워낙 투자를 많이 한 덕분에 어디를 딛어야 하는지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편에서 내 옷깃을 잡은 채 내가 밟는 장소를 뒤따라 딛고 걸어가기 시작한다.

휙휙, 바람개비를 휘둘러 앞을 가리는 수풀이나 나무가지들을 쳐내면서 계속해서 나아가자, 목적했던 곳 인근에 도착했다. 이 주변에서 육안으로 확인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어디보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폐광 좋아하시네."

뭐냐 저건. 뒤편에 있던 서지현이 내 헛웃음에 고개를 옆으로 내밀고 내가 바라보는 장소를 확인하고는 한 마디 했다.

"정말 궁전이네요."

산의 한 면에 떡하니 만들어져 있는 거대한 대리석 문에는 복잡한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고, 이런 저런 보석 같은 걸로 치장되어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되는 건가.

문에 조각된 그림을 가만히 살펴보니, 참 요망하기 그지 없는 조각들 뿐이다.

"저거 봐요. 나중에 한 번 해볼까요?"

서지현이 문의 한 쪽을 가리키자 내 시선이 그 쪽으로 향했고, 이내 헛웃음이 흘러나온다.

"저건 요가 같아 보이는데. 쓸데없는 거 구경하지 말고, 후딱 진입하자."

문을 밀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움직이지 않는다.

"부술 수 있겠어?"

"네, 조금 집중하면 충분히 가능 할 것 같안요."

서지현은 곧바로 에노테르를 휘둘러 문에 박아넣은 다음, 그대로 날 부분에서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대리석 조각들이 땅을 때리고, 돌가루가 휘날린다. 그리고 확 하고 코를 찌르는 향긋한 내음. 몸이 살짝 더워지지만, 이틀 간 이어졌던 전투의 효과는 굉장했기에, 그걸로 끝이었다.

"넓네요."

너머의 공간을 보며 서지현이 건조한 목소리로 감상을 말했다. 넓은 공간 안에는 온갖 종류의 조각상이나 장식들이 한 가득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참 외설적이기도 하다.

"취향 한 번 이상하네."

사람으로 치면 남들이 밥 먹고 있는 사진이나 음식 사진만 가지고 자기 집을 꾸민 꼴인데. 이 정도면 정신병이 있는게 아닐까.

"그래도, 쾌적하네요."

서늘하고, 건조하다. 딱 좋은 온도에 딱 좋은 습도. 넓게 펼쳐진 공간 너머의 문에 열렸다. 무장한 서큐버스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기를 들고 있기는 하지만, 저 녀석들이 우리와 싸워서 이길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막아, 여왕님의 방에 들여서는 안된다! 여자는 죽이고, 남자는... 생포해. 여왕님에게 정을 내리기 적합한 자야."

그런 녀석들을 보고 있다가 나는 슬쩍 서지현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마에 튀어나와 있는 건 의심의 여지 없이 핏줄이고, 눈썹이 연신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저 친구들의 발언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저항 할 생각인 모양인데. 뭔가 적절한 협박이 저 친구들의 생각을 바꿔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해."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을 열었다.

"항복하면 죽여줄게요. 저항해도 죽어요."

야, 그건 협박이 아니라 도발 같은데. 서지현은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이 곧장 에노테르를 들고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죽여버릴 생각인 모양이다.

나도 그 뒤를 이어서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검과 녀석들이 들고 있던 무기가 부딪치고, 어떻게든 막아내는데 성공한 녀석이 그대로 뒤로 휙 날아가서 벽에 부딪친다.

애초에 페로몬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녀석들의 보석은 아예 반짝이지도 않고 있었다. 쓸데없는 데에 힘을 빼기 싫다는 뜻이겠지.

"너무 하나에 의존하니까 이런 상황이 된 거 아니야."

페로몬이 강력한건 사실이지만, 대항책이 생겨버리니 이렇게 속수무책이 되는 거다.

"그건, 우리도 알아."

서큐버스 하나가 그렇게 대꾸하고는 조각상의 사타구니를 꽉 움켜쥐고 그대로 쑥 뽑아버렸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 양 다리가 살짝 움츠리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호쾌한 손동작이었다.

뭐하는 거지. 갑자기 미약한 진동음이 들리고, 거대한 공간이 차르륵 소리를 내며 다시 짜맞춰지기 시작한다. 그래, 이 광경을 한 번 본 적이 있지. 그리고 쑥쑥 솟아오른 건 고래도 잡을 만큼 거대한 작살이 박혀 있는, 일종의 발사기 같은 것들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제르멩이라는 새끼 건축가 아닌 거 같은데."

무슨 놈의 건축가 만든 건물이, 조각상의 거시기를 뽑으면 고래 잡는데나 쓸 뻡한 작살을 날리는 포탑이 튀어나오냐?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우리를 겨누기 시작한다. 얼씨구, 저거 움직이기까지 하네. 그리고 투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쏘아진 두 개의 작살.

곧바로 시간이 느려지고, 나는 손을 뻗어 나에게로 날아오는 작살 하나를 붙잡고, 다른 하나는 발로 차올렸다. 프릭션 컨트롤 덕분에 손에 잡힌 작살이 앞으로 더 나아가 내 몸에 닿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발로 차올려 하늘에 뜬 작살을 다시 발로 차서 서큐버스 한 마리에게 날리고, 손에 쥐고 있던 작살도 마찬가지로 돌려주었다.

"끄... 으으윽..."

퍼퍽, 하는 소리와 함께 작살을 맞은 서큐버스들이 그대로 뒤로 밀려나 벽에 고정된다.

"안다고? 그럼 뭐해."

변하는게 없는 걸. 이제 막 녀석들에게 무기를 들고 달려들려는 와중, 뒤편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제껏 맡아본 적이 없는 향기가 나와 서지현의 코를 찌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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