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인류 찬가
녀석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지구별의 인류가 성취한 일에 감동을 받았다면 이 도시에 남은 인간들도 좀 도와주지 그랬어?"
여기 남아있던 인간들이 저 꼴 저 모양이 되는 걸 구경하고 있었던 주제에 앞에서 저렇게 나는 인간이 좋아요 같은 소리를 씨부려 봤자 별로 믿음직스럽지 않다.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발전은 누군가에게 기대어서 이루어지는게 아니라네. 자주적 극복이야 말로 발전의 열쇠지. 나는 그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켜 볼 뿐이라네. 어떻게 될 지 가슴을 졸이면서. 그 긴장이 또 즐거움의 연속이 아니겠나? 내 기대를 저버린다면 슬프겠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체스를 구경하는 사람이 훈수를 둘 수야 있나. 어떤 결과가 나와도 구경꾼은 결과에 승복하는게 바로 매너라고 생각하는데."
서지현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대답햇다.
"쉽게 말해서, 손절하고 발을 빼겠다는 거군요."
그 말을 들은 제르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솔직히 자네들과 싸워야 할 이유를 도통 느끼지 못하는 중이니까."
"그래도 우리가 싸우겠다면?"
내 말에 챙에서 흘러나오고 있던 한 쌍의 붉은 빛이 강렬해지고, 그의 주변에 복잡한 마법진이 마구 떠올라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한다.
"후회는 자네들의 몫이 될 걸세. 나는 충분히 내 생각과 의사를 표명했다고 생각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우겠다면 각오는 해두는게 좋을 거야. 나는 나이로만 치면 자네들의 종교에 나오는 예수보다 더 오래 살았다네. 그 동안 무수히 많은 존재들이 나에게 달려들었고 시체를 치우는 역할은 상대가 아닌 내가 해왔지. 이번 경우에는 두 구가 되겠군."
주변에 떠도는 마법진들을 본 서지현의 표정이 파랗게 질렸다. 심지어 마력 능력치는 빙구와 다름 없는 나도 피부가 찌릿거릴 정도였으니까. 서지현이 느끼고 있는 건 더 엄청날 것이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어."
싸우지 말자. 내 말에 곧바로 주변에 떠 있는 마법진들이 흐릿해지다가, 모습을 감췄다. 그는 웃으면서 손으로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한 번 정도, 이 세상의 인간들과 이야기를 좀 나눠보고 싶었어. 다른 녀석들은 죄다 페로몬에 발정난 개새끼처럼 행동해서 별로 이야기를 나누기 적절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이야기 나누니 즐겁구만. 아, 생각해보니 자네들에게는 이것도 필요하겠군."
녀석이 손을 휘젓자, 우리가 있던 복도가 빠른 속도로 깎여나가기 시작한다. 만들어진 것은... 원주시의 입체지도였다. 녀석이 지팡이로 산을 툭 하고 건드렸다.
"치악산, 이 근처에 폐광산 하나가 있는데. 내가 조금 손을 본 덕에 여왕이 자신의 궁전으로 쓰고 있지. 쳐들어간다면 여왕은 죽게 될 거야. 그녀가 욕심을 부린다면 두 사람 모두 무사하겠지. 하지만... 그녀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에게 큰 상처를 남기겠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피로스의 승리라니. 지는 것만 못한 승리라는 뜻이잖아. 내가 뭐라고 말하려는 와중에 제르멩이 선수를 쳤다.
"자, 이걸로 모두 만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건가? 그렇다고 생각하겠네. 사실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거든. 그럼 난 이제 정말 가보겠네."
말을 마친 그는 나와 서지현의 옆을 지나가다가 우리의 손등을 지팡이로 한 번 씩 건드렸다. 빨라서, 대응할 시간도 없었다.
"고생들 하라고."
내 손등이 화끈거린다. 손등에 검은 X자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자, 설명이 떠올랐다.
[??? :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룬다면, 그가 찾아 올 겁니다.]
설명을 다 읽기가 무섭게, 떠올라 있던 X자 표시는 다시 사라졌다. 그걸로 끝이었다. 녀석은 휘파람을 부르며 문을 나서다가 나를 슥 돌아보고 히죽 웃었다.
"그거 아나? 서큐버스의 여왕은 서큐버스를 낳기 위해서는 수컷의 정이 필요해. 언제나 뒤질 수 있는 구역 안을 싹 뒤져서, 가장 강한 수컷을 간택하지."
녀석이 키들거리며 나와 서지현을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없어지면 서큐버스의 여왕은 정을 받을 존재가 없어진 상황이니. 새로운 씨내리를 찾겠군 그래. 이 원주시라는 구역에서 제일 강한 수컷으로 말이야. 가장 강한 수컷이라... 그게 누굴까? 이거 굉장히 재미있겠군 그래. 굳이 자네들이 폐광산으로 찾아가지 않아도 남자 쪽은 서큐버스들이 알아서 여왕 앞으로 옮겨 줄 것 같은데. 내가 꽤 튼튼하게 지어놔서 말이야. 어쩌면 그 방법이 가장 쉬울 수도 있을거야."
말을 마친 녀석의 모습이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한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서지현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럴 생각 없어. 알잖아."
사람 몸뚱아리 뜯어서 자기 몸에 붙이는 괴물이랑 붕가붕가를 하고 싶었으면 진작에 녀석들 손에 떨어졌을거다. 내 말을 듣고 있던 서지현이 바닥에 만들어진 입체 지도를 보다가 지니고 있던 지도에 표시를 했다.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바닥에 만들어져 있던 입체지도가 부스러져 흩어진다.
"폐광산이라고 했죠. 박쥐 날개 달린 년들의 대장 답네요. 남의 떡을 훔쳐먹으려 드는 녀석이 세상에서 제일 나빠요. 저는 남이 제 떡 먹는 거 보면서 흥분하는 재주는 없으니까..."
서지현이 살벌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뭐라뭐라 중얼거렸다.
"진정해."
"..."
한 동안 그러고 있던 서지현이 이내 깊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입을 열었다.
"위치는 알았고, 방금 전에 만났던 그 제르멩이라고 하는 괴물은 교회를 수리하지 않았어요."
교회에 있던 그 거대한 수조 모양의 보관소는 제르멩의 작품이니, 그가 없어졌다면 다시 지을 수도 없을 것이다.
"한 층 더 배고픈 나날을 보내게 되겠군."
"고난의 행군 같은거죠."
"그래도 너무 시간을 끌면 다시 녀석들 식량 사정이 나아질거야."
시간이 꽤 지난 상황이라, 원주시로 오는 생존자들의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원주시에 도착한 생존자들이 죄다 이전에 봤던 그 기괴한 모습으로 개조되어서 정을 빨리기 시작한다면 저장은 못 해도 매일 매일 일용할 양식 정도는 충분히 확보 할 수 있을 것 같다.
"안전지대에 돌아가서 잘 먹고, 잘 쉰 다음에 녀석이 머무르고 있는 폐광산으로 처들어가죠."
말을 마친 서지현이 수통에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다음에 입가를 슥 훔쳤다.
"돌아가죠.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더 챙길 수 있으면 챙겨도 좋을 것 같네요. 그 동안은 식량을 확보하는데 치중했지만, 세제나 샴푸 같은 것도 있어서 나쁠 거 없잖아요?"
어차피 서큐버스들은 현재 우리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다. 설사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달려든다고 해도 서지현이 챙겨둔 보석이 있으니까. 우리는 주변의 가게를 뒤져서 추가로 필요한 것들을 보급받았다.
"뭐해?"
편의점에서 물건을 챙기던 와중에 서지현이 구석에서 뭔가를 하고 있길래 물어보니 서지현이 곧바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필요한 건, 다 챙겼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리얼 통을 하나 흔들었다.
"이런 거 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 하는 것도 일이니까. 어차피 차지하는 공간도 그렇게 많지 않고, 유통기한도 꽤 남아있다. 그렇게 필요한 것을 챙겨서 안전지대로 돌아온 서지현은 곧바로 vip 병실을 확인하고 머리를 긁었다.
"유리창을 부수지 말 걸."
"방 많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함께 방을 옮겼다. 식사를 마친 서지현이 곧바로 병실 안의 침구류를 챙기며 말했다.
"빨죠."
"...?"
어차피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니고, 상태도 조금 더럽긴 하지만 빨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는데, 굳이?
"싸우기 전에 쓸데없이 힘 뺄 필요 없잖아."
서지현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꼭 필요한 일이에요."
의심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일단 서지현의 빨래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얼마 뒤에 빨래를 다 마친 서지현이 이불을 향해 마법을 써서 빠르게 말렸다. 순식간에 뽀송하게 마른 침구류를 다시 챙겨서 내려오자, 서지현이 침상 정리를 싹 마치고 뭔가를 꺼낸다.
"아로마 캔들...?"
서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런 향초 몇 개를 더 꺼냈다. 서지현은 침대의 냄새를 몇 번이나 확인한 다음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에서 옷가지를 꺼내들었다.
저건 란제리잖아. 아니,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거야.
"지현아.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이 일련의 모든 행위는 침상 꾸미기에 집중되어있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 서지현이 손에 란제리를 든 채로 이리저리 돌려보다가 나를 슥 바라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필요한 일이에요."
그리고는 나에게 뭔가를 휙 던져주었다. 소위 말하는 아랫도리에 끼우는 고무장화 두 박스였다. 편의점에서 챙긴게 이거냐. 나는 그 상자를 받아들고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 이건 왜?"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충분히 빼고 나면 폐광산에서 마주칠 그 날개달린 쌍년의 유혹을 견디기가 수월해질 지도 모르잖아요? 이틀 안에 그거 다 쓸 계획이에요."
꼬박 꼬박 서큐버스의 여왕이라는 단어를 쓰던 서지현의 입에서 마침내 적의가 펄펄 넘치는 날개달린 쌍년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저 단어만 들어도 지금 서지현의 각오가 얼마나 강철처럼 튼튼한지 능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련의 소동이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루어진 것인지도 비로소 완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멍하니 들고 있는 박스를 바라봤다. 야, 이거 한 박스에 10개가 들어가있잖아. 이거 두 박스를 이틀 만에 다 쓰라니.
"그냥 여기에서 날 죽이고 혼자 가서 서큐버스 여왕을 죽이는 건 어때?"
지금 눈빛만 보면 혼자 달려들어서 서큐버스 여왕의 양 날개를 박박 잡아 찢어버린 다음, 뼈를 으득으득 씹어먹고도 남을 기세인데.
세상에, 이틀에 콘돔 20개를 전부 쓰자는 건 침대 위에서 죽으라는 소리잖아. 골수가 핵폭탄 떨어진 사하라 사막처럼 바짝 말라 비틀어 질 것 같은데. 이 아가씨가 드디어 나를 죽이겠다는 원대한 계획의 편린을 드러내는구나.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그럴 수야 없죠. 제가 지금 화가 난 거지, 머리가 나빠진 건 아니에요. 분명히 혼자서는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왜요, 남겨놨다가 뭐... 혹시 가서 기대하고 있는 거라도 있는거에요?"
무슨 그런 심한 소리를 하는 거야. 사람을 뭘로 보고. 이 안전지대와 교회에서 내 눈깔로 본게 있는데.
"기대하긴 뭘 기대해. 내가 그런 거 기대하고 있었으면 지금 쯤 여기에 있는게 아니라 입에 호스 물고 아랫도리 기괴하게 뒤틀린 비참한 신세가 되어있어야 정상이지."
내 말에 서지현이 나를 보던 시선을 거둔다. 나는 잠깐 박스를 만지작거리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내 몸도 축나겠지만 니 몸도 축날 걸. 이러다가 우리 둘 다 탈진 걸려서 빌빌버리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말을 하고 나서 나는 잠깐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어지간해서는 두려움을 잘 느끼지 않는데. 이건 슬슬 두렵기 시작한다.
"잠자리는 두 사람이 함께 즐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말에 서지현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우리는 지금 전장에 나서는 군인이에요. 반드시 치뤄야 하는 전투 앞에서 일신의 즐거움 따위를 생각하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이건 선택이 아니라 의무에요."
에라이, 군인이 전장에 나가기 전에 콘돔 두 박스를 쓰는 경우가 어디있어.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네.
"나라고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에요. 아프단 말이에요."
세상에, 나와 서지현이 이런 관계가 된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우리가 서로 의무방어전의 각오까지 다져야 하는 상황에 마주한 걸까. 결혼 15년차 부부도 아니고.
이게 다 그 망할 박쥐 년 때문이다. 도착해서 찾아내면 아주 작살을 내주지. 나는 이를 갈면서 내 눈앞에 떨어진 20개의 과제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