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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69화 (69/237)

# 69

인류 찬가

서큐버스들의 밥집을 작살내고 나서 3일이 지났다.

"여기는 아무것도 없네요."

"그러게."

나는 들고 있던 원주시 지도에 X자 하나를 그었다. 제르멩이 오기 전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요 3일 동안은 혹시 뭔가 얻을 만한 물건이 있을까 주변을 살펴보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서큐버스들에게도 모종의 이야기가 들어간 모양인지 돌아다니다가 우리와 마주치면 곧바로 전력을 다해 도망칠 뿐이었다.

"3일이나 지났지만, 안전지대 안에 도착하는데 성공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여전히 안전지대 안에는 나와 서지현 뿐이다.

"녀석들도 생존자를 찾아내는 일에 필사적이라는 거지."

아마 원주시에 발을 내딛는 생존자들은 내딛는 족족 남자는 먹이가 되고, 여자는 재료가 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날려버린 교회로 인해서 서큐버스들이 밥을 곪고 있다는 건 확실히 인지 할 수 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서큐버스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긴 하지만.

그 와중에 서지현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어떤 가게 안으로 들어간다.

"무슨 색이 좋아요?"

말하면서 뭔가를 들어올리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속옷이다.

"야."

내 황당하다는 표정을 살피던 서지현이 말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아요."

별 참. 어차피 주변의 조사는 끝났고, 서큐버스들도 우리를 피하는 중이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겠지. 오래 시간을 끌면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르니까. 나는 서지현이 들고 있던 속옷을 슥 훑어보고 말했다.

"그럼 검은 떡이 먹기 좋을 것 같네."

내 말에 서지현이 오케이, 라고 말한 다음에 둘 다 챙겼다.

"왜 물어본거야?"

"예의 상."

배낭 안에 속옷을 집어넣 있던 서지현이 순간 움찔하고는 방금 전의 장난끼가 싹 가신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제르맹이 교회에 도착했어요."

이야기를 들은 내 얼굴에서도 웃음이 사라졌다. 가야 할 떄가 된 것 같다.

"시간을 줄 필요는 없겠지."

녀석이 안에서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으니까.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를 마치고 5분 정도 쉰 우리는 곧장 3일 전에 들러서 서큐버스를 작살냈었던 교회로 다시금 향했다.

"정문이 말끔하네."

도착하자마자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서지현이 박살냈던 정문이 말끔하게 복구된 모습이었다.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에노테르를 휘둘러 정문을 때렸다.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색 육각형들이 에노테르의 칼날 앞에 무수히 떠오르며, 정문을 향해 휘둘러진 에노테르를 막아낸다.

"그 뿐이 아니라, 건물에 마법도 걸어두었네요. 하지만 부수는게 아니고 그냥 열고 들어가는 거라면 상관 없어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문 부수지 말고 곱게 들어오라는 건가. 다른 건 안 느껴져?"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뿐이에요."

싱거운 자식.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교회의 정문을 열어 젖혔다.

"아, 초면이군. 어서 들어오게."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앞에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윤이 도는 검은색 실크햇과 은제 독수리 머리로 장식한 지팡이, 쥐색 연미복과 행거치프를 입고 있는 남자였다. 유별라게 긴 실크햇의 챙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고, 코와 입 정도만 보인다. 모자로 가려진 부분에서 흘러나온 금색 안경줄이 보인다.

"제르멩이네. 서로 이름을 부를 사이는 아닌 것 같으니, 박사님 정도로 불러주면 좋겠군."

서지현이 제르멩의 말에 대답했다.

"학위 논문은 쓰고 나서 하는 소린가요?"

"아하하, 그게 말이지."

서지현의 말에 제르멩이 손가락을 딱 튕긴다. 건물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이리저리 모양을 바꾸기 시작한다.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건물의 외벽이 서로 맞물리고, 열리고, 회전한다.

방금 전까지 우리가 서 있었던 복도는 어느 사이엔가 거대한 서재가 되어있었다. 그는 서재의 책장에서 뭔가를 꺼내서 흔들었다.

"한 번 만들어 봤는데, 봐줄 녀석들이 없더군. 현생 인류를 위한 5차원적 다중평면 구조물의 설계 이론, 이라는 논문인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로 툭 하고 바닥을 찍었다.

"서큐버스들이 여러가지로 지금 좀... 빈궁한 상황에 몰렸거든. 슬픈 일이지. 원주시 안으로 들어오는 인간 여자와 남자는 남김없이 쓸어담고 있어서 말이야. 덕분에..."

챙으로 가려진 부분에서 빨간 빛 한 쌍이 반짝인다.

"박사 학위를 줄 자격을 가진 사람이 이 주변에 있을리 없어서 말이야. 어쩔 수 없이 자칭 박사로 만족하기로 했지."

그러시겠지. 나는 어깨에서 단검 한 자루를 뽑아내 던지며 대꾸했다.

"박사 학위 취득을 축하한다. 이제 뒤져."

곧은 경로로 날아가는 붉은색의 단검, 녀석은 가만히 서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단검을 바라보다가, 히죽 웃음을 짓고 지팡이로 단검을 튕겨냈다.

"혈석 단검이라. 그 어깨 방어구, 루치아노 녀석이 처음 만들었던 물건 같은데. 이름이 어깨 대장간이었나? 그 아이는 잘 지내..."

살점 공예가와 아는 사이인가. 게다가 아이라는 표현을 쓰는 거 보니 그 녀석보다는 잘나가는 놈인 모양이다. 실크햇 아래에서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내가 든 바람개비 쪽으로 향하고, 살짝 흔들렸다.

"오호, 파백이라. 그럼 죽은 모양이군."

혀를 몇 번 찬 녀석이 주머니를 뒤적거려 시가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인다. 서지현이 그런 녀석을 향해서 불덩이를 쏘아내며 낫을 들고 달려들고, 나도 거기에 맞춰서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좀, 기다려주지 그래."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녀석이 휘두르는 지팡이가 잔상을 남기려 든다. 곧장 점프 스케어가 발동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지팡이의 속도는 빠르다.

나는 황급하게 공격을 멈추고 검을 들어 막아야 했다. 저건 후발선타가 발동될 수 없었다. 내 공격보다 녀석의 공격이 더 빠르게 내 몸을 때렸을거다.

"크으."

빠박, 하는 둔중한 소리를 내고 나와 서지현의 살짝 뒤로 밀려난다. 바람개비를 타고 전해진 충격이 굉장하다. 손이 저릴 지경인데. 저 몸뚱아리에서 저런 힘이 나온다고? 서지현이 날려보냈던 화염구는 제르멩에게 도착하기 전에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막아? 훌륭해. 대충 이 정도라 그거군. 좋은데,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이 정도는 막아 낼 수 있을 정도인가."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어꺠 위에 걸쳤다. 입에 물린 시가에서 연기가 한 번 훅 하고 흘러나온다. 내가 달려들려고 하자. 녀석이 어깨에 걸쳐놓고 있던 지팡이로 머리에 쓰고 있는 실크 햇을 툭 쳤다.

바닥에서 사슬이 올라온다. 나는 하던 동작을 멈추고 그대로 옆으로 미끄러졌다. 바닥에서 올라온 사슬들이 허공에서 서로 얽히다가, 이내 쑥 하고 다시 튀어나왔던 곳 아래로 들어가버린다. 서지현이 쏘아낸 불꽃이 녀석의 몸에 직격했지만, 옷깃이 탄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야기 좀 하자고. 성격이 왜 그렇게 급해. 집에 돌아가서 할 일 있나?"

이거 예상했던 것 보다 더 말도 안되는 녀석이잖아. 그는 말을 마친 다음에 손에 들고 있던 시가를 바닥에 던지고, 지팡이 끝으로 시가를 비벼서 꺼버렸다.

"자네들이 만들어낸 대학교라는 곳을 좀 살펴봤는데, 보면 볼 수록 아깝다는 생각이 들더군."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네들에게는 시간이 있었지. 우리의 세상에 존재하던 인간들에게는 시간이 없었다네. 발전할 시간, 빛을 낼 시간이 없었지. 하루 하루가 나와 같은 존재들에게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나날이었을테니. 문화는 저열하고, 기술은 조잡했지."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고 있던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인간이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자네들은 그렇지 않아. 굉장히 우아하더군. 어떤 점에서는 우리들보다 더욱."

그는 말을 하고 나서 서재의 책을 몇 권 꺼내들었다.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피사 시, 피사 대성당에 있는 55m의 탑. 1173년에 공사를 시작했지. 원래부터 문제가 있었던 지반과 기초 공사의 부족함으로 인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더군. 공사를 시작한게 1173년인데 완공 시점이 1372년이야. 멋지지 않나. 건축물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200년에 달하는 시간을 투자한거야. 해와 달이 73000번 서로 자리를 바꾸는 긴 시간인데."

말하는 그의 입은 웃고 있었다.

"그렇게, 200년에 걸려 지은 탑은 결국 기울어진 채로 완성되었지. 그리고 벌써 몇백년째, 자네들은 그 탑을 유지보수하고 있어. 단순한 유지보수가 아니야. 자네들은 그 탑이 영원히 기울어져 있기를 소망하지. 너무나도 훌륭하지 않나. 아, 이 세상의 인류는 너무나도 우아하게 발전했어. 감동까지 느낄 지경이었지."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웃음을 흘렸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또 어떤가. 1882년 착공해,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지어지고 있다지. 건축가는 이미 죽었지만,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있어. 아름다운 일이네. 그 행위의 숭고함은 또 어떤가."

그는 그렇게 말하고 노트 한 권의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펼친 페이지 안에는 잡지 같은 곳에서 잘라낸 것으로 보이는 스탠드의 사진이 쭉 붙어 있었다. 흔히 파는 물건들이다.

"보게나. 이건 단순한 등불 아닌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다양한 모양이라니. 내가 있던 곳의 인류들은 이런 걸 생각하지 않았어. 단순한 등불조차 보기 좋게, 그러면서도 등불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잊지 않도록. 내가 살던 세상에서 이런 건 우리의 전유물이었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 이런 개념을 이해하고 사용하는 건 우리들 뿐이라 여겼으니까."

하고 싶어하는 말이 뭔지는 알겠는데...

"그러거 치고는, 안전지대 지하실에 있는 화로에 참 앙증맞은 말이 써져 있던데."

인간에 대한 경멸이라고 해야 하나. 화로에 써진 문장은 그런 느낌이 물씬 풍겼다.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야 당연하지. 자네들은 그들을 경멸하지 않나? 페로몬에 발정해서 이성을 집어던진 머저리들이? 암캐 오줌에 발정하는 수캐와 다를 바 없는 행태 아닌가."

그는 한 번 헛기침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의 인류는 다시 우리의 위협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지. 100년? 200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원래 내가 있던 곳의 인간들과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수준까지 열화될거야. 나는 그게 안타깝다는 거네. 내가 머무르고 있는 대학교, 그 도서관 안에 존재하는 무수히 많은 지식들, 수천년에 걸쳐 빚어내고 쌓아올린 분석과 이해의 정수."

그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히죽 웃었다.

"도서관에서 발견한 그 무수한 계산식과 이론들... 언젠가 이 별을 떠나 우주 위에 건물을 세우겠다는 야망까지. 크게는 우주로, 작게는 원자 이하로! 전율의 순간이란 그 책을 읽었던 순간을 두고 빗대어 표현하는 거겠지."

말을 마친 그가 다시 한 번 지팡이로 바닥을 탁 찍었다.

"나는 자네들이 굉장히 마음에 든다네. 서큐버스들의 여왕에게 주기적으로 정을 제공하는 이유도, 아직 그 대학교의 도서관에 더 머무르고 싶기 떄문이지."

녀석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손에 쥔 검에 힘을 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마음에 들어하다니 참 기쁘네. 그럼 가서 우리 대신 그 여왕이라는 괴물 좀 죽여주지 그래."

내 말에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안될 말이지. 쥐고 있는 무기에서 힘을 빼게나, 친구.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어. 나는 이 별에 남은 인류의 발전을 소망하게 되었지만... 아까 말했듯이 현 상황에서는 발전이 아니라 퇴보의 길을 걷게 될 것이 명료하게 보인단 말이지. 지금 이 별의 인류에게 필요한 건 생존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줄 뛰어난 전사야.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고, 그로 하여금 다시금 여태동안 해왔던 감동적인 발전을 지속할 수 있게 지켜줄 외벽 같은 사람들."

그는 말을 하고 나서 나와 서지현을 슥 훑어봤다.

"자네들은 벌써 내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정도로 강해졌어. 외벽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나는 자네들과 싸우는 대신 보내주고 싶은데. 어차피 나는 조만간 여길 뜰 생각이었거든. 오늘이 그 날이라고 해도 큰 상관은 없겠지. 직접 좀 돌아다니면서 이 별의 인간들이 지은 건물을 좀 구경 할 생각이네. 분명히, 매우 즐거운 시간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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