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66화 (66/237)

# 66

환자실 로맨스

빠르게 처리해야 할 텐데. 서지현은 접근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이씨, 이제 막 밥 먹으려고 하는 와중인데."

식사를 방해받은게 굉장히 짜증나는 모양이다. 서지현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빨다가 내려놓고, 창문 쪽으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저렇게 대놓고 달려들면 혼내달라는 거겠죠?"

"그런거 아니어도 혼내줄거잖아."

내 대꾸에 서지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녀석들을 향해 불덩어리를 마구 쏟아내기 시작했다. 축구공 만한 불덩이들이 주차장 근처에서 건물 쪽으로 다가오는 녀석들의 머리 위로 내려찍힌다.

"...?"

부서진 주차장을 보고 있던 서지현의 표정이 약간 변했다. 화염이 쏟아진 자리에 있는 녀석들은 그다지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모양이다. 검은색 망토 위에 핑크핑크한 색깔의 도형이 떠올라 있다.

"마력 저항이라니."

서지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린다. 옆에서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그녀를 바라봤다.

"안 통하는 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한 번에 다 쓸어내려고 하면 안될 것 같아요."

그거 참 쓸만한 녀석이네. 어디에서 저런 걸 양산해서 가지고 온 거지. 서지현은 녀석들이 자신이 쏘아낸 불꽃을 막아낸 게 별로 기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소수만 죽일 생각으로 제대로 마력을 집중해서 공격하면."

서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손 위에 불덩어리 하나를 다시 만들었다. 이번에 만들어진 것은 아까와는 수준이 다를 정도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서지현이 다시 불덩어리를 창 밖으로 쏘아내자 망토를 믿고 날아오는 불덩이를 신경쓰지 않던 두 명 정도가 폭발하는 화염이 휩싸여 그대로 바싹 구워졌다.

"충분히 가능하긴 해요. 다만, 마력이 많이 필요해서..."

강렬하네. 나는 연기를 피워올리는 시체들을 보다가 말했다.

"확실히 저 막대기가 가장 신경이 쓰여."

"가만히 보니까 망토도 좀 특제인 것 같아요. 저걸 뚫는 건 많이 어려울 것 같아요."

뭐, 자기만 특별한 장비를 쓰는 건 대장들의 특권이잖아.

"너를 내놓으라고 한 걸 보면, 아직은 모르는 모양이네."

서지현이 내 말에 살짝 얼굴을 붉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도리가 없죠. 어제 일이고, 안전 지대 밖으로 나간 적도 없으니."

좋아, 쉽게 쉽게 가자고. 나는 바람개비의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창문으로 뛰어내려서, 재빨리 두 녀석 조지고 망토 빼앗아 입자."

그럼 페로몬에서도 어느정도 보호 받을 수 있을거다. 잠깐 짐승의 시간과 바람개비가 예열되기를 기다리던 나는 곧장 의자를 집어 던져 창문을 박살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후웅, 하고 공기가 몸을 가르는 느낌과 함께 나와 서지현은 그대로 땅에 착륙했다.

"니들은 학습 능력이 없냐."

뭐 주워먹을 게 있다고 여기를 또 찾아왔어. 나는 곧장 프릭션 컨트롤을 걸고 눈에 보이는 한 녀석을 목표로 한 다음 달려들었다. 퍽, 하고 기슴에 바람개비가 녀석의 가슴팍을 뚫었다.

"그 후드, 나도 좀 쓰자."

나는 곧장 녀석의 머리 쪽으로 손을 뻗어 후드를 잡았다.

물컹거리는 감촉과 함께 쭈욱, 하고 후드가 늘어난다. 나는 그걸 보고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뭐야 이거, 몸에 달라 붙어있잖아. 이러면 벗길 수가 없겠는데. 당기면 당기는 데로 쭉쭉 늘어났다가, 놓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버린다.

"우리가 그런 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 같냐?"

그럴 것 같았는데, 아니었네. 이러면 더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새끼...!"

나는 대답하지 않고 부지런히 녀석들의 몸을 썰어대기 시작했다. 하늘로 팔다리가 날아다니고 땅에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순간적으로 시야에 들어온 것은 짙은 붉은색의 빛.

아마, 막대기에 달려 있던 보석에서 흘러나온 빛이었을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갑자기 나는 주변의 녀석들을 베어넘기던 검을 순간적으로 멈췄다.

"뭐야 이건."

이상한 기분이다. 싸우고 싶지 않다. 눈 앞에 있는 녀석들과 싸우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서지현을 바라봤다.

그녀도 마찬가지로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서 있었다.

"어때, 이상한 기분 아닌가?"

나는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녀석을 바라봤다.

"감정의 거세. 제르멩 님이 순식간에 만들어낸 물건이다. 대단한 분이시지. 여왕님께서 그토롱 총애하시는 이유가 있어."

감정의 거세라. 그렇구나.

적의는 여전히 솟아오르지 않고 딱히 위기감도 느낄 수 없다. 아니, 그냥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는다. 정확히는 생겨나나 싶은 순간 확 하고 뜯어져 나가서 그대로 사라져버린다. 남는 것은 지독한 무기력함.

나를 향해서 칼이 휘둘러진다. 하지만 위기감을 느낄 수가 없다. 나에게 다가오는 칼끝이 보인다. 적의가 없으니, 막고 싶은 생각이 들지를 않는다. 왜 그래야 하는데? 라고 몸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것 같다.

내 머리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별로 막고 싶지 않다. 귀찮다. 억지로 검을 들어올린 나는 휘둘러지는 검을 대충 막아냈다. 궤도가 어긋난 칼이 내 뺨을 스친다. 화끈거리는 고통, 그래서 뭐?

남의 일이라고 해도 이렇게 무심해질 수가 있을까. 반격도 딱히 하고 싶지 않다. 왜 그래야 하는 지도 모르겠으면서 나는 대충 대충 나를 향해 휘둘러지는 검을 적당히 막아낸다. 점점 몸에 잔 상처가 늘어가기 시작한다.

해야 하는 일은 알고 있다. 달려드는 녀석들을 막아내야지. 그리고 저 녀석에게 달려들어서 저 지팡이도 빼았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

그것보다...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의하는 단어가 있었는데 뭐였더라.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허벅지에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진다. 뭐야 창? 종아리를 찔렀네. 피가 나는데, 아프겠다.

아, 기억났다.

사이코패스. 지금 나는 사이코패스 비슷한 입장이 된 건가. 조금 다르지. 그건 공감능력 결핍이니까. 그나저나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래?

서울 가야 한다고 했었나. 아, 죽일 사람이 있었지. 내 가족을 처참하게 망가뜨렸던 녀석. 머리 속에 남아있던 기억의 찌꺼기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럼, 맞아. 그 녀석은 죽여야지.

다른 건 몰라도 그 새끼는 죽여야지. 8년을 교도소에서 그거 하나 생각하면서 버텼는데. 그게 끝나고 나면 서지현이랑 다음을 생각하기로 했었고.

멍하니 있던 와중에 다시금 나에게로 던져진 손도끼가 보인다. 나는 확 고개를 틀어 그걸 피했다. 저거 맞으면 서울은 못가잖아.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다. 흑백으로 찍힌 사진에 색이 돌아오는 느낌이다. 나는 죽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녀석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러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보석의 빛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보석을 감싸고 있던 금색의 장식 몇 개가 떨어져 나가고, 보석에서 흘러나오던 붉은 빛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뭐야 이거, 갑자기 왜 이래?"

"그러게. 왜 그럴까? 아, 혹시 내 감정을 다 거세하기 좀 버거워서 지친게 아닐까?"

나는 녀석의 코 앞에 있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좀 많이 격렬한 감정을 품고 있었거든. 한 8년 된 것 같아. 보석이 그 감정을 열심히 지워보려고 노력하다 포기한 것 같은데. 왜, 자동차 같은 것도 짐을 너무 많이 올리면 가다가 퍼지잖아. 그 비슷한 거 아닐까?

"잠까..."

잠깐은 무슨 잠깐. 잠깐 죽어 있어 이 쌍놈의 새끼야. 나는 녀석의 가슴에 바람개비를 박아넣었다. 그리고, 녀석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를 빼았아 들었다. 툭 하고 지팡이 위에 올려져 있던 보석이 지팡이에서 떨어져 나온다. 나는 그 보석을 손에 쥐었다.

[욕망의 보석 : 서큐버스의 꼬리에 달려있는 보석입니다. 보통은 사람의 육체를 성적으로 흥분시키고, 전신의 감각을 비틀어 쾌감으로 바꿔버리는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여왕에게 선택받은 소수의 서큐버스가 소유한 보석은, 마침내 육체의 영역을 넘어 정신까지 간섭해 페로몬에 노출된 사람이 열렬한 사랑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감정을 느끼도록 만들 수 있는 보석을 가지고 만든게 감정을 거세하는 지팡이라니. 나는 그 보석을 한 번 들었다가 받은 다음에 주머니에 넣었다. 유용하게 쓰마. 슬쩍 옆을 돌아보니 잡혀서 수갑을 차기 직전이었던 서지현도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이건, 이건..."

이건 뭐. 나는 뭐라 중얼거리는 녀석의 팔 한 짝을 날려버리며 말했다.

"마침 병원에 장례식장도 딸려 있더라."

내가 장례식까지 치뤄주기는 좀 귀찮으니까. 그냥 근처에서 죽는 걸로 만족해.

"향 대신에 사람 태워드릴게요."

옆에서 서지현이 한 마디 거든다. 이 보석이 전부였던 놈들이고, 이게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놈들이다.

낫과 칼이 날뛰기 시작하자 사람이었던 가축들이 죽어나간다. 쌓여있는 시체를 보던 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썩기 시작하면 냄새가 장난이 아니겠는걸."

이미 꽤 많이 쌓여있었는데, 거기에 시체 이 만큼이 또 생기다니.

"냄새가 심해지기 전에 어서 빨리 원주 시를 떠나죠."

그래, 이 보석이 있으면 서큐버스들이 활용하는 페로몬은 효과가 없을거다.

"근데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거지."

내가 들고 있던 서큐버스의 보석으로 서지현이 손을 가져간다.

"저는 알 것 같은데."

서지현의 말에 내가 보석을 건네주자. 보석을 살펴보던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은 마력으로 만들어 내는 거네요. 하긴, 그냥 페로몬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을리가 없죠."

보석의 색깔이 빨간색으로, 누런색으로 변하다가 이내 파란색으로 변했다.

"이 색깔 맞죠?"

"그래, 맞아. 그건 네가 써야 할 것 같네."

나는 쓸 방법이 없다. 서지현은 픽 웃고는 손에 쥔 보석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식사나 마저 하죠. 이젠 진짜 배고파 죽겠어요."

그래, 밥 먹자. 우리는 다시 머무르고 있던 병원의 vip 실로 돌아왔다.

"이거, 유용하게 쓰면 밤의 잠자리가 몇 배는 즐거워지지 않을까요?"

서지현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 설거지하는 나를 보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서지현을 보다가 대답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궁금하지 않아요?"

"안 궁금해. 쓸데없는 생각 하지말고 밥이나 마저 먹어."

배고프다면서 밥은 안먹고 영 쓸데없는 생각만 하고 있는 것 같다.

내 말에 서지현이 젓가락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보석을 바라보다가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니, 서큐버스들이 잡짓거리 하려고 들 때 막으라고 건네준 걸 가지고 별 이상한 생각을 다 하고 있네.

물론 원래 그런 용도로 쓰라고 있는 물건이긴 하겠지만, 물건이 어떤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꼭 그 용도로만 사용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렇게 치면 무인도에 떨어졌을 떄 물통 대신에 콘돔 쓰는 사람들은 다 이단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