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환자실 로맨스
뭐라고 하는게 좋을까. 다 끝나고, 나와 서지현은 한 병상에 서로 끌어안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병원에 처음 도착했을 때가 해질녁이었고, 지금은 새벽 2시가 넘은 깊은 밤이다.
오래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당연히 아프죠. 근데 아파도 괜찮아요."
누워있던 서지현이 약간 주저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안 때리셨네요."
서지현의 말에 살짝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게 마음에 걸리는 거야?
"내가 널 왜 때려?"
내 말에 서지현이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포개며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때리고 싶으시면 떄리고, 묶고 싶으면 묶으세요. 아니, 그것보다 더 심한 것도 괜찮으니까. 제 생각하느라 참지 마세요."
"내 누나가 어떻게 죽었는지 말했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요."
서지현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작게 탄식하며 말했다.
"너는 남자 잘 만나야겠다."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그런 이야기 함부로 남자한테 하면 몸 망가지고 마음 망가지고 인생까지 작살나는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내 어깨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만났잖아요, 남자."
뭘 또 부끄럽게 그런 소리를 하고 있을까. 잠깐 그러고 잇던 서지현이 어느정도 진정된 목소리로 말했다.
"원주 시의 랜드마크와, 그 서큐버스들의 여왕이라는 괴물은 어디에 있을까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바로 그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서지현이 먼저 그런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서지현은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검지로 내 턱 아래를 살짝 건드리고는 말했다.
"저도 당신 만큼이나 절실해졌거든요? 빨리 그 가학증 걸린 또라이 재벌 3세 멱을 따야, 우리도 다음을 생각 할 수 있잖아요."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옆으로 쓰러지듯이 누웠다.
다른 서큐버스들도 여왕이 머무르는 곳은 모르는 모양이니, 잡아서 불게 하는 것도 소용 없다. 알아야 말을 할 거 아니야. 경찰이 대머리 붙잡고 머리카락 뽑아서 DNA 검사 하겠다는 거랑 뭐가 틀려. 세상 잔인한 일 많다고 하지만 모르는 거 대답하라고 하는 거랑, 없는 머리 뽑겠다고 하는 것 만큼 잔인한 일도 드물거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들은게 있어. 녀석들 여왕의 집을 수리하는 녀석인 모양인데. 제르맹이라고 했었나."
나는 서지현에게 내가 훔쳐 들은 이야기를 대충 들려주었다.
"그런가요. 혹시 녀석이 어디에 있는지도 아세요?"
"대학교에 있다고 하던데."
서지현이 내 팔을 잡아 자기 뒷머리 아래로 밀어넣어 팔배게를 받으며 말했다.
"상지 대학교겠네요, 그럼."
그래, 원주시 안에 있는 대학교라고 하면 거기가 가장 유명하니까.
"녀석들의 여왕이 머무르는 곳을 개축하러 갔다고 했으니. 상지 대학교에서 녀석을 찾아내면 자연스럽게 위치도 알 수 있을거야."
"어머, 앞뒤 가리지 않고 바로 달려온 줄 알고 두근거렸는데, 허겁지겁 달려 왔던 건 아니었군요."
"칭찬이라고 생각할게."
서지현이 이불로 자기 몸을 가린 채로 상체를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와중에 구겨진채로 바닥을 굴러다니는 옷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쉰다.
"저기, 옷 갈아 입고 싶은데... 뒤 좀 돌아봐 주실래요?"
나는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필요가 있어?"
이미 볼 거 안 볼거 다 본 사이가 되었는데, 서지현이 내 말에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랑 이건 다른 거에요."
저런, 뭐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아야지. 내가 몸을 옆으로 돌리자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옷 갈아입는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서지현은 옷을 갈아입으면서 다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제르맹이라고 하는 괴물은 우리가 잡아야 하는 괴물의 집을 개보수 해주러 외출한 모양이네요. 그럼 당장 걱정해야 하는 건 도망친 녀석들이군요."
그래, 녀석들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여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어차피 서큐버스들과 협력 관계였으니까 크게 위험할 것 없다는 판단이 섰던 거겠지.
"그때, 명령을 내리던 녀석이 배신자겠죠."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크 같은 걸 받은 걸로 보이지는 않았는데."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서큐버스들의 여왕이 내린 마크니까. 뭐 사타구니 같은 데 숨어있지는 않을까요."
단순히 마크가 보이지 않았다는 것만 가지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거 말고도 의심되는 건 있다.
"녀석이 히든 미션을 받아서 배신자가 된 거라면 계약한 녀석에게 분명히 권능 같은 걸 받았을거야."
하지만 녀석들이 주구장창 던지던건 단순히 서큐버스의 페로몬이 담긴 병이었다. 고작 그런 게 권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히든 미션이 떠오를 정도라면 서큐버스의 여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어야 할텐데.
그런 녀석이 칼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않고 후퇴를 명령했다고? 그럴리는 없지.
"애초에 항복이라는게 꼭 배신자가 있어야만 가능 한 건 아니잖아?"
서큐버스들이 주는 쾌락에 맛이 가서 자연스럽게 원주시의 안전지대가 서큐버스들의 손에 떨어졌다고 보는게 더 말이 된다. 잠깐 눈을 굴리며 고민하던 서지현이 손뼉을 한 번 짝 치고 말했다.
"생각해보니, 굳이 제르맹인지 뭔지 하는 괴물을 조져서 서큐버스 퀸이 머무르는 곳을 알아낼 필요는 없지 않아요? 어차피 제 몸에 깃들 생각이었다고 했으니까. 제가 슥 모습을 드러내면."
나는 서지현의 말에 큼, 하는 소리를 내고는 창 밖을 바라봤다.
"저기... 뭐였더라, 서큐버스 여왕이 깃들기 위한 조건이 있었는데."
너는 이제 조건에 해당하는 인재가 아니게 되었잖아.
내 말에 서지현이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병상의 시트를 흘긋 본 다음에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러네요."
서큐버스 퀸이 깃들 수 있는 몸은 성숙한 나이의 처녀다. 서지현은 방금 전까지는 그 조건에 부합했지만, 이제는 아니게 되어버렸다. 서큐버스들은 그런 걸 알아보는 모종의 방법이 있는 걸로 보였으니까, 서지현이 그 자격을 잃었다는 건 어렵지 않게 눈치챌거다.
물론 우리가 거기까지 생각했다면 방금 전에 함께 잠자리를 가지면 안되는 거였겠지만. 사람과 사람이 잠자리를 가지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런 것까지 일일히 다 생각해서 거사를 치를 수 있겠어. 그렇다고 방금 전 그 분위기에서 멈추는 것도 말도 안되는 일이다. 그 분위기에서 하던 행위를 딱 멈출 정도면 도를 닦아서 성불을 해야지. 왜 이 사바세계에서 속인들과 함께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어.
서지현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너무 분위기에 취했었던 걸까요. 잠자리는... 다 끝난 다음에 가졌도 늦지 않았을텐데."
나는 그 말에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대답했다.
"아니야, 생각해보면 네가 미끼가 되어서 서큐버스 퀸을 끌어내는 건 너무 위험해."
자칫 잘못하면 서지현이 또 다시 잡혀가버릴 수도 있다.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일을 저지를 필요는 없다. 상지 대학교에서 제르맹을 제압하는데 성공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걸 뭐하러 그래? 옷을 다 갈아입은 서지현이 등 뒤에서 나를 살짝 끌어안았다. 나는 서지현의 뺨에 입을 맞춘 다음 말했다.
"도망친 녀석들이 이 원주시 주변에 대해서 조사해 둔 게 있을까?"
내 말에 서지현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사람들은 서큐버스들에게 사육당하고 있었으니까... 쓸만한 정보가 있을지 확신이 안 서네요."
"글쎄, 오히려 그래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르잖아? 어디에 누가 있으니 돌아다닐 때 조심 할 것 같은 거."
안동에서 우리가 마마 델리를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의도적으로 서태혁이 마마 델리가 있는 지역을 피했기 떄문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수색해야 하는 범위를 많이 좁힐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은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신은 쉬고 있어요, 제가 뒤져볼테니."
딱히 더 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혹시 방금 전에 내 컨디션이 나빠 보였어?"
내 말에 서지현이 잠깐 눈을 흘기고 있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건 아니었죠."
나와 서지현은 함께 환자실을 나왔다. 복도에 붙어있는 건물 지도를 확인한 나는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병원 엄청 크네. 안동역이 초라해 보일 지경인걸."
안에 머무르던 사람이 수백 단위었던 게 이해가 된다. 이제와서 보니 병원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쥬디 기념관이라고 부르는 건물이었고, 1층과 지하를 제외한 건물이 통째로 입원 병동으로 쓰이는 모양이었다.
"사실 상 숙소로 쓰이고 있었을던 모양인데. 다른 곳을 먼저 뒤져보죠."
서지현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지도의 한 건물을 툭 쳤다. 응급센터 건물이다.
"가장 가까운 건물부터 가보자."
엘리베이터는 작동하지 않으니까, 우리는 후레쉬를 든 채 어두운 계단으로 향했다.
"푸후."
서지현이 옆에서 그런 소리를 내고는 코를 막았다. 계단에서는 밤꽃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이게 무슨 냄새인지 몰랐는데... 알고 나니 기분이 영 찜찜하네요."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서큐버스들은 안전지대로 들어 올 수 없을텐데. 왜 이렇게 냄새가 진동하는 걸까요."
"이런 냄새가 나는 데 꼭 여자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어차피 서큐버스들의 페로몬에 찌들어 있었으면 1시간이 멀다하고 발정했을텐데. 안전지대에는 서큐버스가 들어올 수 없다. 그러면 흥분한 남자가 하게 될 일이라는건 뻔하다.
서지현이 내 말에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듣고 싶지 않아요."
그 와중에 나는 무슨 생각이 들어서 서지현을 바라봤다.
"잠깐만, 서큐버스가 이 안으로 들어 올 수 없다면..."
"주인이 목장 안으로 들어 갈 수 없다면 가축이 밖으로 나와야겠죠."
당연히, 그 와중에 이 안에서 남자들이 자가발전해서 만들어낸 식량도 서큐버스들이 챙기러 들어 올 수는 없다. 게다가, 오는 길에 확인했던 건 하나 더 있었다.
"그 서큐버스들, 커다란 말통에 뽑아낸 식량을 한 가득 채워서 부지런히 옮기던데."
서지현이 내 말을 알아듣고는 잠깐 눈썹을 모으고 있다 대답했다.
"서큐버스들의 식량 저장고는 안전지대 밖 어딘가에 있겠군요."
"그 장소를 찾아내서 날려버리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 장소로 쳐들어와서 죽인 남정네들의 숫자는 장난이 아니다. 안 그래도 식량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가축이 꽤 많이 줄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저장해 놓은 식량까지 날아가버리면 당장 녀석들은 식사를 해결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식량을 저장해 놓는 곳이니..."
"그래, 강한 서큐버스들이 지키고 있을 확률이 높지."
단순히 식량을 채취하서 나르기만 하는 서큐버스나, 정찰을 다니는 서큐버스들과는 다른, 더 높은 계급의 서큐버스들이 지키고 있을거다. 당연히 녀석들이 꼬리로 뿌리는 페로몬도 이전까지 경험해 본 것과는 또 다른 짜증나는 물건이겠지.
녀석들이 뿌리고 다니는 페로몬에 대항 할 수단이 필요하다.
"일단은 안전지대 안에 그럴듯한 힌트가 있기를 기대해보고, 발견되지 않으면 안전지대 밖을 수색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