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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61화 (61/237)

# 61

병원 남녀

안전지대인 세브란스 병원이 자리잡고 있는 일산동 근처에 도착하니, 해가 저물어가는 중이었다.

생각보다 늦어졌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세 발짝 걸으면 하늘 위를 싸돌아다니는 서큐버스들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두 명에서 세 명 정도가 서로 짝지어서 돌아다니고 있었으니까.

서너 마리가 한 짝을 지어서 손에 말통 같은 걸 들고 나르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는데, 숨어있는 건물 근처로 마침 서큐버스가 지나가길래 손거울로 확인할 수 있었다.

"... 참나."

무슨, 우유라도 짜는 건가. 도대체 병원 안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무슨 꼴이 되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녀석들이 부지런히 나르는 말통 안에 들어있는게 모조리 다 서큐버스들의 식사다.

병원에 머무르는 생존자들은 매 끼니 식사 대신 비아그라랑 씨알리스를 반반 섞어서 복분자주에 말아먹기라도 하는 건가. 그렇게 서큐버스가 지나가는 걸 확인한 나는 곧바로 건물에서 나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있지, 요즘 너무 많이 먹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 말하는 거야?"

"아니, 너 말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여기는 무조건 지나쳐야 하는 골목이다. 나는 녀석들의 시선을 피해 근처로 숨어들었다. 좀 가라.

녀석들은 내 간절한 바람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슬쩍 손거울로 살펴본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서큐버스의 식사가 아닌 것 같은데. 옥상에 걸터앉은 서큐버스들 옆에는 커다란 박스 하나가 놓여있었다. 손거울로 살펴보니, 안에는 사람들이 먹을 법한 식량들이 한 가득 들어있었다. 쌀은 물론이고, 도대체 어디에서 구해온 건지 달걀이나 생고기 같은 것까지 보인다. 서큐버스가 자기 옆에 놓인 박스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고 그걸 툭 건드렸다.

"우리가 왜 인간들 먹일 사료까지 챙겨야 하는 거야?"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에서 깨 버렸다고 하니 어쩔 수 없잖아. 여왕님이 이번에 새로 얻게 된 몸에 굉장히 만족하셨으니까. 가축들은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손끝 하나 건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고. 컨디션을 유지시키려는 생각이시겠지."

서지현을 말하는 모양이다. 뭐야, 서지현 지금 자는 거 아니었어? 옆에 서큐버스가 흐흠,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자기 허리 위에 양 손을 올린다.

"허리는 내가 쬐끔 더 가늘던데?"

"하지만 가슴은 그 여자가 훨씬 컸잖아? 게다가, 저번에 얻은 몸은 마음에 안 드는게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여왕님이 거의 통째로 뜯어 고쳐 써야했고. 이번에는 딱히 고쳐 쓰시지 않을 모양이더라. 털이 적은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야."

말을 마친 서큐버스가 툭 하고 자기 다리 사이를 건드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큐버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처음에 보고는 털이 없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 이야기를 나누던 녀석들 중 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제르멩이 불려간 모양이더라. 그 뭐였지. 대학교? 여튼 유리가 잔뜩 붙어있는 건물. 놀러 갔는데 안 보이더라고."

"또? 새로 정한 거처가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으시는 모양이네."

그 말을 들은 서큐버스가 옆에서 헹,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도 우리가 있는 곳 보다 몇 배는 좋지 않을까?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호위들은 좋겠다. 나도 여왕님이랑 같은 곳에 살아봤으면."

대화를 훔쳐들어보니 여왕이 머무르는 곳은 바깥을 나돌아다니는 서큐버스들은 모르는 모양이다.

"식사, 부족해?"

그 질문에 방금 전에 부러움을 토로하던 서큐버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나도 팔팔하게 젊은 녀석에게서 짜낸 게 먹고 싶어. 양이 문제가 아니게 되니, 질을 따지게 되는 거야."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큐버스가 방금 전 말한 녀석의 콧잔등을 검지로 툭 친다.

"그럼 빨리 이거 전해주고, 받으러 나온 녀석들에게서 좀 짜내보자."

그 말을 끝으로 두 서큐버스가 상자를 챙겨 들도 다시 날아가기 시작했다. 향하는 방향은 세브란스 병원 쪽이다. 그럼 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서지현 먹일 음식이었던 모양이네.

녀석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는 다시 세브란스 병원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씨, 무슨 냄새가 이래."

병원 정문에 도착한 나는 얼굴을 구겼다.

바람을 타고 흘러나오는 냄새는 참 여러가지로 사람 짜증나게 하는 냄새였다. 7월 쯤 밤나무 숲에 들어가면 이런 냄새가 날까. 하여튼 남자가 맡고 있기에는 참 다방면으로 불쾌하다. 하긴, 목장에서 소똥냄새 나는 거랑 크게 다를 것도 없긴 하다.

문 앞에 서 있던 녀석 중 하나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을 건넨다.

"모르는 얼굴이네, 신입이구만? 천국에 온 걸 환영한다."

천국이라. 내가 천국 갈 일은 없겠지만, 천국이 밤꽃냄새가 가득한 병원일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녀석의 말에 웃으며 대꾸했다.

"세상이 망했는데 천국이 어디있겠어."

내 말에 녀석이 하하핫, 하고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자넨 운 좋은거야. 자, 마시라고."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 유리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안에는 누런 액체가 들어있다.

"이거 뭐야?"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여왕님의 몸에서 나온 성수라네."

성수 같은 소리 하네. 때깔 보니 오줌이구만.

"마시라고, 세상이 달라 보일거야. 세상 존재하는 모든 쾌락 중 으뜸을 마음껏 누릴 수 있을거야. 내가 보장하지. 오면서 그 분들 못 봤나?"

나는 그 말에 손에 들고 있는 병을 휘휘 흔들다가 말했다. 딱 봐도 이걸 마시면 큰일이 나겠지. 무슨 사이비 종교가 교주 오줌을 성수랍시고 마신다고 하지만... 이건 그냥 오줌도 아니고 박쥐날개 달고 있는 색정광들 중 최고 색정광의 오줌이다. 마시게 하는 것도 분명히 무슨 효과가 있으니까 마시라고 하는게 확실하다.

내가 병을 들고 가만히 있자 녀석들의 표정이 약간 굳는다.

"뭐해, 빨리 마시라고. 천국의 문이 기다리고 있어."

아무래도, 그냥 흘러들어온 생존자로 위장해서 뭔가를 해보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사실, 내가 사람을 하나 찾고 있는데. 서지현이라고, 동행하던 여자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고 병을 밖으로 휙 던져버렸다. 곧장 나를 향해 뭐라고 말하려는 녀석의 목줄기에 바람개비를 박혀들어간다.

"니들이 뭔가 나쁜 짓을 하려고 든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야."

녀석이 크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며 피거품을 물고 끄윽끄윽 거리다가 그대로 죽었다.

- 정문, 정문 방면에 수상한 녀석이 있다!

한 녀석이 옥상에서 확성기를 들고 바락바락 외치는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하나, 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리에 힘을 빡 넣고 그대로 훌쩍 뛰어올라 세워진 벽을 뛰어넘었다. 바리케이트 너머에서 부지런하게 움직이던 사람들 중 몇 명이 작은 병을 꺼내서 내 주변에 마구 던지기 시작한다.

날아오는 병을 살펴봤지만 뭐가 들어있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던졌다는 건 안에 뭐가 들어있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게 뭔지는 안 봐도 뻔하다.

"그럴 것 같았지."

서큐버스에게 지배 받는 녀석들이고, 녀석들이 사람 맛탱이를 가게 하는 방법은 페로몬이다. 마법이 아니니까 저렇게 병 같은 거에 담아놓을 수도 있겠지. 내가 설마하니 그것도 생각 못했을까봐. 그래서 짜잔, 바람개비를 충전해 놓았다.

"내가 씨, 니들 앞에서까지 그 추태를 반복 할 거 같냐."

야한 게임의 여주인공 같은 신세가 되는 건 한 번으로도 충분한 경험이었어, 새끼들아. 다시는 안해, 네버.

버튼을 누르고 바람개비를 휘두르자 곧바로 검을 타고 폭풍이 쏟아진다. 날아오던 병들이 폭풍을 맞아 그대로 바닥에 떨어진다. 아마, 안에 담겨 있었을 서큐버스들의 페로몬은 그대로 바람을 타고 싹 쓸려나가 버려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히이이이익!"

오히려, 그 바람을 타고 날아간 페로몬에 휩쓸린 건 나에게 병을 던진 녀석들이었다. 그러니까, 야외에서 기체 가지고 뭔가를 할 때는 바람을 조심해야 하는 거야.

몸을 흠칫흠칫 떨면서 주저앉아 침을 질질 흘리는 모습은 같은 남자로써, 참 보고 있기 추하다. 나도 아까 저런 꼴이었으려나.

저 병이 얼마나 더 있을 지는 모르지만. 나는 곧바로 녀석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서큐버스들에게 협조하고 있던 녀석들이다. 그리고 녀석들이 얼마나 서큐버스에 미쳐 있는지는 아까 경험해봐서 안다. 말로 설득해서 다시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

몇몇 녀석들은 나와 비슷하게 쾌감으로 덜덜 떨리는 몸을 억지로 움직여 대항하기 위해서 기를 썼지만, 나머지는 온 몸을 타고 도는 강렬한 쾌감으로 인해 눈이 풀린채 주저앉아 팔다리를 휘적거릴 뿐이었다.

애초에 서큐버스가 주는 쾌락에 빠져서 안전지대를 서큐버스들에게 바치고, 스스로 가축이 되는 걸 선택한 녀석들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지.

"하아."

바람에 흩날려간 페로몬이 아직 주변에 약간은 남아 있어서 그런지 살짝 몸이 저릿거리기는 한다. 하지만 아까 경험했던 것에 비하면 양반이었고, 내가 상대해야 하는 녀석들은 나보다 훨씬 더 맛이 가 잇었기에 처리가 어렵지는 않았다.

"젠장, 뭐 이렇게 많아."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게 내 쪽으로 시작한다. 남자만 한 300명 정도는 될 것 같은데. 하긴, 서큐버스들이 남자를 죽일 이유는 없었겠지.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소중한 가축들이잖아. 덕분에 이 커다란 병원 안에는 사람도 많았다.

아까 전에 그 서큐버스 두 마리 처리하면서 숫자를 꽤 많이 줄였다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제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게다가 끔찍한 광경이었다.

"바지는 좀 입고 나와라 새끼들아."

문명인이 코끼리 덜렁거리면서 무기 들고 야외로 튀어나오다니. 수만년 전 원시인들도 그러고 돌아다니지는 않았겠다.

"다시 던져!"

수십 개의 병이 다시금 내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했다. 슬프게도, 바람개비는 아직 충전 중이다. 아까 그 녀석들 다 정리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았을 줄 알았거든.

"씨발."

나를 향해 던저지는 병의 숫자에 눈 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폭력 시위 장소에서 평화 방패에 의존해 화염병 막는 경찰 아저씨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리고 뭐, 절대로 아까와 같은 상황에 처하지 않겠다고 했었나?

짜잔, 그런데 절대라는 건 없군요!

다시금 전신의 감각이 미쳐날뛰기 시작한다. 그런 나를 보고 20대 정도 되어보이는 청년 한 명이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겨누며 외쳤다.

"붙잡아 족쳐!"

녀석의 외침을 들은 나는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니가... 이 병원에 사는 서큐버스 가축들 리더냐? 젊은 자식이 야한 것만 밝혀서는. 뼈 삭아 이 새끼야, 뼈."

말을 마친 나는 내 쪽으로 밀려오는 녀석들을 향해 바람개비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다행인지 뭔지, 이 자식들이 하도 페로몬이 담긴 병을 많이 집어 던져서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 녀석들도 페로몬에 휘말려 덩달아 빌빌거리며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도 사람이 많아서, 싸우던 내 몸에 상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다. 거지같은 건, 그 상처에서 느껴지는게 통증이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끈적거리는 쾌감이라는 거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한쪽 팔에 날카로운 레이피어가 박혀든다.

팍, 하고 시야가 검게 변했다가 돌아올 정도의 쾌감. 입으로 주르르 흘러내리는 침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나는 녀석들과 쌈박질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날붙이가 몸을 스치고, 둔기가 몸을 때릴 때 마다 가출하려 드는 정신의 멱살을 붙잡아 다시 머리통 속으로 구겨 넣으며 나는 소리쳤다.

"서지현 내놔, 이 씹새들아아아!"

내가 오늘 이 자리에서 나홀로 복상사라는 충격적으로 꼴사나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해도, 이 병원은 싹 청소한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콧 속으로 그 지랄맞은 색정광 박쥐들의 페로몬이 아니라 다른 냄새가 코 속을 살짝 건드린다. 뭐가 불에 타는 냄새다.

"대장, 병원에 불이...!"

그 말에 사람들을 지휘하던 녀석이 외쳤다.

"신경 꺼, 지금은 저 녀석에게 집중해!"

"여왕님의 새 몸이 있는 곳입니다!"

그 말에 이 남자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외쳤다.

"당장 가서, 그 년부터 꺼내!"

그리고 나는 휘몰아치는 강제적인 쾌감 속에서도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서지현이 붙잡혔다고 구해줘요 용사님! 나는 연약하고 수동적인 공주라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답니다! 같은 지랄맞은 소리를 하며 있을 인물이 아니긴 하지. 딱 봐도 내가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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