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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58화 (58/237)

# 58

welcome to 원주

서지현은 비로봉에서 오현석과 합류하는데 성공한 다음에 깊게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갑작스럽게 떨어지게 되서 걱정했는데 무사히 도착했구나. 자신이 외쳤던 소리도 들었던 모양이고. 오현석은 비로봉에 도착하자마자 서지현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며 말했다.

"그러고 있다가 얼어죽으면 묘비도 못 세워줄텐데."

서지현은 그 말에 젖은 옷을 입은 채로 덜덜 떨며 말했다.

"그렇겠죠? 그럼 거기서 구경하지 말고 그 배낭에서 빨리 옷이랑 모포를 좀 꺼내주시는 건 어때요?"

서지현의 말에 오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있어봐."

그리고 잠시 뒤에, 서지현은 모포와 옷을 받을 수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모포를 뒤집어 쓰고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몸은 좀 어때."

오현석의 말에 서지현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문제 없어요. 좀 춥긴 한데. 곧 나아질테고."

그래, 라고 말한 다음 오현석이 다시 침묵했다. 서늘한 바람이 슥 하고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지나간다. 그리고, 희미한 향기가 서지현의 코 끝을 간질인다.

"서울까지는 도착하지 못했네요."

서지현의 말에 오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하고 많은 곳 중에 치악산 근처라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서지현 같아도 그럴 것 같다. 기껏 안동에서 벗어나 헬기 타고 바로 서울로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울 근처에 도착하기는 커녕 원주시 근처의 치악산에 뚝 하고 떨어져버리다니.

"힘내요. 그래도 이만큼 온 게 어디에요."

서지현의 말에 오현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지현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고맙다."

대답한 다음 오현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지현이 감고 있는 모포를 조금 더 끌어올려 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확 하고 퍼지는 향긋한 내음. 지금 맡고 있는 냄새가 진짜인지, 아니면 서지현이 만들어낸 가짜 냄새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묘해지는 중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물에 젖어서 차갑게 식었던 몸이지만 순식간에 따뜻해지기 시작한다. 아니, 따뜻함을 넘어서 좀 뜨겁다. 뺨이 화끈거리고, 움찔거리며 내뱉는 숨이 스스로 느끼기에도 뜨거울 지경이다.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해보지만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없다. 오현석이 모포를 끌어올려주면서 손가락이 목 언저리에 닿자, 짜릿한 감각이 순간적으로 목덜미를 타고 올라온다. 그 바람에 놀라서 몸을 흠칫하자 오현석이 잠깐 서지현을 보다 말한다.

"말과는 다르게 좀 안 좋아 보이는데. 감기 걸린거 아니야?"

"그런 건 아니에요."

서지현은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몸이 너무 안좋다 싶으면 꼭 말해."

서지현이 픽 웃었다. 안좋으면 지금 이 상황에서 뭘 어쩌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서지현은 자신의 체온이 한 층 더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도 주변에 불을 지르다보니 이제는 몸 안에도 불이 난 건가.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쓸데없는 소리.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네 몸 상태라면 당연히 신경 써야지."

오늘 따라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 하는 걸 보니, 뭔가 또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걸까. 서지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깐 오현석을 바라봤다. 그 와중에 오현석이 입을 열었다.

"하늘에서 떨어질 때 느꼈는데."

서지현이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오현석이 모포를 둘러싸고 있는 서지현의 옆에 다가와 앉으며 말했다.

"무섭더라."

서지현이 픽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거잖아요. 낙하산이 있다고 해도..."

서지현은 하던 말을 뚝 멈춰야 했다. 오현석의 손이 모포를 덮은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 거 말고."

머리 속에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래, 라는 단어가 한 아름 차오른다.

"네가 떨어지는 모습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못 찾으면 어떡하지."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던 서지현이 약간 갈라지는 것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럴리가, 그... 있겠어요."

"그럴 수도 있었잖아."

오현석은 말을 마치고 나서 모포 위에 올려둔 손으로 서지현의 어깨를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그 손길이 느껴질때마다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 서지현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많이 걱정했어."

그 말을 듣자 몸 안에 돌고 있던 피가 다 머리로 쏠려서 터질 것 같다. 덕분에 피가 부족해진 걸까, 모포 안에 들어있는 팔다리가 힘이 빠져 축축 늘어진다. 지금 혈압계로 혈압측정하면 얼마나 나올까. 뇌졸증 오기 진적 수준까지는 올라 갈 것 같은데. 머리가 핑핑 어지러우니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모포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져서, 모포가 흘러내린다. 오현석의 손은 이제 서지현의 옷 위를 쓰다듬고 있었다. 어깨를 쓰다듬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자, 힘이 빠져 축 늘어져있던 서지현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간다.

"..."

이건, 와... 잠깐, 야. 머리 속에 떠오르는 글자들이 문장이 아니라 단어로 바뀌기 시작한다. 오현석이 자신 위에 올라타 있었다.

"내 생각보다, 나에게 네가 많이 소중했던 것 같아."

지금 저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 하나 하나가 서지현의 마음에 꼭 드는 소리 뿐이다. 사실 듣기 전까지는 서지현 자신도 몰랐지만, 듣고 나니 꼭 듣고 싶었던 이야기들 뿐이다.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어절 하나하나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줄 수 있을지 생각하며 고르고 골라낸 단어처럼 완벽했다.

뻗어진 손이 서지현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 뿐인 행동인데 기분이 둥실둥실, 허리가 휘어지려고 한다. 서지현은 기운이 빠진 채 늘어져 있던 손을 가까스로 들어올려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오현석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저기, 부탁 할 게 있는데."

서지현의 말에 오현석이 대답했다.

"그래. 뭔진 모르겠지만. 뭐든지 들어줄게."

서지현이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서울에서 해야 할 일을 다 끝내시고 나서 딱히 계획 같은게 없으면요. 함께..."

말을 하던 중, 오현석이 웃음을 흘리며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지현아. 서울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아. 너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다른 건 필요 없어. 나에게는 네가 제일 소중하고, 가장 중요하고... 필요해."

싸아, 하는 느낌과 함께 뛰고 있던 심장에 싸늘한 면도날이 박혔다. 그 말을 듣자마자 몸에서 떨림이 뚝 멈췄다. 머리로 몰려 있던 피도 다시 확 하고 아래로 내려가버렸다. 미친듯이 달궈져서 괴롭던 몸의 뜨거움이 한 순간에 날아가버리고, 몽롱하게 풀려 있던 눈에 다시 차가운 빛이 감돌기 시작한다. 누가 그녀를 알몸으로 벗겨놓고, 그대로 얼음물에 던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꽉꽉 머리 속을 채우고 있던 격렬한 감정이 쓸려나간 빈 자리에 싸늘하게 식은 이성이 자리잡았다.

"왜 그래, 갑자기."

오현석의 질문에 서지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말.

너무나도 듣고 싶었던 말이다. 이 사람이, 나를 제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방금 전 들은 말이 어쩌면, 서지현의 모든 행동과 감정 밑바닥에 깔려있던 가장 원초적인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 누군가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해줬으면 하는 바람. 그녀가 살아왔던 삶에서 가장 갈망하던 것을 한 번에 전부 꿰뚷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저 말은 오현석의 입에서 절대 나올 수는 없는 말이기도 했다. 나오면 안될 말이다. 서울을 가지 않겠다니, 오현석이?

일찍이, 서울에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할 떄 오현석의 표정은 서지현의 머리 속에 박혀 있다.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끌어올린 것 같은 짙은 분노와 증오.

매일 그 소중한 포인트를 써가면서 최현우의 죽음을 확인하고, 형기를 다 마치고 중년이 된 다음에도 찾아가서 최현우를 죽이겠다고 할 정도로 복수심을 불태우는 오현석이, 서울을 가지 않겠다니.

듣고 싶은 대답이라고 다 들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누군가가 절대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도 있는 법이다.

"이거... 꿈이구나. 아니면 지금 내 위에 올라타 있는 너는 괴물이겠지."

둘 중 어떤 것도 아니라면 지금 내 눈 앞에서,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은채 서울로 가는 걸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오현석을 설명 할 수 없다.

"무슨 소리야, 확실한 현실이야."

서지현은 표정을 굳히고 눈 앞의 남자를 노려봤다.

"내 위에서 당장 내려와. 깔고 앉은 채로 머리가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서지현의 말에 오현석이 당황한 표정으로 약간 몸을 뒤로 뺀다.

"... 혹시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나? 기분 나빴으면 미안. 나는 그냥, 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게 기뻐서."

서지현은 천천히 쓰러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코 앞에 오현석의 얼굴이 있다. 서지현은 그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안 꺼져?"

말투 보라지. 이젠 아주 오현석 흉내도 안 내는구나? 그 순간, 물이 한 바가지 쏟아진 수채화처럼 주변을 둘러싼 모든게 흐려지기 시작한다. 옅어지고, 흩어지기 시작한다. 코 앞에 있던 오현석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흘러내리고, 옅어지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을 뜨자 새하얀 천장이 보인다. 먼저 확인한 건 인기척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하."

이 장소는 서지현에게 익숙하다.

"병실이잖아."

병실은 어딜 가도 비슷한 풍경이기 마련이지. 게다가 입고 있는 옷도 환자복이다. 그럼 병원이라는 건데. 누워있는 침대에 원주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단어가 인쇄되어있다.

"사람들이 잡아온 모양이네."

잡아온 다음에 자는 여자 몸에서 옷을 벗기고, 환자복으로 갈아입힌 다음에 그냥 방치했다는 거다. 여태동안의 있었던 몇 번의 경험을 미루어 보면 그럴리가 없다. 지금쯤 사타구니가 엄청나게 아프고 시트에 피가 묻어있고 뭐 그래야 하는게 정상이겠지.

서지현의 몸에 강제적인 성행위의 흔적은 없었다. 기적같은 확률로 안전지대 안에 여자들만 있거나, 남자들이 전부 동성애자거나 한게 아닌 이상에야 너무 이상한 상황이다.

고개를 살짝 돌려 팔과 다리를 바라봤다. 짙은 보라색 빛을 흘리는 쇠고랑에 팔과 다리가 묶여 있다. 부숴버리려고 마력을 사용하려 들었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 보라돌이를 산 채로 잡아먹은 것 같은 색깔의 쇠고랑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는 모양이다.

마력을 전부 쏟아넣자. 그제서야 허공에 만들어진 불꽃이 쇠고랑과 이어진 사슬에 닿았다.

쇠사슬은 불꽃으로 시뻘겋게 달궈졌지만, 그것 뿐이다. 이걸로는 안될 것 같은데. 혹시 녹일 수 있을까 기대를 해봤지만, 그 정도의 힘을 낼 수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방금 전 불꽃으로도 충분히 죽겠지?"

사람이 찾아온다면, 벗어날 방법이 생기지 않을까. 서지현은 그런 생각을 하며 묶여있는 팔을 살짝 당겨보았다. 쇠사슬에서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아무도 없는 병실 안에 묶여 있어서는 달리 방법이 없다.

그렇다고 바깥 상황도 잘 모르는데 바로 비명 같은 걸 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안전지대에 몇 명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기절한 사람을 데려와서 쇠고랑을 채운 걸 보면 분명히 호의적인 녀석들은 아니니까. 머리를 굴리던 서지현이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오현석 씨가 올거야. ... 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도."

서지현의 입가에 살짝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여기가 세브란스 병원이고, 안전지대다. 오현석이 서지현을 찾지 않고 그대로 포기해도 여기로 올 수 밖에 없다. 랜드 마크를 찾는 동안 머무를 거점이 필요할테니. 스스로 입 밖으로 낸 말에 서지현은 어쩐지 좀 가슴이 아픈 느낌을 받았다.

이 병원으로 오현석이 올 거라 확신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단언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엎치건 뒤치건 오현석이 여기로 향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 타이밍에 맞춰서 소란을 피우는게 벗어날 확률이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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