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래서 나는 탈옥했다-54화 (54/237)

# 54

하늘로 가는 길

물론 가장 좋은 상황은 우리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쓸데없이 힘을 뺄 일이 없고, 김인철은 곧장 헬기를 띄울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 김인철은 애인을 동행한 채 우리와 함께 헬기를 조종하러 가는 중이었다.

혹시 잘못되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큰일 아니냐는 식의 주장을 했다고 한다. 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기할 게 거의 없는 동네니까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납득된다.

"애인은 많이 나아진 모양이네."

도로를 걸어가면서 슬쩍 던진 말에 김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잊고 살 수는 없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니까. 네 말이 맞았었어. 복수한다고 끝이 아니었지."

말하는 와중에 애인이 김인철의 손을 잡았다. 뭐, 그런 극한 상황에서도 남자 걱정해서 몹쓸짓 당하는 걸 무릅쓰고 영양바를 보낼 정도였으니 금슬은 좋은 모양이다.

할 일이 있어서 좋겠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도로를 마저 걸어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도시의 건물들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그 자리를 논과 밭, 숲 같은 것들이 대신하기 시작한다.

"외진 곳에 있다고 하더니, 생각보다 더 외졌네요."

서지현의 말에 김인철이 대답했다.

"헬기도 꽤 소음이 심하지 않습니까. 일이 많으면 하루에도 몇 번을 뜨고 가라앉아야 하는데. 주변에 민가가 많으면 곤란합니다."

민원 피하려고 하다보니 외진곳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다.

"괴물들이 주변에 있을까요?"

그건 모를 일이다.

"여긴 안동시의 외곽이야. 괴물들이 순간이동 해서 자리를 잡는게 아니라면..."

붉은 포식이 사라진 이후에 괴물들이 안동시로 스물스물 기어들어오기 시작한다면 당연히 자기들 머무를 집을 찾는 것은 외곽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있을 확률이 있겠네요."

그렇겠지. 나는 바람개비를 손에 쥔 채로 말했다.

"김인철, 헬기가 올라타면 바로 하늘로 붕 뜨는 건 아니지?"

내 말에 김인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헬기가 뜨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간을 벌기 위해서는 방법이 하나 말고는 없다. 서지현이 내 질문과 김인철의 대답을 듣고는 양 손으로 에노테르를 잡았다.

"그럼 천상 항공관리소 근처에 뭐가 자리잡고 있으면 싹 쓸어내야겠네요."

그래야겠지. 괜히 효율성 따지며 헬기만 지키려고 들다가 까딱 실수해서 헬기가 상하면 그대로 서울로 날아간다고 하는 나의 꿈은 헬기와 함께 작살이 난다.

"괜찮을까요?"

김인철의 애인은 꽤 불안한 모양이다. 나는 그 말에 픽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우리 걱정하는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입맛을 다셨다.

"그럴리가 있겠어요? 괴물 걱정하는거겠죠. 마음씨도 고와라."

나와 서지현의 대화를 김인철의 애인은 따라가는데 실패했다. 뭐, 굳이 따라올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알게 될 테니. 걸어가고 있는 와중에,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 이 이상 다가오지 마라.

나만 들은 소리가 아닌 모양이다. 서지현이 곧장 말했다.

"마력이 느껴져요. 어디에서 소리가 날아오는지 숨기고 있네요."

"그럼, 그 마력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마력도 흩어져 있어요. 역추적은 힘들 것 같아요."

말을 했다는 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뭐 하나 가져올게 있어서 그런데. 그냥 보내주지?"

좀 큰 거긴 하지만 그거 없다고 너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닐텐데.

- 여기는 우리가 머무르기로 했다. 이 이상 접근하면 공격한다.

나와 서지현은 서로를 잠깐 바라봤다. 오지 말라고 안 갈거면 우리가 왜 그 개고생을 했겠냐. 우리는 당연하다는 듯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옆에서 뭔가가 슉 하고 날아오는게 보인다.

"...?"

확인하자마자 시간이 느려진다. 이건 화살이잖아. 내 쪽으로 날아오는 화살을 살펴보던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보이는 것은 제대로 만들어진 화살이었다. 화살촉은 톱니바퀴처럼 가공되어있고, 희미하게 보라색 액체가 떨어지는게 뭘 바르기까지 한 모양이다.

어디서 날아온 거였지.

곧장 손을 뻗어서 화살대를 잡아서, 화살이 날아온 곳으로 다시 던졌다. 쐐액, 하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화살이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간다.

근처의 숲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15명 정도 되는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인 줄 알았는데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남자 여덟과 여자 일곱으로 구성된 녀석들은 외모는 꽤 미형이었지만 목덜미 아래로 드문드문 달라붙어있는 비늘 조각들이 보인다.

"우리는 경고했다. 여기에 흐르는 피는 너희들의 어리석음 때문이리."

녀석들 중 하나가 우리에게 말을 걸고, 나머지 녀석들은 그 사이 우리에게 활을 겨누고, 그대로 시위를 놓았다. 날아오는 화살들, 뒤편에서 들리는 비명.

바람개비를 휘두르고, 날아온 화살은 검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진다.

뒤편에서 들리던 비명이 멎었다. 그리고 눈 앞에서 우리를 적대적으로 바라보던 녀석들의 표정도 변했다. 나는 바닥에 박힌 화살 하나를 발끝으로 툭 건들며 말했다.

"좋아, 나도 예의 상 경고 하나 하지."

말을 마친 나는 손에 든 검을 가리키고 말했다.

"얌전히 길 비켜. 가져갈 거 있으니까. 한 번 만 더 방해하면 이 검보다 키 큰 새끼들은 다 뒤진다."

옆에서 서지현이 중얼거렸다.

"와, 칭기스칸이 들었으면 자기가 한 말 배끼지 말라고 외치며 말발굽으로 시게 밟았겠네요."

"죽었잖아."

칭기스칸이 언제적 사람인데. 저작권법도 그렇게 늙은 사람의 말은 보호해주지 않아. 내 말에 서지현이 음, 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그렇네요."

그 와중에 녀석들이 다시 활시위에 활을 거는 걸 봤는지, 서지현이 녀석들 중 하나의 발 밑으로 화염덩어리를 쏘아보냈다. 날아간 화염구가 폭발하고, 가까스로 폭발에서 벗어난 녀석이 벙찐 표정으로 서지현을 바라본다.

"사람 대화 하고 있는데 무슨 손버릇이 그 따위에요?"

뭘, 대화 이미 끝났구만. 나는 잠깐 녀석들을 보다가 말했다.

"난 경고했다."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막아!"

녀석들 중 몇 명이 달려드는 나를 보고 놀라서 쌍검을 뽑아들고 나를 향해 휘두른다.

그렇구만. 이거 하나 하나가 다 위협으로 평가 되는 거구나. 확 느려진 시간 속에서 나는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녀석들의 무기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냥 막 만든 무기가 아니다. 날도 바짝 서 있고, 빛도 반짝거리는데다가 손잡이에는 제법 장식까지 근사하게 달려 있다.

이성이 있는 수준을 넘어서 무슨 부락 같은 걸 만들고 사는 괴물들인 모양이다. 헬기장에 다가가면 무슨 벽돌집 같은 거 지은 건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녀석들의 검을 피해서, 그대로 한 녀석의 목을 날려버렸다. 잘려나간 목이 바닥에 툭 떨어지고, 나머지 녀석들도 어딘가 한 부분이 각각 몸에서 독립하는데 성공했다.

비명소리가 들리고, 아직 사지가 멀쩡한 녀석들 중 몇 명이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한다. 녀석들 중 하나가 바람개비에 다치고도 아직 살아있는 놈들에게 손을 뻗는다.

치료 마법 같은 걸 쓰는 걸까. 녹색의 빛 같은게 잠시 다친 괴물들의 몸에 머무르지만.

그런 걸로 나을리가 없지. 아예 피x로처럼 몸에서 팔을 쑦쑥 뽑아내던 새끼들도 회복을 하지 못했는데.

"어째서."

마법을 시전하고 있던 여자... 괴물이니 암컷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게 다른 괴물들의 상처가 치료되지 않는 걸 보고 침을 꿀꺽 삼킨다. 그리고 이내 녀석들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쫒을까요?"

나는 서지현의 말에 대답했다.

"여기에서 저 두 사람 지켜줘."

여기에 두 사람을 그냥 두고 갈 수는 없다. 두고 갔다가 무슨 일 생기기라도 하면 헬기는 완전히 물 건너가니까. 그렇다고 저 녀석들을 그냥 보낼 수도 없다. 그냥 짐승도 아니고 제대로 만들어 낸 무기를 사용하고 적대적인 상태에서도 어쨌든 대화가 성립할 정도의 지성은 있는 녀석들이다. 그냥 저렇게 보냈다가는 조금 있다가 성날 말벌떼처럼 자기 친구들을 한 바가지 끌고 와서 귀찮은 일을 만들거다.

서지현이 여기에서 두 사람 곁에 남고, 나는 녀석들을 쫒아서 조져야 한다.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곧장 녀석들을 뒤쫒기 시작했다.

"찾았다."

뒤쫒는게 어렵지는 않았다. 곧바로 어깨 쪽으로 손을 뻗자, 감싸고 있던 갑옷이 살짝 열리며 단검자루가 손에 잡힌다.

자, 어디 얼마나 쓸만한지 한 번 보자고. 나는 곧장 손에 쥔 단검을 녀석들을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도는 투명한 광석으로 빚어낸 칼날들이 허공을 갈라 뒤쫒고 있떤 녀석들의 몸에 박혀들기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이야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딱히 멀리 있는 녀석들을 제압할 방법이 없던 내 입장에서는 뭐 던질거라도 하나 생긴게 큰 도움이 된다. 다리에 단검이 박힌 녀석을 지나치며 그대로 머리를 수확한 나는 나머지 녀석들도 처리하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그나저나, 니들은 도대체 우리 말을 어떻게 할 줄 아는거냐? 뭐 이 세상에 오면서 번역기라도 하나씩 받았나보지. 말을 못 알아듣는 것 보다는 알아듣는 편이 더 좋으니 나는 불만 없다. 뒤편에서 내가 던진 단검에 동료들이 하나씩 죽는 것을 확인한 괴물 중 하나가 달리던 와중에 몸을 확 틀어 나에게 화살을 날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화살이 날아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시간이 느려지고, 나는 정확한 타이밍에 손을 뻗어 화살을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

"다시 가져가."

손에 쥔 화살이 다시 녀석에게로 돌아간다. 원래 화살통에 들어있었던 화살은 이제 녀석의 몸통을 화살통 삼아 박힌다. 꽤 독한 독인지, 박히고 몇 초 지나지도 않았는데 흰자의 실핏줄이 다 터지고 입술이 퍼렇게 물들어 침을 질질 흘리다 쓰러진다.

그렇게 20분 정도 숲 속을 뛰어다닌 끝에, 처음 나와 서지현에게 경고하며 등장했던 15마리의 괴물들은 모두 시체가 되었다. 이렇게 정리될 거면 경고는 도대체 왜 한 거야.

[레벨업하셨습니다.]

아하, 살점 공예가를 잡고 나서 레벨업을 왜 안하나 했었는데 레벨업하기 직전 수준의 경험치를 받았었던 모양이다. 레벨이 높아져서 그런지 이젠 레벨업도 쉽지가 않네.

"서지현이 아쉬워하겠는걸."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내가 남고 서지현을 가라고 할 걸 그랬나. 나만 레벨업하니 뭔가 좀 미안하네. 일을 마친 나는 다시 서지현이 기다리고 있을 곳으로 향했다.

"저런,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김인천과 그 애인은 뒤에서 떨고 있었고, 서지현의 주변에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타버린 시체들이 무럭무럭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서지현은 손에 들고 있던 에노테르의 끝 부분으로 땅을 툭 하고 친 다음에 말했다.

"마법으로 본거지에 있던 나머지 녀석들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녀석들의 근거지에 남아있던 것들이 서지현이 있는 장소를 덮쳤고... 결과를 보시다시피. 숯불구이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서지현의 발 밑에 신음하고 있는 남성형 괴물 하나가 있었다.

"저건 뭐하러 살려 둔 거야?"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근거지 위치를 알아내려고 했죠."

"결과는?"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산림항공관리소에 자리를 잡고 있는 모양이에요."

저런, 그럼 가다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겠네. 대화를 마친 서지현이 다시 살벌한 표정을 짓고 쓰러져서 신음하는 괴물의 가슴을 발로 눌렀다.

"말해, 근거지에 남은 게 몇 마리지?"

말하면서 한 손에 불덩이를 띄운 서지현의 모습에 괴물이 공포에 질렸다. 서지현은 손에 들고 있는 불덩이를 녀석의 고간 근처에 띄워놓은 채로 가느다란 미소를 띄웠다.

"아니면, 소중한 거 하나 잃고 나서 대답할래?"

"말하면... 살려 줄 건가?"

서지현이 그의 말에 대답했다.

"아니, 하지만 고통없이 죽여줄 생각이야. 혹시 수비드라는 단어 알아? 온도를 잘 조절하면 산 채로 오랜시간 온 몸이 익는 고통을 느낄 수 있는데."

이야, 손에 채찍 하나 들고 얼굴에 나비모양 마스크 하나 쓰고 있으면 분위기가 확 살겠는걸.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