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맨홀 아래
파이프에 난 구멍을 바라보던 나는 서지현이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확인하고 말했다.
"에노테르는?"
내 말에 서지현이 등에 짊어진 작은 가방을 가리켰다.
"이거, 제 값을 하네요."
내가 상점에서 돈 주고 산 가방이다. 최대 보관 용량이 800L나 된다. 가방 자체의 무게와 부피는 언제나 20kg으로 고정된다. 스킬 사고 이거 사고 나니 포인트가 500pt 남았었지. 내가 서지현이 짊어진 가방을 보는 사이 서지현은 파이프를 살펴보고 말했다.
"구멍이라. 이러면 파이프가 아니라 피리잖아요. 엄청 수상하네."
우와, 방금 전에 내가 그 비슷한 생각했는데. 파이프의 구멍을 살펴보던 나는 입을 열었다.
"안쪽에서 바깥 쪽으로 뚫린 구멍이야."
파이프에 난 구멍 언저리가 불쑥 솟아올라 있다. 밖에서 안쪽으로 구멍이 났으면 저런 모양이 나올 수 없지. 잠깐 더 구멍을 바라보던 나는 서지현을 보며 말했다.
"한 번 잘라보자."
파이프 안 쪽을 봐야 할 것 같다.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 가방에서 에노테르를 꺼내 파이프에 대고 휘둘렀다. 서걱, 하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가 잘려나간다.
"심지어 깨끗하기까지 하네."
잘려나간 파이프 안쪽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깔끔했다. 과장 조금 보태면 파이프 안쪽을 혀로 핥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이거, 하수도 파이프 맞지?"
내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들어올린 맨홀에 하수도라고 적혀 있었잖아요."
오물을 옮기는 파이프 내부가 이렇게 깨끗한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파이프 쪽으로 코를 들이밀고 살짝 호흡을 해보았다. 역시, 시체 썩는 냄새는 이 파이프에서 나는게 확실하다.
"으윽."
서지현이 내 모습을 보고는 싫다는 표정을 짓는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니까 니가 참아. 나는 잘려나간 파이프의 다른 쪽으로 코를 가져가보았다.
"이쪽은 시체 냄새가 좀 덜한 것 같은데."
어디까지나 느낌이지만, 이미 60을 훌쩍 넘어버린 감각 능력치니까. 내가 느낀게 아마 맞을거다.
"그럼..."
서지현은 말을 하고 나서 검지를 들어 잘려나간 파이프의 한쪽을 가리키고, 그대로 선을 그어 반대편 단면을 가리켰다.
"이런 식으로 뭔가가 이동했을 수도 있단 거네요."
그렇겠지. 일단 여기에서 확인 할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어차피 우리가 저 좁은 하수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올라가자."
우리는 다시 사다리를 타고 맨홀 뚜껑 위로 올라왔다. 다시 맨홀 뚜껑을 닫고 나서, 잠깐 맑은 공기를 퍼마시던 나와 서지현은 지도를 함께 살펴보았다.
"여기는 어때."
안동시 수질환경사업소. 하수 처리장은 여기에 있을거다. 우리가 찾아낸게, 랜드 마크와 연관점이 있다면 하수 처리장으로 향해 볼 만하다.
"그러네요. 수하동이라... 거리도 적당하고. 여기라면 구역 밖에 해당되지 않을 것 같아요. 안동역에서 6km 정도 떨어져 있네요."
안동 대학교와 안동역 사이의 거리도 그 정도 이상으로 나온다. 구역을 벗어나는 위치는 아니다.
"게다가 꽤 고립된 장소야."
생존자가 안동시에 들어선다고 해도 안동역이 목적지인 이상 여기로 향할 일은 없을 것이다. 뭔가 숨어있기에는 딱 좋지.
"그럼, 내일은 수질환경사업소를 목적지로 두고 움직일까요."
"그러자."
이제 늦은 오후가 되어서 햇빛이 많이 약해졌다. 아마, 조금 있으면 석양이 깔리기 시작할 것이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이 시간에 갔다가 밤에 딱 걸리게 되면 좋을게 없다. 합의를 마친 우리는 다시 안동역으로 걸음을 돌렸다.
안동역으로 돌아왔는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다. 김아은과 역 안의 생존자들이 공터에 모여있고, 그 앞에는 사람 한 무리가 서 있었다. 새로 안동역에 도착한 녀석들인가. 숫자로 치면 한 15명 정도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왜 그 지시를 따라야 하나고."
"안동역에 모인 생존자들은 서로 힘을 합쳐도 부족할 지경이야.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오면 안되지."
김아은이 다소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대꾸했고, 무리의 리더로 보이는 녀석이 대답했다.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 지시에 따르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알아?"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잖아. 함께 물자를 모으고, 모은 물자는 나눠쓴다. 내가 뭐 수면 시간을 통제하는 것도 아니고,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압수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그 와중에 나와 서지현은 잠깐 서로 시선을 마주치고는 안동역의 공터 쪽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살벌한 상황에 미안. 다녀왔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옆에 서 있는 새로 들어온 무리를 슬쩍 보고는 한 마디 했다.
"친구들도 안녕? 처음 보는 얼굴들이네."
내 말에 녀석들이 나를 응시한다. 나는 그 시선을 무시하고 김아은을 지나쳐 가려고 했다. 그 와중에 김아은이 나를 보고 작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조금 도와줬으면 하는데."
나는 김아은의 말에 대답했다.
"우리는 랜드 클리어를 끝내면 안동을 떠날 사람들이야. 우리 도움 받아서 통제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떠나고 난 다음은 어쩌게?"
녀석들을 내가 조져놔서 말을 잘 듣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떠나고 나면 또 어떻게 변할 지 모른다. 내 말에 김아은이 대답했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나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으니, 일단은 저 녀석들을 제압하는데 도움을 좀 주라. 이 분위기면 서로 한 번 쌈박질을 붙을 거 같은 상황이야. 그럴 수는 없잖아."
일단 이 상황을 타개하는게 우선이다 그건가. 더부살이 하는 와중인데 이 정도의 도움은 주는게 예의겠지.
게다가, 일 마치고 돌아왔는데 김아은이 안동역의 주도권을 잃게 되는 상황은 나도 좋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와 서지현이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랜드 클리어를 위해 사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김아은과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진 일이니까.
그녀가 안동역의 주도권을 잃으면 일이 꼬이지. 나중에는 몰라도 우리가 랜드 클리어를 끝내기 전까지는 김아은이 무조건 이 장소의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나는 걸어가던 몸을 휙 돌리고는 녀석들을 바라봤다.
"친구들, 여기는 우리 구역이야. 대충 분위기로 눈치는 깠을텐데."
내 말에 리더로 보이는 녀석이 대답했다.
"무슨 땅문서라도 가지고 있나?"
그건 아니고.
"이야기 들어보니 무리한 요구를 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먼저 들어와 있던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발톱 내밀고 앙앙거리지 말고."
좋게 좋게 가자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겠지.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우리는 이미 우리끼리 충분히 잘 살아왔다. 필요한 건 머무를 장소 뿐이지, 협조나 보호가 아니야. 우리는 여기에 머무를 거다."
나는 녀석의 말에 웃었다.
"머무르면서 필요한 물자는?"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이미 충분히 쌓여 있을텐데, 좀 나눠 쓰자고."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대답했다.
"말 참 길게 하시네요. 그냥 날강도질 하고 싶다고 하면 될 것을."
잠깐 녀석들을 바라보던 나는 녀석들의 대장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현재 안동역의 물자와 사람들을 관리하고 있는 건 여기 있는 이 김아은이라는 아가씨다. 그녀의 부탁을 못 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안 들어주는 사람을 받아들이는 건 꺼려져. 나가던가, 아니면 곱게 김아은의 요청에 응하는 편이 어떨까."
내 말에 녀석이 대답했다.
"그래? 네 놈은 그냥 꺼지는게 어떨까."
곧바로, 나는 녀석의 복숭아 뼈를 발로 차버렸다.
"으어...?!'
으어는 무슨 으어야. 곧장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나는 눈을 마주친 채로 말했다.
"어? 크게 말해봐 임마. 잘 안 들리잖아."
뒤편에 있던 녀석들이 무기를 뽑아들고 나에게 달려든다. 나는 녀석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로 공격을 피하면서 남아있는 한 주먹으로 녀석들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잠시 뒤에, 공터에는 쓰러져서 빌빌 거리며 신음을 흘리는 녀석들이 한 가득 자리잡았다.
여전히 내 손은 녀석들 두목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그대로다. 나는 녀석의 머리채를 놓아주고는 입을 열었다.
"야."
녀석은 숨을 몰아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안동역에 남고 싶으면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협조적으로 행동해라."
말을 마친 나는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김아은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더 할까?"
"아니, 충분해. 있다가 잠깐 찾아갈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지현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에 되게 양아치 같았어요."
서지현의 감상이었다.
"사람 따라 맞춰주는거지. 앞에 서 있는 녀석이 양아치인데 '나가시는 문은 저쪽입니다 신사 여러분.' 같은 소리를 할까?"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으아, 그건 조금 오글거리네요. 그럼..."
서지현은 어딘가로 향하더니, 잠시 뒤 옷을 갈아입고 내 쪽으로 빨랫감을 건네주었다. 물수건으로 몸도 닦은 모양이다.
"자, 깨끗하게 빨아주세요. 속옷은 없으니까 이상한 용도로 쓸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러시겠지.
"그래? 있으면 유용하게 썼을텐데."
내 말에 서지현이 등짝을 한 대 가볍게 때렸다. 나도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나오자. 김아은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까 도움은 고마워."
감사 인사를 전한 김아은이 작게 한숨을 쉰 다음에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랜드 클리어는 너희들 만의 일이 아닌 것 같아."
"너희들이?"
내 질문에 김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앞으로 들어오는 생존자들의 상당수는 저런 식으로 반응 할 것 같아. 나름대로 규모가 있는 집단을 만든 다음에 안동역으로 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렇겠지.
"하지만 그거랑 랜드 클리어가 무슨 상관이 있는거야."
내 말에 김아은이 대답했다.
"현재 안동에는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안동역 말고는 없어. 우리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는 녀석들도 어쨌든 밤을 피하기 위해서는 안동역에 머물려 들 테고... 우리가 그걸 막으려고 든다면 무조건적으로 무력충돌이 발생하게 될 거야."
안동역으로 들어가는 건 양보 할 수 없는 문제니까.
"대체재가 없다는 거군."
내 말에 김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안동의 다른 장소를 요새로 만들어 안전을 확보 할 수 있다면 굳이 우리와 싸워서 부상자가 생기는 일을 피하고, 다른 곳에 자리를 잡을텐데...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잖아."
말을 마친 김아은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에 그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어. 이럴거면 차라리 서태혁이라는 녀석이 했던 방식... 반항 할 여지도, 체력도 남겨놓지 않는게 정답이었나?"
말을 하고 나서 김아은이 고개를 휙휙 젓고는 나를 바라봤다.
"어쨌든,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안동의 랜드 클리어는 최대한 빨리 매듭지을 필요가 있어. 혹시 일손이 필요하면 말해줘. 우선적으로 지원을 해줄게."
김아은의 말에 서지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사람은 우리로도 충분해요. 거기까지 신세를 질 수는 없죠."
사실 짐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차마 그렇게 말은 하지 못했지만, 김아은도 서지현이 한 말을 대충 이해한 모양이다.
"그렇겠구나. 그럼, 다소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물자 지원을 넉넉히 해주는 편으로 방침을 잡을게. 지금은 안동역의 요새화보다 랜드 클리어가 더 중요한 것 같아."
아무리 안동역을 튼튼하게 요새화 해놓아도 소용이 없다.
몇 번 막아낸다고 해도 안동에 들어선 녀석들에게 안동역 말고 달리 머무를 곳이 없는 이상, 김아은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는 녀석들은 목숨을 걸고 안동역을 공격 할 것이다. 조직화된 생존자들이 안동으로 들어설 때 마다 그런 수비를 반복하면 결국 무너진다.
"문제 없어. 우리도 빨리 랜드 클리어 하고 뜨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니까."
대충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잠시 뒤에 김아은 쪽에서 우리에게 보낸 물자를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었다.
"이야, 급하다고 생각하기는 한 모양이네."
배 터지게 먹어도 되겠다. 서지현이 물자를 보다가 말했다.
"김아은 씨는 좋은 리더네요."
그러게. 처음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위험성을 빠르게 파악하고, 대처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뭐 피해 망상 같은 거에 걸려서 날뛰는 것도 아니고, 벌어질 법한 일을 정확히 짚어냈다.
"뭐, 김아은이 더 적극적으로 협조한다면야 우리에게 나쁠 건 없잖아."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빨래는 내가 하니까, 식사는 네가 준비해줘."
내 말에 서지현이 엄지를 올리며 대답했다.
"냄새 나면 다시 빨게 할 거에요."
"맛 없으면 다시 만들어야 할 거다."
대화를 마친 나는 빨랫감을 챙겨서 나가고, 서지현은 냄비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