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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36화 (36/237)

# 36

골목대장의 끝

지하 계단을 통해서 내려가는 길은 유독 가스로 막혔다. 거의 다 되었다. 이제 서지현이 철도를 타고 도착할 때까지 서태혁을 여기에 붙들어 두기만 하면 된다. 서태혁이 나를 노려보다가 픽 웃었다.

"멍청한 새끼, 잔해로 계단을 못 막게 하면 뭐 하나. 어차피 유독 가스로 인해서 막힌 거나 다름 없는데."

그건 나도 알아 새끼야. 그리고 나 그렇게 멍청한 녀석 아니야.

"지하 보도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에 잔해로 막히지 않은 곳은 여기랑... 안동역 건물로 이어지는 계단들 뿐이지."

즉, 지하 보도에서 유독가스가 발생하면, 그 연기가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이 계단을 빼면 죄다 안동역 건물 내부와 이어진다. 달리 말하면, 발생한 유독 가스는 여기로 빠져나가지 못하면 죄다 역 건물 안으로 향한다는 뜻이다.

만약 서태혁이 잔해를 먼저 무너뜨렸다면, 여기에서 서태혁을 막을 필요는 없었을거다. 어차피 나올 구멍을 잃은 유독 가스는 자연스럽게 역 건물 안을 채우게 되었을테니.

지금 상황에 문제점이 있다면, 지하 보도에 만들어진 유류고는 역 건물보다는 플랫폼 쪽과 더 가깝기 떄문에 연기의 상당량이 여기로 빠져나올 것이라는 거지만, 그건 해결 방법을 생각해 두었다.

서태혁은 그런 나를 보고 있다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넌 사람 잘못 건드렸어."

"신기하단 말이지. 다들 죽기 전에 날 보고 그렇게 말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감방 들어가기 전에 죽인 새끼들도 나를 보면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나한테 그 대사 친 녀석 중에 살아있는 녀석은 없어.

먼저 나를 향해서 달려든 것은 서태혁과 함께 있던 간부들이었다. 다들 익숙한 얼굴이다 간부 테스트 합격하고 나서 계속 얼굴을 볼 일이 있었으니까.

"이 개새끼가!"

이제는 굳이 눈치 봐가면서 살살 싸울 필요가 없다. 게다가 상대해야 하는 것도 거의 서른에 다다르는 간부들이 아니라, 고작 너덧 명 정도 되는 간부들일 뿐이다. 그 정도라면...

나는 곧바로 발에 프릭션 컨트롤을 건 채로 미끄러지며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한 녀석의 배에 칼을 꽂아넣고, 다른 녀석은 머리를 손으로 눌러 땅바닥에 머리통을 처박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역 앞 플랫폼에는 시체 다섯 구가 생겼다. 그 사이에 서태혁은 자기 주변에 굵직한 나무 줄기를 만들어낸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놀랐냐?"

저 아저씨 표정이 영 좋지 않네.

"테스트에서는 일부러 힘을 숨겼군."

나는 검을 한 번 휘둘러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주인공은 원래 그래야 한다고 하더라."

아니면 말고. 나도 상황이 상황이라서 그런거지, 두 번 하고 싶은 일은 아니야. 당장 족쳐버리고 싶은 새끼가 눈 앞에서 거만 떨고 있는데 꾹 참는게 생각보다 어렵더라. 서태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린 놈의 새끼가."

"뭐라는거야, 늙은 놈의 새끼가."

나이가 레벨도 아니고 숫자가 크면 뭐 좋은게 있나? 그리고 임마, 나도 나이가 삼십이 넘었어. 교도소 안 들어갔으면 결혼해서 애기 분유 값 걱정하고 있었을 걸. 어린 놈의 새끼라니 말이 좀 심하잖아.

마빡에 확 튀어나온 핏줄을 보니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녀석이 손을 휘두르자 곧바로 나를 향해서 나무 줄기들이 쏟아진다. 퍽퍽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줄기가 플랫폼의 바닥을 작살내지만, 내 몸을 때리는데 성공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쉬지 않고 마찰 계수를 조절하면서 플랫폼 위을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바닥에 짙은 붉은색의 원이 만들어지고 나는 내 몸이 확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무슨 디버프 같은 건가. 녀석은 그걸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다시금 나무 줄기를 휘둘렀다.

"미안, 아무래도 그런거 나한테는 상관 없나보다."

나는 지금 달리는 중이 아니라, 미끄러지는 중이다. 한 번 속력이 붙은 상태라면 몸이 무거워졌다고 속력이 곧바로 줄지는 않는다. 몸이 둔해진 것과는 상관 없이 나는 바닥에 만들어진 붉은 원을 빠르게 벗어나는데 성공했다. 원 밖으로 나오자 무거워졌던 몸이 다시 가벼워진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바닥에 그려진 원은 피하는게 좋겠다.

"이건 또 뭐야."

내 진행 경로의 땅이 살짝 들썩이는 걸 확인한 나는 그대로 곧장 바닥에 칼을 박아넣었다. 그 즉시 몸이 땅에 박아넣은 칼을 중심으로 원을 그린다. 들썩거리던 땅에서 확 하고 나무줄기가 솟구쳐 올라온다. 잘못했으면 내 배를 저 나무 줄기가 꿰뚫었을 거다.

원을 한 바퀴 그린 나는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내고 다시 앞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녀석의 마음이 점점 더 급해지는 모양이다. 그렇겠지, 지금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가보지는 못하고 나랑 놀아주고 있어야 하니. 솟구친 나무 줄기들이 그대로 나를 향해서 채찍처럼 휘둘러진다.

아, 저걸 다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휘둘러지는 나무 줄기 중 하나가 틈을 노려,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이건 못 피한다. 나는 검을 들어 채찍을 막았다.

"커허."

강렬한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떠서 날아간다.

"잡았다!"

내가 착지할 예정인 장소의 땅이 들썩이는게 보인다.

"아닌데? 놓쳤어, 이 빙신아."

날아가던 내 발은 땅에 닿자 기다렸다는 듯이 곧바로 쭉 뒤로 미끄러진다, 칼을 후려친 나무 줄기의 힘까지 더해져서 뒤로 빠지는 속도는 아까보다 훨씬 빠르다. 솟구친 줄기는 결국 나를 놓치고 다시 공기를 꿰뚫었다.

"태혁아, 학습 능력이 없냐? 아니면 늙어서 새 재주를 배우지 못하는 거냐."

기왕에 받은 가속력이니까. 나는 최대한 속력을 잃지 않게 주의하며 방향을 돌려 서태혁에게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곧바로 서태혁은 자신의 주변에 나무 줄기를 일으켜 몸을 감싸 내 공격을 막으려고 하지만...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칼을 그대로 서태혁을 향해 확 집어 던졌다.

내가 미끄러지는 속도에, 던진 힘까지 받아서 날아간 검은 굉장한 속도로 회전하며, 서태혁이 자신의 몸을 완전히 나무줄기로 감싸기 전에 녀석의 팔을 자르는데 성공했다. 나무 줄기로 감춰진 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한 줄기 구슬픈 비명. 감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나는 곧바로 플랫폼 주변에 쓰러져 있는 시체 중 하나의 검을 손에 쥐었다.

"흐으... 흐으..."

서태혁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팔을 집어 든 채로 나를 노려본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다. 갑자기, 서태혁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검붉은 빛을 흘리기 시작한다.

"으으으윽!"

뭐야 저게. 바닥에 굴러다니던 시체의 살점이 약간 뜯어져 나와 서태혁의 잘려나간 팔뚝을 몸과 다시 이어준다. 하지만, 잘려나간 팔을 다시 이어붙인 접합점이 이상하다.

시체의 살점이 몸에서 떨어져 나간 팔을 다시 이어주기는 했지만, 구성 요소가 변하지는 않았다. 시체에서 뜯어져 나간 시뻘건 살점은 그 상태 그대로 서태혁의 팔을 몸과 이어주고 있었다. 즉, 접합점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시체의 살점 그대로다.

게다가, 서태혁의 상처를 메꾼 살점 중에는 손가락이 하나 포함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접합점에 손가락 하나가 툭 튀어나와 있다.

서태혁은 잘려나갔던 팔을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안동 대학교를 최초 통과하고 얻은 장비지."

"저기, 태혁아. 이런 말 하면 좀 그럴지 몰라도, 그렇게 자랑스럽게 웃으며 자랑 할 몰골은 아닌 것 같다."

미친 놈아. 팔뚝에 손가락이 달렸잖아, 손가락! 누가 보면 체르노빌에서 아침 식사로 우유에 플루토늄 말아 먹은 줄 알겠다.

"나중에 뜯어내고 멀쩡한 살점과 피부로 다시 채우면 된다."

"아 그래? 좋겠네."

사람 몸이 무슨 지점토도 아니고. 시체가 쥐고 있는 무기를 다시 쓰는 거랑, 시체 살점을 뜯어내서 몸을 복구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데. 저걸 어떻게 처리하지. 검으로 베어내는 걸로는 괜히 모습만 더 정신 사납게 바뀔 뿐이지, 피해를 줄 수는 없을 것 같다.

갑자기 뒤편에서 화염이 밀려와 서태혁의 몸을 확 휩쓸어 버린다.

"지금 많이 바빠요?"

익숙한 목소리군.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는 좀 바뻤어. 오랜만이다, 서지현?"

"뭘요, 2주 밖에 안 지났잖아요."

다가와서 나를 슥 훑어본 서지현이 슥 뭔가를 내밀었다. 바람개비다. 좋아, 이걸로 다 모였어. 곧바로 나는 바람개비의 버튼을 눌렀다.

"유용하게 썼..."

말을 하던 서지현이 하던 말을 멈췄다. 다시 시체들의 살점이 뜯어져 불꽃에 휩쓸린 서태혁의 몸에 엉겨붙는다. 그리고 서태혁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상태에서도 다시 회복한다고? 서지현이 살짝 질린 표정을 한 채 서태혁이었던 뭔가를 바라본다.

"안동역은 안전지대라고 들었는데요. 왜 괴물이 있지."

"믿긴 힘들겠지만, 사람이야."

구분 없이 마구 엉겨붙은 살점으로 회복된 서태혁은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차라리 안동 대학교에서 봤던 그 살점 덩어리들에 더 가까운 모습이다.

"소용 없다."

살이 타올랐던 고통은 그대로 전해지는 모양인지 서태혁은 자리에 선 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너 입에서 연기 나는데?"

소용 없기는 개뿔. 더럽게 아파 보이는구만. 입에서 시커먼 연기를 무럭무럭 토해내는 서태혁을 보던 나는 곧바로 녀석에게 돌진해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는 검을 향해 녀석이 손을 뻗어, 그대로 칼을 붙잡았다. 칼날을 붙잡은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린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러 내 옆구리를 때렸다. 눈 앞에 번쩍, 하고 별이 보인다.

"커허..."

녀석의 손에 쥐어진 검을 억지로 비틀어 뽑아낸 나는 다시 녀석을 향해서 공격하기 시작한다. 내가 공격 할 떄 마다, 서태혁은 주먹을 휘두르거나, 나무 줄기를 만들어 나를 공격하려고 한다. 그 때마다 발동하는 후발선타로 녀석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내 몸을 스치고, 내 공격은 녀석의 몸에 박혀들기를 반복한다.

"이 독한 새끼가."

서태혁은 내 공격을 막거나 피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몸이니 상처 입는 건 더 이상 신경쓰지 않겠다는 건가. 피하거나 막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공격. 서지현의 불꽃으로 몸이 타올라도, 내가 휘둘른 칼에 맞아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도 서태혁은 아랑곳 하지 않고 계속 나를 향해 공격을 쏟아낸다.

이렇게 나오니 오히려 더 까다로워졌다. 내가 휘두른 검이 녀석의 모가지를 뎅겅 썰어버린다. 동시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서태혁이 만들어낸 나무 줄기가 내 배를 후려친다. 나는 입에서 피를 약간 흘리면서 뒤로 쭉 밀려난다.

"불공평하잖아."

나는 다치고, 너는 회복되고? 뭐 이따위야.

서태혁은 계속 시체에서 살점을 뜯어내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지만, 이제 그걸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시체의 장기, 뼈 같은 것마저 시체에서 뜯어져 나와 서태혁의 몸에 달라붙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서지현이 질러놓은 불이 전신을 태우는 중이다. 저게 괴물이 아니라면 뭐가 괴물일까.

"내 꺼다. 이 안동역도, 비축한 물자도...!"

저 강렬한 탐욕. 누가 보면 땅문서라도 있는 줄 알겠다.

녀석이 발악하는 와중에, 내 시선이 반지로 향한다. 이젠 손가락에 끼워진게 아니라 살점에 파묻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는 몰골이다.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한계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하긴, 안동 대학교 통과는 꼴랑 700pt를 주는 미션이었는데, 거기에서 나온 장비가 무한재생 같은 사기를 칠 리는 없지.

"내꺼... 내꺼어!"

마침내, 반지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서태혁의 몸을 억지로 유지해주던 살점들이 녹아내린 아이스크림처럼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레벨업 하셨습니다.]

내 눈 앞에 레벨업 했다는 문자가 두 번 떠오른다. 레벨이 올랐다면, 죽은게 확실하다.

[살점 접착제(손상됨) : 망가지고 부러진 것은 이어붙이면 됩니다. 살점 공예가는 저주에 가까운 자신의 권능으로 반지를 오염시켜, 생물의 육신조차 이 단순한 법칙의 통제를 받게 만들었습니다. 착용자가 입은 부상을 주변 시체의 살점을 이용해 완전히 회복시킵니다. 반지에 깃들어 있던 권능이 전부 소모되었습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서지현에게 장난스럽게 내밀었다.

"자, 가질래?"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말했다.

"어머, 애인에게 처음 주는 반지가 망가진 반지에요?"

"애인?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거야."

오는 길에 뭐 잘못 먹었나. 내 말에 서지현이 대답했다.

"안동 대학교 입구를 지키던 녀석 중 하나가 저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말하던데요."

'그 자식, 애인은 죽었다고 했는데?!'

서지현의 어설픈 성대모사를 들은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조금 머슥해지는군.

"둘이 왔다가 하나만 왔으면, 왜 혼자 왔는지 설득해야 할 거 아니야."

내 말에 서지현이 픽 웃고는 대답했다.

"2주 못 봤다고 장난도 못 칠 정도로 어색해 질 줄은 몰랐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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