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
골목대장의 끝
작업반장이 되고 나서 해야 하는 일은 그렇게까지 어렵거나 하지는 않았다. 작업원에게 거친소리 하며 압박하는 건 크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어차피 생존자들은 안동역까지 끌려오면서 이미 안동시로 진입하는 입구를 지키는 녀석들에게 호되게 당해서 그런지 반항할 생각이 거의 없었으니까.
작업반을 총괄하는 민찬휘도 처음 이틀 정도는 나를 예의주시 했지만, 이후 큰 문제 없이 일처리 하는 모습을 보고 난 다음부터 나를 주시하던 시선이 많이 거두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약속한 당일이 되었다.
작업원들이 물자를 챙기는 동안, 나는 수첩을 펴고 계획을 점검하는 중이었다.
"성공시켜야지."
서태혁은 낮에도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플랫폼의 철도 위에 놓인 낡은 객차에 머무르며 일을 한다. 지금도 거기에 머무르고 있을 것이다. 안동 대학교를 빠져나온 서지현이 안동역으로 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안동역 공터 근처에 사람을 동원해 빠르게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간부들을 총동원해 그쪽을 방어할 준비를 할 것이다.
어차피 간부들을 제외한 안동역의 생존자 대부분은 전투 요원은 아니다. 애초에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쉬지 못해도 서태혁이 별로 신경쓰지 않는 이유가 위기시 전력으로 쓸 생각이 없기 떄문이니까. 괜히 전투를 시키지도 않을 녀석들을 잘 먹이고 잘 재워봤자 반란의 가능성만 커진다.
"서둘러라!"
나는 일하는 작업원들을 재촉하면서 무전기를 바라봤다.
오후 3시, 이쯤 되면 슬슬 신호가 올 떄가 되었는데.
- 안동 대학교 부근에서 비상 사태가 발생했다. 현 시간부로 외부로 나가있던 작업반, 즉시 복귀한다. 반복, 외부로 나가있던 전 간부 즉시 복귀한다. 모든 작업을 취소하고 복귀해. 확보한 물자는 포기하고, 신속히 복귀하도록.
민찬휘의 무전이다. 시작되었구나. 나는 그 무전을 듣자마자 곧바로 작업원들을 보며 외쳤다.
"짐 버려. 복귀한다."
내 말에 작업원들이 잠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짐 버리라고!"
내 말에 작업반 녀석들이 황급히 짐을 버렸고. 나는 작업원들을 호령해서 안동역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30분 정도 뒤, 안동역에 도착한 나는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 보도 아래에 쌓아놓고 있던 나무 판때기와 마대 자루 같은 것들이 꺼내져 차에 실리는 중이다.
"무슨 일입니까?"
내 말에 민찬휘가 곧바로 대답했다.
"오현석, 작업원들 여기 두고 너는 당장 물자 실은 트럭 타고 법흥교 쪽으로 향해!"
그래, 역시 우선은 거기로 간부들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하겠지. 안동 대학교에서 국도를 타고 이동한다면 무조건 법흥교를 통과해야 안동역에 도착 할 수 있다. 다리 시작점에 바리케이트를 쌓고, 다리 끝에 바리케이트를 하나 더 쌓아올리면 안동역으로 향하는 길목이 콱 막혀버린다.
그래봤자 의미 없는 일이지만.
나는 민찬휘의 지시에 살짝 당황하는 표정을 지은 다음 곧바로 트럭에 올라타 법흥교 쪽으로 향했다. 이미 여기도 난리다. 트럭이 가지고 온 폐타이어와 나무판이 쌓이고, 챙겨온 마대자루에 작업원들이 모래를 집어넣어 바리케이트를 보강하는 중이다.
나는 급조 중인 바리케이트 뒤 편에 서 있는 간부를 보고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야 갑자기?"
내 말에 녀석이 슬쩍 나를 보고는 다리 너머를 향해 턱짓을 했다. 시커먼 연기 줄기가 올라오는 중이다.
"안동 대학교에 무슨 일이 생긴 모양이다. 바리케이트를 쌓으면서,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확인해보려고 간부 몇 명이 향했는데 녀석들도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어."
아, 그 녀석들 어떻게 된 건지 안 봐도 알 것 같다. 서지현이 구워버렸겠지 뭐.
머릿수가 깡패라고, 못 먹고 피곤한 작업원이라도 수십명이 달려들어서 바리케이트를 쌓기 시작하니 30분 정도 뒤에는 꽤 그럴듯한 바리케이트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작업원들은 다시 안동역으로 복귀하고, 간부들은 바리케이트에 남아 정면을 주시하기 시작한다.
안 올거다. 이미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 두었거든. 서지현은 오후 여섯시가 되어서야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간부들은 그렇게, 절대 오지 않을 서지현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젠장, 벌써..."
오후 5시 10분이다. 간부들이 슬슬 시간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젠장,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건 맞는 거야?"
옆에서 한 녀석이 궁시렁 거리는 말에 나는 대답했다.
"그게 아니면, 왜 안동 대학교로 보낸 녀석들이 아직도 안 오겠어."
"오현석 말이 맞다."
민찬휘가 내 말에 수긍하자, 옆에 녀석이 민찬휘에게 말했다.
"하지만 대장, 벌써 다섯 시가 넘었습니다. 이러다 잘못하면... 우리 여기에서 밤을 맞아 다 죽습니다. 녀석들 그거 노리는 거 아닙니까? 그 뭐냐, 안동에 들어오려고 하면 문자로 다 알려주지 않습니까."
그래, 그 정도는 다들 예상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세상에 예상한다고 막을 수 있는 일만 있는 건 아니다. 하다못해 체스도 알면서 당할 수 밖에 없는 체크 메이트가 존재하는 법이잖아. 민찬휘가 어금니를 꽉 문 채로 다리 너머를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복귀한다. 바리케이트는 역 건물 앞 공터에 새로 만든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 결국 민찬휘의 지시와 함께 우리는 바리케이트를 구성하던 물건들을 최대한 트럭에 챙겨 안동역으로 복귀했다.
다시 돌아온 안동역에서 작업원과 간부의 구분 없이 다시 바리케이트를 쌓기 시작했다. 서태혁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자, 이제부터가 중요한데... 역 건물 안에 들어선 나는 곧바로 민찬휘가 어디로 향하는지 살폈다. 지하 보도 쪽으로 향한다. 그렇다면 아직 서태혁은 그 낡은 객차 쪽에 있다는 뜻이다. 나는 곧바로 짐을 나르는 척 하면서 여섯시 반 쯤 지하 보도로 향했다.
지나가는 와중에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김인철을 발견했다. 맞아, 김인철은 살려둬야지. 나는 녀석 쪽으로 다가가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눈치봐서, 최대한 빨리 역 건물 밖으로 나가. 안에 있으면 위험하다."
김인철은 내 목소리를 듣고 잠깐 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 보도에 쌓여있는 물자 중에 지금 저 녀석들이 주로 챙겨야 하는 건 바리케이트로 쓸 만한 물건들이다.
기름은 바리케이트 쌓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재빠르게 하우스 비닐이 담긴 상자 몇 개와 미리 봐두었던 굵직한 쇠막대 한 개를 챙겨들고, 지하 보도에 유류가 쌓여있는 쪽으로 몰래 향했다.
며칠 간 야행성 동물이 되어 조사하면서 확인한 결과, 유류가 저장된 장소는 중고등학교에 흔히 설치되어있는 연두색 철제 울타리가 막고 있다. 울타리의 문은 사슬이 감긴 자물쇠가 막고 있다.
"한 번 열어본 자물쇠니까."
여기를 조사 하면서 미리 한 번 열어봤으니, 다시 여는 건 껌이다. 나는 종이클립 두 개를 자물쇠의 열쇠구멍에 쑤셔넣었다.
찰칵. 순식간에 자물쇠를 풀고 유류가 쌓여있는 곳에 들어섰다.
"이번에 중요한 건 불이 아니라 가스지."
유류는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말통 따위에 보관 중이니까. 그 통이 불에 녹으면서 나오는 연기에, 챙겨온 비닐이 타면서 나오는 연기까지 더하면 제법 독한 연기가 피어오를거다. 나는 휘파람을 불며 기름이 들어있는 통 하나를 열어 비닐이 담긴 박스에 뿌리고, 남은 기름은 유류가 담긴 말통에 뿌렸다.
작업 반장으로 일하면서 물자를 챙기는 와중에 꼬물친 지포 라이터를 꺼내들고, 철제 울타리 밖으로 나와 다시 사슬을 감고 자물쇠를 잠궜다. 바리케이트로 쓸 만한 물건을 나르느라 시끄러운 가운데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오현석 너 지금...!"
고개를 돌리니, 물자를 총괄하는 간부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곧바로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녀석에게 집어 던졌다. 날아간 검이 녀석의 이마빡에 박혀든다.
"아, 미안. 내가 지금 조금 바뻐서. 나중에 말해."
지포 라이터에 불을 땡긴 나는 그대로 철제 울타리의 틈 사이로 녀석을 휙 던지고, 굵은 철막대를 챙긴 채로 달리기 시작했다. 플랫폼으로 통하는 계단은 온갖 잔해물로 박혀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짝 손을 내밀어 계단을 막고 있는 잔해를 만져보니, 손에 느껴지는 감촉이 없다. 아직 안 막았구나. 그렇다면 플랜 A로 계속해도 될 것 같다.
"서둘러야지."
곧바로 환상을 무시하고 계단을 오른 나는 나무 줄기로 묶여 있는 잔해를 확인하고, 굵은 철봉을 그 잔해 덩어리 아래에 쑤셔 넣었다.
"다음은..."
밤에 미리 가져다 놓은 큼지막한 돌덩이를 철막대 아래에 받친 나는 그대로 온 힘을 다해 철막대를 내리 눌렀다. 철봉을 누르는 양 손의 마디가 하얗게 질리고, 철봉이 서서히 휘어진다.
"으그그그그극!"
많은 걸 바라는 것도 아니다. 조금만 움직여 기울이는데 성공하면, 결국 자기 무게에 넘어갈 것이다.
굵은 철막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고, 나무 줄기에 묶인 잔해가 살짝 들린다. 다시 힘을 풀자 잔해가 계단 쪽으로 살짝 기울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 틈을 타서 다시 한 번 힘을 준다.
그렇게 서너 번, 마침내 나무줄기로 한데 뭉쳐 있던 잔해가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옆으로 넘어가며 둔중한 소리를 낸다.
"하이고..."
손마디가 얼얼하다. 허공에 손을 몇 번 털면서 나는 히죽 웃었다.
"그 뭐시기냐, 나에게 설 땅과 충분히 긴 지렛대를 다오?"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노출광 아르키메데스 만만세. 지렛대는 최고야.
이제 서태혁이 나무 줄기를 풀어버린다고 해도 잡동사니가 계단을 틀어막지는 못한다. 계단을 슬쩍 돌아보니 쌓아놓은 기름과 플라스틱 통, 비닐 같은게 아주 잘 타고 있는지 시커먼 연기가 솔솔 올라오는 중이다.
"너 이 새끼, 뭐 하는 짓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서태혁과 간부 몇 명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뒤 편에는 서태혁의 숙소에서 머무르고 있었을, 대충 봐도 스물은 넘어가는 여자들이 밧줄에 목이 묶인 채 각자 뭔가를 짊어지고 서 있다. 여자들이 들고 있는 짐을 바라보던 나는 픽 웃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서태혁은 자신이 머무르는 숙소 안에 물자와 각종 장비들을 지하 보도 쪽으로 옮겨놓을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전기장판은 내가 그러려니 하고 넝어가겠는데,.. 안마의자?
그건 좀 너무하지 않냐. 안마의자 없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저걸 옮기려고 들 줄은 몰랐다. 예상을 뛰어 넘는군.
욕심부리지 않고 바로 잔해를 무너뜨렸으면 나도 꽤 곤란했을텐데, 사람을 망치는 건 언제나 과도한 욕심이라지.
물론 짐을 옮길 시간이라면 사실 충분했다. 서태혁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내가 방해하지 않았으면 서태혁은 지금 쯤 자기 숙소에 있던 온갖 가전기기와 물자들을 지하 보도로 집어넣는데 성공하고, 곧장 계단을 틀어막았을 거다.
문제는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거다. 길게 끌 필요 없겠지.
나는 지렛대로 써먹었던 쇠막대를 곧장 서태혁에게 집어 던졌다. 쐐액 하는 파공음을 내며 날아간 쇠막대는 슬프게도 서태혁을 맞추지 못했다. 이야, 저 둔해보이는 몸으로 생각보다 빠르잖아.
"좀, 한 대만 맞아주지."
내 아쉬운 목소리에 경악에 차 있던 눈빛이 적대적으로 변했다. 녀석들의 시선을 마주하니 기분이 참 묘하다.
"살벌한 거 봐라.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으면 벌써 나는 한 다섯 번은 죽었겠다."
어차피 저 녀석들도 지하 보도로는 향할 수 없다. 이미 계단 아래에는 잔뜩 쌓여있던 유류가 활활 타오르며 유독 가스를 잔뜩 뿜어내고 있으니까. 코로 숨 쉬어서 폐로 산소 밀어넣어야 하는 사람이 저리로 들어가는 건 자살 행위니까.
"보스. 아, 이제 보스 아니지? 태혁아."
서태혁의 표정이 한 번 더 확 구겨진다.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며 한 번 허공에 휘둘렀다.
"너 나한테 뒤통수 맞은거야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