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테스트
밤이 되었다. 미리 잠을 자두었던 나는 근처에서 자고 있는 다른 간부들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히 몸을 일으킨 다음, 배게 따위를 이용해 자리에 내가 누워있는 것처럼 잠자리를 꾸몄다.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제법 커서, 사람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 살짝 부스럭거린다고 다른 사람들이 잠에서 깰 일은 없는게 다행이다.
알아내야 하는 건 정해져 있다. 서태혁은 도대체 어디에서 자는 건지. 지하 보도에 쌓아놓은 물자 중에 내가 활용 할 수 있을 것 같은 게 있는지.
서태혁은 역시 역 건물에서 자는게 아니다. 테스트를 끝낸 서태혁은 이 건물 안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
궁금한 건 또 하나 있다. 도대체 여자들은 어디에서 생활하는 걸까.
"혹시 모르지."
밤눈에 익숙해진 나는 천천히 움직이면서 중얼거렸다. 서태혁은 여자를 꽤나 좋아하는 눈치였다. 안동역에 새로 여자만 들어왔다 하면 일단 서태혁에게 바치기 위해서 간부들이 여자에게 샤워를 지시하는 모양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여자를 좋아한다면, 아예 자기 숙소 근처에 싹 다 모아 둔 다음, 아예 끼고 살지 않을까?
일단 민찬휘는 서태혁이 오라는 지시를 듣고 지하 보도 쪽으로 향했었다. 지하 보도에서 서태혁이 머무는 곳으로 통하는 곳이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저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대합실에서 지하보도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향하던 와중, 역 안의 화장실 구석에서 희미하게 이야기 나누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힌다. 화장실 벽에 귀를 가져가니 여자 목소리 하나, 남자 목소리가 둘 들린다. 거기에 더해서 살과 살이 서로 부벼지는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 씨발, 언제까지 꽂고 있을 건데. 일 끝냈으면 비켜 새끼야. 나 조금 있으면 근무 교대 나가야 한단 말이다."
"기다려봐 임마."
"제발... 그만..."
안에서 들리는 남자 목소리는 서태혁의 것이 아니다. 하긴, 이 역에서 왕 놀이 하고 있는 와중에 아랫 녀석들이랑 한 방에서 살냄새 맡고 있을리는 없다. 저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구경하고 싶지도 않고, 구경할 이유도 없다.
화장실을 지나치려는 와중, 옆 벽에 종이가 하나 달라붙어 있는게 보였다.
[근무자 : 김XX, 향후 3일간 밤 10시 - 새벽 3시까지 근무]
이건 아무래도 여자 이름 같은데... 근무? 나는 화장실 문과 벽에 붙어있는 종이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가 입을 쩍 벌렸다. 그 근무라고 하는게 설마.
그 종이 아래에 그어져 있는 작대기 몇 개를 확인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김인철이 자기 애인이 화장실에서 외간 남자와 잉야잉야 하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었나.
저 너머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는 잉야잉야라고 하는 어딘지 귀여운 단어를 가져다 붙이는 건 잉야잉야라는 단어에 대한 모욕이다. 게다가 그 김인철의 애인이라고 하는 사람도 정신력이 장난이 아닌데. 저런 일을 겪으면서도 자기 남자 밥 굶어서 힘들까봐 영양바를 보내달라고 사정을 한 거야?
완전히 미친 새끼들 아니야 이거. 이쯤 되면 더러운 수준을 넘어 차라리 역겹다는 단어가 어울릴 지경이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자리잡는 데에는 수백년이 걸렸지만, 무너져내리는 데에는 한 달도 걸리지 않는구나. 교도소에서 내 옆방을 써도 모자랄 녀석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았다니. 세상 참 지독하게 무섭다.
"아파, 아파요. 으그윽...."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처절한 신음소리.
문 앞에서 잠깐 고민하던 나는 시선을 돌리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안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 아니, 오히려 상황이 안 좋아질 거다.
내가 서지현과 약속한 시간이 되기 전에 함부로 움직이다가 일을 그르치면, 서지현을 포함한 사람들은 꼼짝없이 안동역 밖에서 붉은 포식이라는 사태를 견뎌야 한다.
서지현은 모르지만, 나는 직접 눈으로 그 붉은 포식이라는게 뭔지 알게 되었다. 서지현이라면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죽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내가 이 상황에서 저 녀석들을 제압한다면 저 여자는 오늘 하루는 더 이상 남자를 받지 않아도 되겠지만, 며칠 뒤에는 또다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될 거다.
"저 여자가 화장실에서 버텨야 하는게 새벽 세 시 까지라고 써져 있었지."
고민을 하던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내가 세운 가설은 두 가지다.
역 건물에서 서태혁이 머무르는 곳으로 가려면 지하 보도를 이용해야 한다.
서태혁이 머무는 곳 근처에 여자들이 머무르는 숙소가 마련되어 있을 것이다.
적당한 곳에 숨어서 기다리면, 내가 생각하고 있던 가설 두 가지를 한 번에 확인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지금 화장실에서 괴롭힘 당하는 여자는 새벽 세 시가 되면 화장실에서 벗어 날 수 있을거다. 화장실에서 벗어난 여자가 갈 곳은 그녀가 머무르는 숙소겠지.
그 뒤를 밟아 볼 가치는 충분하다. 서태혁이 자기 숙소 주변에 여자들을 몰아놓고 생활하게 한다면 여자는 화장실에서 나와 당연히 그곳으로 향할 테니까.
"심지어 화장실을 나와서 향하는 곳이 지하보도라고 한다면 더 가능성이 높아지지."
결론을 내린 나는 근처 벽에 붙어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듣고 있어야 하는 화장실 너머의 소리는 참 사람의 마음을 여러가지로 복잡하게 만든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마침내 화장실 문이 열리고 나는 숨을 죽였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성의 실루엣이었다. 여자는 옷을 입고 있지 않았고, 다리를 덜덜 떨면서 벽에 손을 대고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다. 그 뒤를 따라 남자 두 명이 고의춤을 여미며 걸어나온다. 벽에 손을 댄 채로 가늘게 숨을 쉬는 여자를 보며 키들거리던 남자 중 하나가 손을 휘둘러 여자의 엉덩이를 짝, 하고 후려친다.
"히익."
"돌아가서 빡빡 닦아라. 냄새 나더라. 토할 뻔했어 이 년아."
그러고는 지들끼리 좋다고 처 웃고 자빠졌다. 여자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는다. 그 사이에 녀석들은 자기들 잠자리로 돌아갔다. 여자는 벽에 손을 짚은 채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지하 보도로 내려가는 계단 쪽으로.
내 예상이 맞을 확률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군 그래. 나는 거리를 둔 채로 여자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지금 주변을 확인할 육체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손으로 뭔가를 더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손에 들린 랜턴이 전방을 비춘다.
"으윽..."
걸어가면서도 여전히 몸 상태가 좋지는 않은지. 여자는 걸어가다가 쉬는 것을 반복하며 지하 보도를 걷기 시작했다.
얼마 뒤 여자는 플랫폼 쪽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멈춰섰다. 여기도 역시 막혀있다. 여자는 작게 한숨을 쉬고 나서 벽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눈 앞에 멀쩡하게 보이던 잔해들이 일렁거리며 여자를 먹어치웠다. 뭐야 저게, 런던도 아니고 안동역에 왜 9와 3/4 승강장이 있는거야. 환상 같은 건가?
귀를 기울여 보니 계단 너머에서 희미하게 여자가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곳으로 빨려들어간 건 아니고, 환상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벽 앞에 선 나는 방금 전 그 여자와 마찬가지로 잠깐 심호흡을 하고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턱, 하고 발에 계단의 감촉이 느껴진다. 눈 앞에 보이고 있던 잔해들은 거짓이었고, 나는 플랫폼 쪽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도대체 뭐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변을 살펴보던 나는 벽에 붙은채 희미하게 녹색의 빛을 뿌리는 보석을 발견했다.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오백원 짜리 동전 하나 만한 크기다. 저게 만들어낸 환상인가.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당연한 걸 수도 있다. 여기로 들어온 생존자들은 자신의 모든 소지품을 반납해야 한다. 많은 숫자는 아니겠지만 녀석들이 지니고 있는 장비 중에는 꽤 유용한 것들이 있었을테고, 모든 물건을 압수한 서태혁 입장에서는 쓰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환상이라."
서지현은 마력 운용을 찍었으니 대번에 눈치챘으려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걸어올랐다.
"아하."
계단을 통해 플랫폼으로 올라오자, 계단 옆에 잡동사니들이 한 가득 쌓여있는게 보인다. 딱 봐도 불안정해서 금방 무너질 것처럼 생겼는데,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 익숙한 나무줄기들이 그 위태로운 잡동사니를 얽어매서 억지로 붙잡아두고 있다.
저 나무 줄기가 사라지면 뭉쳐진 잡동사니들은 그대로 폭삭 무너져 계단을 틀어막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저 나무 줄기를 날려버린다면 서태혁이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잡동사니가 무너져 지하보도로 내려가는 계단 입구를 막겠지.
생각을 정리하고 주변을 살피자, 약간 앞 쪽에 희미하게 랜턴 빛이 다시 보인다. 계단을 올라간 여자는 저기로 향한 모양이다. 나는 다시 그 뒤를 쫒기 시작했다.
"객차?"
낡은 객차 4-5칸 정도가 레일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왜 여기에 서 있는거야.
객차 안에서는 전등 빛이 흘러나오는 중이고, 대여섯개의 발전기가 소음을 내면서 객차 안으로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객차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경계를 서고 있는 간부 두 명이 보인다.
시선을 피해 뒤로 돌아가 객차의 벽을 살펴보니, 코팅된 A4 용지 하나가 붙어있다.
[안동역 혁신허브사업으로 2009 - 2010년에 조성한 퇴계학당은... 2016. 07. 29. 일에 폐지함을 알려드립니다.]
원래는 안동에서 뭔가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해서 따로 가져다 놓았던 객차들인 모양이다. 지금은 딱 봐도 서태혁이 뜯어 고친 모양이고. 객차로 들어가는 문에는 굵은 나무줄기가 휘감겨있다. 검이 있다면 모를까, 맨 손으로 뜯어내는 건 힘들겠지. 저래뵈도 그 고릴라 괴물을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놨던 기술이니까.
슬쩍 벽에 귀를 가져가 보니 서태혁이 껄껄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구만."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 그거지. 무슨 생각으로 여기를 숙소 삼았는지 알 것 같다. 어차피 사태가 벌어지면 서태혁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 없고 이 객차들은 플랫폼에서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다.
객차를 뜯어 고쳐 숙소로 삼은채 편히 놀다가 무슨 일이 생겼다 싶으면 곧바로 객차에서 나와 지하 보도로 들어간 다음, 플랫폼에서 역 건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도 틀어막아 버릴 생각이겠지.
역 건물은 입구 하나를 제외하면 철저하게 요새화 되어있으니까. 같은 1층이라고 해도 플랫폼에서 지하보도를 거치지 않고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건 굉장히 힘들다.
고개를 돌려 안동역 밖에 기괴하게 뒤틀린 건물들을 보던 나는 웃음을 흘렸다. 밤에 여기를 습격할 수 있는 녀석은 없다. 최소한 사람이라면. 오다가 죽는다.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은 지금 내가 몰래 넘어온 이 길이 막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막혀버리면 결국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용접된 철판이 덕지덕지 달라붙어있는 역입구를 두들기는 방법 말고는 없다. 기껏 철도를 통해서 플랫폼으로 진입한 의미가 없지.
반대로 말하면, 저기에 나무 줄기로 꽁꽁 묶인채 무너질 날 만을 기다리고 있는 잡동사니들만 적절하게 처리한다면 플랫폼에서 안동역 건물 안까지는 일사천리로 쭉쭉 치고 들어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발전기를 돌리는 걸 봐서는 지하 보도에 쌓아놓은 물자 중에는 연료도 있는 모양이고...
내 힘으로 어떻게 처리 할 수 있을 만한 크기와 무게는 아니다. 몰래 밧줄 같은 걸로 미리 묶어놓는다고 해도 서태혁이 머무르고 있는 숙소와 연결되어있으니 하루가 멀다하고 녀석의 졸개들이 왔다갔다 하겠지. 들킬 확률이 너무 높다.
"원래 세상에 쉽게 돌아가는 일은 없는 법이라지."
그냥 서지현이 밀어 닥치는 당일에 서태혁에게 찾아가서 확 멱을 따버리는 방법도 고려 해 볼 수는 있다. 급습하는데 성공하면 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서태혁이 닭 모가지 비트는 것처럼 쉽게 당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이다. 당장 생각해봐도, 의심받지 않고 서태혁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맨손이어야 한다는 점부터 마음에 걸린다.
바람개비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하다못해 손거울만 있어도 급습 할 타이밍을 잡는데 도움이 많이 될 텐데.
반면 서태혁은 그 동안 안동역으로 향하는 생존자들이 가지고 있던 장비들 중에서 그나마 쓸만한 노른자위를 쏙쏙 빼서 지니고 있겠지. 안동역을 관리하는 간부들의 숫자는 대충 20-30명 정도 된다. 서태혁과의 싸움이 길어지면 다른 간부들도 합세해서 나에게 달려들거다. 그때부터는 승리를 장담 할 수가 없다.
다시 역 건물 안의 잠자리로 돌아온 나는 요에 누워서 이리 저리 머리를 굴려 그럴 듯한 계획을 짜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