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테스트
김인철의 짐을 받쳐주면서 도로를 걷고 걸어 우리는 마침내 다시 안동역으로 도착했다.
"빨리 옮겨! 아직 옮길 짐이 많다!"
이제 끝났나 싶었지만, 당연히 이걸로 끝날리는 없었다. 물 한 잔 마실 시간도 주지 않고 우리는 곧장 역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뭐, 잘된 일이지. 안 그래도 이 물자들을 도대체 어디에 보관하고 있는 건지 궁금한 참이었으니까.
역 건물의 대합실로 들어서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소형 발전기 다섯 대 정도가 눈에 들어온다. 참나, 물자 부족하다고 했으면서 니들은 여기에서 발전기 돌리고 앉아있네. 눈치껏 살펴보니 없는게 없다. 커피 포트도 놓여있고, 큼지막한 대형 냉장고도 두 개나 돌리는 중이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이불과 요. 간부들은 여기에서 자는 모양이다.
벌컥, 매표소의 문이 열리고 팬티 바람의 남자 한 명이 눈을 비빈다.
"일어나셨습니까."
방금 전까지 우리에게 빨리 움직이라고 호령을 하던 녀석이 열린 문 너머에서 나온 팬티 남자를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한다.
"야, 조용히 안 다니냐? 자는 사람 다 깨우려 그러네 이게."
"... 죄송합니다."
자는 와중에 밖이 소란스러워 짜증이 난 모양이다. 열린 매표소 문 너머에 침대와 이불이 보인다. 간부들 사이에서도 나름 급이라는게 있는 모양이지. 급수가 떨어지는 녀석들은 대합실 바닥에 요를 깔고 자지만, 급수가 좀 있는 녀석들은 침대에서 이불 덮고 자는 모양이다. 간부 급수를 따지는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조용히 다녀라."
팬티 남자는 말을 마치고 나서 쯔, 하고 혀를 찬 다음에 다시 매표소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빨리 옮겨."
대번에 목소리가 확 줄었네. 시끄럽지 않은 건 기쁘지만 한 소리 들은 녀석의 표정을 보니 누구 하나 화풀이 상대 찾아내면 아주 반죽음을 내놓을 기세여서 우리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물자를 쌓아두고 있는 장소는 대합실에서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지하보도였다. 우리를 인솔한 녀석은 창고 안에 있는 녀석과 우리가 가져온 물량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잠깐 쉴 틈이 생겼다.
"엄청 쌓아두었네."
내 말에 옆에서 쉬고 있던 김인철이 대답했다.
"어차피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렇지. 어제 저녁밥과 오늘의 아침밥은 정말 똥맛이었다. 일부러 맛없게 만들려고 해도 그렇게 만들 수는 없을 걸.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면서 교도소 밥보다 맛없는 건 처음 먹어봤다.
그런 잡담을 나누며 짐을 나르는 와중에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 하나를 확인 할 수 있었는데, 온갖 잡동사니를 한 가득 쌓아서 꽉 틀어막아 놓았다.
하긴, 나 같아도 저렇게 해놓았을거다. 누가 플랫폼 쪽으로 접근해서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 곧바로 지하 보도와 연결되는데, 창고를 여기에다가 만들어 놓았으면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다 막아둬야지. 안 그러면 애써 모아놓은 물자가 죄다 털려버릴 수도 있다.
"그래, 일들 하고 있나?"
뒤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서로 잡담을 나누던 간부 둘이 곧바로 고개를 팍 숙이며 인사했다.
"보스. 막 물자를 옮기고 나서 수량을 파악하는 중이었습니다."
"고생들 하는군 그래."
서태혁이다. 높은신 분들이 늘상 하는 것 처럼 소위 말하는 시찰 같은 걸 돌고 있는 모양이다. 녀석이 우리를 한 번 훑어본 다음에 혀를 쯔쯔쯔 찼다.
"이봐, 물이라도 한 잔씩 먹여 가면서 시켜. 저러다 쓰러지면 시체 치우겠군 그래. 어차피 물량 파악 중에는 따로 시킬 일도 없을텐데. 어지간하면 좀 앉아서 쉬게 하고."
"그러겠습니다. 너희들, 앉아서 쉬고 있어."
그 말 한 마디 만으로도 방금 전까지 격한 노동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얼굴에 감사의 표정이 떠오른다.
참 웃긴 일이지. 정작 이런 개고생을 하게 만든 녀석은 지금 눈 앞에서 사람 좋은 척 웃고 있는 저 서태혁이라는 통통한 중년인데.
저렇게 착한 척 행동을 하면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생각이 자리잡게 된다. 우리가 이 개고생을 하고 있는 건 서태혁 때문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일하는 못돼 처먹은 간부들 때문이다.
그 사이 서태혁은 생수병을 든 채로 우리에게 다가와서 물을 따라주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힘을 내자고. 안동역이 안전해지는 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 아닌가. 자네들도 힘든 건 알지만, 모두가 함께 고생하는 중이잖아. 자네들 힘든거 모르는거 아니야."
다들 그렇게 말하곤 하지. 회사에서도 흔히 하는 말이잖아.
'이번 일 끝나고 사정 나아지면 보너스도 주고, 월차도 쓰게 해주마!'
그렇게 말하는 회사 중에 진짜로 그 말을 지키는 회사는 없더라. 나는 받아든 미지근한 물을 그대로 쭉 들이키고 입가를 훔쳤다.
근데 저 녀석은 어디에서 생활하는 거지. 짧은 시간 사이에 안동역에 계급이 생긴 건 저 녀석이 의도적으로 노린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단순히 간부와 노예라는 두 개의 계급만 있는게 아니다. 대합실 안의 풍경을 생각해보면 간부들 사이에서도 차별 대우가 있는게 분명하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안동역 계급 피라미드의 최고층에 자리잡고 있을 서태혁이 다른 녀석들과 함께 방을 쓰지는 않겠지.
하지만 안동역의 대합실은 그렇게 크지 않다. 서태혁이 따로 머무를 만한 공간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대합실에서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이 지하 보도는 물자를 쌓아두는 용도로 쓰이니 마찬가지로 여기에 서태혁이 머무르고 있을 리도 없다.
그것 뿐이 아니다. 서태혁이 데려간 여자들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두 명이 아닐텐데. 도대체 어디에 모아두고 있는거지.
"그나저나, 5번 작업반도 정원이 다 찬건가?"
"그렇습니다."
서태혁은 작업반장의 대답을 듣고 잠깐 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쉰다.
"그렇구만. 알았네. 그럼 고생들 하라고. 아, 정리 끝내고 올라가면서 문찬휘한테 내가 부른다고 말해놔."
"그러겠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물을 다 따라준 서태혁은 다시 일어나서 휘척휘척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멀어지는 녀석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수량 파악을 마친 다음 간부는 다시 우리를 끌고 대합실 쪽으로 올라갔다.
"여기서 대기."
인솔한 녀석은 우리를 세워두고 매표소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조심슬버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시 뒤에 안에 들어갔던 간부가 나오고, 그 다음 또 다른 녀석이 하나 걸어나왔다. 저게 서태혁이 찾던 문찬휘라는 녀석인가.
"그럼, 고생하십시오."
"오냐, 욕봐라."
문찬휘라는 녀석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플랫폼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다.
잠깐, 저기로 가면 지하보도일텐데? 서태혁은 저 녀석에게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 부른 것도 아니고 현재 안동역의 최고 존업이 오라고 부른 건데 어디 들러서 간식 먹고 갈 리는 없고...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한다.
서태혁이 머무는 곳은 플랫폼 근처에 있고, 지하보도에서 플랫폼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전부 막혀있는 건 아닐 수도 있겠는데. 한 번 확인해 볼 가치가 있겠는 걸. 하지만, 플랫폼 쪽에 사람이 머무를 만한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있나? 기차역을 많이 다녀보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플랫폼은 사람들이 오래 머무르라고 만들어 놓은 장소가 아니잖아.
그 뒤로도 우리는 해가 저물 때 까지 역 근처에서 온갖 종류의 짐을 날라야 했다. 돌아와서 저녁밥을 먹는 와중에 슬쩍 마당을 살펴보니, 오늘도 한 여덟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새로 안동역에 도착한 모양이다. 지속적으로 들어오네.
매일 저 정도만 들어와도 통제할 간부 부족으로 고생하겠어 그래.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저녁 식사를 먹고, 내부 작업이라는 이름의 노동에 또다시 시달리고 나서야 마침내 밤이 찾아왔다.
"전원 주목."
주차장에 앉아 쉬고 있던 우리에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딴 식으로 말을 걸 수 있는 녀석이라고 하면 간부 말고는 없겠지.
"안동역의 생존자가 지속적으로 늘었다. 이에 보스께서 작업반을 추가로 편성하라는 지시를 내리셨다."
그래서? 그걸 왜 우리에게 말해주는 거야. 어차피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일을 시키면 해야 하는 돌쇠와 먹쇠잖아.
"작업반을 추가 편성하기 위해서는 작업반장이 필요하다."
문찬휘라는 녀석이 거기까지 말하자 사람들이 슬슬 술렁거리기 시작한다. 하긴, 그럴 수 밖에 없을 거다. 서태혁이라는 자식이 제법 능력이 뛰어나서 재빠르게 안동역의 생존자들 위에 군림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일손은 부족한 상황이니까.
부려야 될 사람이 많으면 자연스럽게 간부도 늘어나야 한다.
"보스께서는 현재 잔류하고 있는 안동역의 생존자 중에 신청자를 받아, 테스트를 거쳐 간부로 선발 하고, 작업반장으로 채용할 예정이다."
그 뚱뚱한 중년 자식, 머리가 나쁜 건 확실히 아니다.
주차장에서 고된 노동에 시달리며 빈약한 식사와 불편한 잠자리를 강요받게 된다면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와중에 '너희들 중에서 간부를 뽑겠다' 같은 식으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만들어 주면 사람들의 불만은 그쪽으로 향하게 된다.
"테스트 신청에는 딱히 자격을 두고 있지 않다. 신청할 녀석들은 금일 취침 전까지 각 작업반의 반장에게 보고 할 수 있도록. 1차 테스트는 내일 아침부터 진행된다. 1차 테스트 합격자는 합격 후 일주일 간 컨디션 관리를 위해 휴식을 취하고, 간부에 준하는 대접과 식사를 제공하라는 보스의 지시가 있었다. 일주일의 휴식이 끝나면 최종 테스트를 보고, 합격자는 작업반장의 역할을 수행하는 간부로서 대우받을 것이다."
합격한다면 이 좆같은 대우를 벗어 던지고 간부가 될 수 있다.
신분 탈출의 기회.
쉽게 말하면 그런거다. 부자가 되고 싶어? 그럼 너도 노오력을 해서 부자가 되면 될 거 아니야.
테스트를 통과하면 간부가 될 수 있다는 한 가지 사실 만으로, 불공평한 대우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은 나도 저 자리에 앉겠다는 열정으로 방향을 틀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의 쌓인 불만을 유도할 빌미를 만들고, 덤으로 숫자가 부족 해 질 수 있는 말단 간부도 보충할 속셈이다.
서태혁은 상황을 장기적으로 보고 잇다. 우리들 중에서 간부를 뽑겠는 일도 이후에는 조금 더 체계화 해서 주기적으로 진행 할 것이다.
"신청자 있냐. 가능하면 한 작업반에서 한 명 이상은 신청을 받으라고 하는 보스의 지시가 있었다."
모두가 손을 들었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다.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해도 내일 하루는 무조건 쉬게 되니까. 신청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나도 마찬가지다. 물자가 보관되는 장소는 안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서태혁을 포함해서 안동역을 통제하는 녀석들에 대해서 아는게 적다.
게다가 1차 테스트를 합격하고 나면 일주일 동안 컨디션을 조절할 시간을 준다. 준 간부 대우를 해준다고 했으니 당연히 자는 곳도 역 건물 안이겠지. 서지현과 일행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칠 때 제대로 내부에서 호응해주려면, 일주일이라는 통자배기 여유 시간과 작업반장이라는 타이틀이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아, 말하는 걸 깜박할 뻔했군. 최종 테스트 장소는 안동 대학교로 예정되었다. 보스가 안동으로 오는 길에 통과한 길목이기도 하고, 해당 장소의 클리어 특징이 테스트에 적합하거든."
그 말에 들어올려져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1차 테스트의 내용은 보스가 직접 생포해온 괴물들과 싸우는 거다."
슬금 슬금 힘이 빠지던 손이 마침내 하나씩 내려가기 시작한다. 마치 임포텐스 걸려서 고개 숙인 남성처럼. 그나저나 서태혁이 직접 잡아왔다고?
그냥 먹고 놀기 좋아 할 것처럼 생긴 녀석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저기 한국 위쪽에 있는 북녁골 독재자처럼 양아치는 아닌 모양이네. 게다가 생포라니.
최종적으로 손을 들고 있는 건 나를 빼고는 없었다.
"어쭈. 너 처음 안동역으로 들어올 떄는 울고 짜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는데."
거 소문 한 번 빠르네.
이 녀석은 직접 그 모습을 본 건 아니다. 내가 울고 불고 바짓가랑이 잡던 모습을 기억하는 건 다른 작업반에 소속된 작업원들과, 안동 대학교 입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녀석들이다. 직접 본게 아니라면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는 건 어려울 것 없다.
"눈 앞에서 괴물이 애인 머리를 뜯어먹으면... 다들 그러지 않겠습니까."
작업반장은 계속 손을 들고 있는 나를 슥 보고는 픽 웃었다.
"그래? 뭐 나야 상관없지. 이름이 뭐였더라."
"오현석입니다."
내 말에 그가 슥 나를 훑어보고는 종이에 내 이름을 적었다.
"너는 내일 일과를 생략하고, 아침 식사 후 역 건물 앞 공터로 향한다."
말을 마치고 시계를 확인한 녀석이 다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현 시간 부로 모두 자도록. 이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