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안동역에서
어깨가 눌린 채로 녀석은 계속해서 놓으라고 말하며 몸부림을 쳤지만, 내 손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결국은 제 풀에 지쳐서 나를 노려본다.
"왜 간섭이야, 씨발. 왜 간섭질이냐고."
네가 난동을 피우면 나에게도 피해가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네가 하려고 하는 행위는 딱히 너에게 좋을 것도 없으니까.
몸이 지치면 정신도 덩달아서 가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몸이 지치면 나갔던 정신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다. 이러니 과학자들이 아직도 인체의 신비를 다 밝혀내지 못한게 아닐까. 녀석의 눈에는 다시 어렴풋이 초점이 돌아와 있었다.
이제는 눈에 뵈는게 있는 상태로 돌아왔다.
"니 애인은 아직 살아있어. 네 몸 돌보지 않고 달려들면 안된다고."
어차피 세상 만사, 야동처럼 흘러가는 경우는 없다. 마음에도 없는 잠자리를 강제로 가지다가 색정증 같은거에 걸려서 사랑하는 애인을 버린다? 매춘부가 단골 고객과 사랑에 빠져서 여태동안 자기가 벌어놓은 목독을 그 남자에게 바치는 일 만큼이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
물론, 계속 그런 생활을 강요당하면 사람이 망가지기는 할 테지만...
그 여자도 그렇게 오래 버틸 필요는 없다. 2주면 된다.
어떻게 잘 풀려서, 녀석이 다시 눈에 뵈는게 있는 상태가 되었으니 빠르게 뭐라고 말을 계속 걸어줘야 한다. 괜히 이대로 내버려두면 또 저쪽 바닥에 놓여있는 영양바에 시선이 갈 테고, 또 눈에 뵈는게 없어지겠지.
보자... 이런 시궁창 같은 상황에서는 옛날 이야기를 나누는게 효과가 좋지. 어차피 교도소에서 살던 나와는 다르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옛날은 그립고 좋은 시절일테니까.
"이름이 김인철이라고 했었나. 원래, 뭐 하며 살았냐?"
내 말에 녀석은 숨을 몰아쉬고는 말했다.
"그건 뭐하러 물어보는데."
"대답하기 싫으면 말고. 그냥 한 번 물어나 본 거다."
내 말에 녀석이 잠깐 있다가 대답했다.
"안동산림항공관리소에 소속된 헬기 조종사였다."
나는 그 말에 멈칫했다. 잠깐만, 나 방금 엄청난 걸 들은 것 같은데.
"잠깐, 헬기 조종사였다고?"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산불 나면 헬기 타고 날아가서 물 뿌리고, 등산하다가 길 잃은 사람 헬기로 구조하고."
참나. 이 병신 새끼들은 그러니까... 자동차도 아니고 자그마치 헬기를 조종 할 수 있는 새끼를 데려다 놓고, 헬기를 조종하도록 시키는게 아니라 짐이나 나르는 막일꾼으로 쓰고 있었다는 거냐.
심지어 이후에도 절대 협조하지 않도록 애인까지 빼앗아가면서?
하긴, 헬기 조종사라는 걸 밝힐 여유도 없었겠지. 이 녀석들의 오늘 일 처리 과정을 미루어 예상해보면 이 녀석이 뭔 말을 하기도 전에 애인부터 빼앗았을테니.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어차피 안동을 떠나려면 랜드 클리어를 마쳐야 하는 상황이다. 서울로 가겠다는 목표가 있는 나라면 모를까, 그냥 여기에서 계속 왕놀이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헬기 조종사는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돌봐줘야 하는 인재가 아닐 수도 있겠네.
머리가 복잡해진다. 헬기라니. 안동산림항공관리소에 소속되어있다고 했나.
위치는 잘 모르지만. 거기에 소속된 헬기 조종사라는 건 안동 어딘가에 헬기가 있다는 뜻이다.
심지어 그걸 조종 할 수 있는 조종사도 내 옆에 있고. 나는 녀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냥 두면 안될 것 같아서 막았을 뿐인데. 예상 외로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는 녀석과 안면을 트게 되었다. 안동에서 서울까지 헬기 타고 얼마나 걸릴까.
안동역을 장악하고, 랜드 클리어를 끝내고 나서 그 안동산림항공관리소라는 곳까지 도착 할 수 있게 된다면 나는 헬기를 타고 곧바로 서울로 날아 갈 수 있다. 이건 그냥 놓쳐서는 안되는 기회다.
딱 봐도 자기 애인이랑은 이전까지 없으면 죽고 못 사는 관계였던 모양이지. 애초에, 서로 깊이 생각해주는 관계가 아니었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기 남자에게 영양바 한 개 챙겨주겠다고 그런 짓을 하지는 않을거다.
당연히, 남자도 이 상황과 안동역을 지배하는 서태혁에게 품은 원한은 굉장하겠지. 함께 일을 벌일 이유가 충분한 녀석이다. 다른 녀석들에게 내 계획을 말한다면 몰래 서태혁에게 이야기를 흘릴 위험이 있지만 이 녀석은 아닐거다.
"어이."
한 녀석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영양바를 보고는 슬금슬금 다가와서 손을 뻗는게 보였다. 방금 전까지 저지를 일은 쓸데없는 오지랖이었지만, 김인철이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안 지금은 절대로 오지랖이 아니지.
"뭐... 뭐야."
"이리 내놓지?"
녀석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바라본다.
"내놓긴 뭘."
"영양바 이 새끼야. 그게 어떤 건지 알고."
김인철이 그제서야 영양바를 훔친 새끼 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영양바는 무슨 영양바? 새끼가 눈깔이..."
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내 손이 녀석의 주머니 안을 뒤져서 순식간에 영양바를 꺼내 가볍게 흔들었다.
"이 영양바 말하는 거지."
"... 이런 씨발, 오늘 갓 들어온 새끼가 근데."
녀석이 나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그리고 내 손에 잡혔다. 손아귀에 힘을 주자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신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한다. 잠깐 그러고 있던 나는 잡고 있던 팔을 놔주었다.
"오늘 갓 들어온 새끼한테 똥꼬로 눈깔 나올때까지 처맞던가, 아니면 그냥 돌아가라."
잠깐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시선을 돌리고 뭐라고 꿍시렁거리면서 돌아갔다.
"보자..."
나는 손에 쥐어진 영양바를 김인철에게 넘겨주고 가볍게 어깨를 한 번 두들겼다.
"먹건 말건, 보관은 잘 해둬. 니 애인이 너 위해서 이 악물고 보내준거잖아. 그걸 그냥 다른 녀석 먹게 둘 거야?"
손에 쥐어진 영양바를 보던 녀석이 작게 말했다.
"고맙다."
대화가 끝나고 저 멀리에서 간부가 목청을 높인다.
"내부 작업 시작한다! 1번 작업반 매표소 청소, 2번 작업반..."
내가 소속된 5번 작업반은 임시로 만든 간이 화장실의 청소였다. 당연히 수세식이 아니라 재래식이다. 다른 말로는 퍼내야 한다고.
"무슨 놈의 똥을..."
백 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싸질러 놓은 똥오줌을 우리는 부지런히 밖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밥 먹고 하기에는 참 여러가지 의미로 지독한 일이다. 아니, 먹은 것도 없는데 뭐 이렇게 많이들 싸놓은 거야.
21세기에 똥지게를 질 일이 생기다니, 그것도 안동역에 도착한 첫 날에 하는 일이 똥퍼라니 충격적으로 환상적이다.
청소를 마치고, 그 점호인지 뭔지 비슷한 일도 종료하고 마침내 잠을 자는 시간이 왔다. 잠을 잔다고 해도 모포 같은 걸 주는 건 아니고, 그냥 대충 바닥에 퍼질러 누워서 자는 거다. 하다못해 모포라도 한 장 주던가. 분위기만 봐서는 역에 누워서 자는 노숙자와 다를게 하나도 없군 그래.
눈을 감고 자려고 하는데 옆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까 잘 했어."
"잘 한 겁니까? 다행이네요. 이래도 되는 건가 싶어서 걱정했는데."
민혁수가 내 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업반에 소속된 녀석이 간부한테 해코지를 하면 작업반이 전부 엿을 먹을게 뻔하잖나."
그걸로 대화는 끝이었다. 나는 피곤하지 않았지만,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 죙일 일하다가 돌아왔을테니. 금방 코 고는 소리가 가득해지고, 나도 눈을 감았다.
"기상!"
얼마나 지났을까. 깡통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나는 잠에서 깼다. 아침식사는 어제 먹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개밥. 게다가 생각해보니 하루 두 끼를 먹이는데 요 만큼 주면 좀 양이 적은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식사를 하고 있으려니 곧바로 우리네 작업반장이 와서 말했다.
"빨리 처먹어! 5분 뒤에 공터로 모여라!"
깜짝이야. 무슨, 성대에 오토바이 머플러를 처박았나. 목청 한 번 크네.
식사를 마친 다음에 하는 일은 간단했다.
지게를 지고 가라는 곳으로 간다. 지게에 물건을 한 가득 짊어진다. 다시 안동역으로 돌아온다. 그 사이에 괴물들이 나타나면 무장한 간부들이 괴물들과 싸우고, 그 사이에 우리는 지게를 지고 발에 불이 나도록 뛴다.
그걸 계속 반복한다. 이러니 사람이 맛탱이가 쫙 가버리지. 오후 3시 즈음 되자 땀에 절은 사람들이 상한 달걀처럼 맛탱이가 살살 가버리고, 동작이 느려지기 시작한다.
나는 별 문제 없다. 사실, 더 들수 있는데 일부러 안 들고 있는 중이다. 눈에 띄어서 좋을 것도 없고, 오늘 부터 밤에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해보면 힘을 아껴두는게 좋으니까.
"걸음 더 빨리 안해?! 처 맞아야 움직일거냐!"
작업반장이 호령을 해도 움직이는 속도가 좀처럼 빨라지지 않는다. 당연하지, 새벽에 개죽 한 그릇 먹고 오후 세시까지 이 지랄을 했는데 지치지 않으면 로보캅이나 가제트지.
슬쩍 틈을 봐서 나는 김인철 옆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노동이 힘에 부치는 모양인지 다른 사람들보다 살짝 뒤쳐져 있다.
"아, 오현석."
"쉿."
나는 그렇게 말하고 녀석의 지게를 뒤편에서 살짝 들어올렸다.
"가자고."
"꼭 이럴 필요는..."
다른 녀석들이 내가 뒤편에서 지게를 받쳐주는 걸 보고 별 말을 하지 않는다.
"새끼야, 힘이 남아 있으면 좀 더 들란 말이야!"
작업반장이 나를 보고 한 마디 하고 만다. 어쨌든 계속 움직이기는 해야 하는데 뒤쳐지는 녀석을 도와주는 건 통제하는 입장에서도 막 보고 있기 짜증나는 일은 아니니까.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더 들겠습니다."
대충 그렇게 대꾸를 하자 녀석이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앞장 서서 걸어가기 시작한다.
"할 말이 있어서 이러는 거야. 짐 들어주는 건 덤이고."
내가 목소리를 낮추자, 녀석도 덩달아서 목소리를 낮췄다.
"무슨 할 말."
"애인 이름이 희은이라고 했지."
녀석이 잠깐 움찔한다.
"그건 갑자기 왜."
"구해 줄 수 있다면 어쩔래?"
녀석이 흐읍 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들키면 말짱 꽝이다. 할 말 있으면 조용히 말해."
"... 구해 줄 수 있다니. 무슨 뜻이야."
"비밀 지켜라. 괜히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 들어가면 안되니까."
"알았으니까, 자세히 말해봐."
이 녀석은 비밀을 지킬 수 밖에 없다. 목적이 잘 먹고 잘 사는게 아니니까. 단순히 그게 목적이라면 내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위쪽에 찌르는것도 방법이지만.
김인철은 일신의 영달이 아니라, 애인을 강제 매춘의 구렁텅이에서 끌어 올리는게 최우선 목적이다.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략적인 계획을 설명 해주었다. 안동역 밖에 나와 함께 일하며 안동역을 차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2주 뒤에 습격할 것이고, 나는 먼저 들어와서 내부에서 호응을 해줄 것이다.
내 설명을 들은 김인철의 걸음걸이에 살짝 힘이 돌아왔다.
"잘 알았어. 그래서, 내가 뭘 해야 하는거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가장 중요해. 필요한 일은 내가 다 알아서 한다. 네 도움이 필요한 건 일이 다 끝나고 나서야. 부탁할 일은 그때 가서 말하지. 알아두고나 있으라는 거야. 2주만 버티면 된다."
가능하면 말하지 않고 진행한 다음, 이후에 도움을 받는게 최선이지만. 김인철은 지금 딱 봐도 너무 불안정하다. 2주라고 하는 명확한 기한이 없으면 못 버티고 그 전에 뭔 일을 벌이고도 남는다. 당장 어제만 해도 눈이 돌아가서 간부 녀석 죽이고 쫒겨나겠다고 말하던 녀석이잖아.
진짜 그런 일을 벌이면 기껏 알게 된 헬기 조종사가 개죽음을 당한다.
그럼 다 끝이다. 헬기 타고 서울로 간다는 환상적인 플랜은 그대로 똥통 속으로 처박힌다.
김인철에게 우리의 계획을 말하는 건 어쩔 수 없이 내가 짊어져야 하는 리스크다.
두 명이 알게 된 이상 비밀이 아니라고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여전히 비밀로 남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거기에 기대를 해 봐야지.
"2주..."
녀석의 중얼거림에 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래, 2주. 꾹 참고 2주만 더 버텨. 네 애인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너도 힘든 시간을 보내겠지만. 참고 버티는데 성공하면 2주 뒤에는 다시 서로 부둥켜 안고 입술 뜯어져 나가도록 키스 할 수 있을테니까. 남들한테 티내지 말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말고. 그저 꾹 참아. 그 동안 서로가 입게 될 마음의 상처는 깊겠지만... 두 사람 모두 살아있으면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을거야."
둘 다 살아있잖아. 대화를 마친 나는 다시 묵묵히 녀석의 지게를 뒤에서 받쳐 준 채로 걸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