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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8화 (28/237)

# 28

안동역에서

이 안동역에서 왕 놀이 하고 있는 친구가 저 아저씨구만 그래. 녀석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한 번 훔쳤다.

"안동역에 온 걸 환영한다. 나는 관리를 맞고 있는 서태혁이다."

그리고는 우리를 슥 훑어본 다음에 바로 말을 잇는다.

"여기는 안동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곳이지. 여기에서 너희들은 안전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말은 참 유창하게 하는 편이다. 발성도 짱짱하게 퍼지고, 발음도 정확하다. 뭐 정치 같은 걸 하던 사람이려나. 그는 턱을 한번 쓰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매일 해가 뜨면 일어나야 한다. 안동역 주변에는 아직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물자가 있고, 우리는 우리의 안전을 위해 가용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안동역을 요새화 하는 중이다. 너희들은 안동역에서 보장받는 밤의 안전을 대가로 모두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

녀석이 한 발 앞으로 나오고, 목청을 약간 더 높였다.

"세상이 변했다. 나는 안전한 안동역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너희들에게 지시를 내릴 것이다. 부족한 물자를 최대한 아껴 미래를 대비하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현재 가용한 자원으로 안동역을 최대한 요새화 시킬 계획이다.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너희들이 필요하다."

안전한 안동역이라. 주어가 빠졌군 그래. 네가 안전한 안동역이겠지. 그리고 안동역에 도착한 여자들을 씻겨서 밤에 자기 방으로 올려보내라는게 안동역의 안전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 주기적으로 물을 빼주지 않으면 사타구니에 부착된 핵폭탄 같은게 터지는 건가.

여튼, 저 녀석이 떠드는 내용이 중요한 건 아니지. 일을 벌이고 나서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녀석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그걸로 만족한다.

"부족한 물자로 인해 식량 사정이 좋지 않고, 제공되는 물품에도 제한이 있을 것이다. 잠자리는 불편하고, 해야 하는 일은 고되다."

녀석은 일과에 대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다섯 시 반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여섯시가 되면 일을 시작한다. 주로 하는 일은 안동역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올리고, 건물에서 물자를 찾아내 안동역으로 옮기는 것이다. 점심은 생략하고, 다섯 시 까지 일한다.

다시 돌아오면 저녁을 먹고 아홉 시 까지 건물 안으로 옮겨놓은 물자를 다시 안동역 안에 마련된 창고로 나르고, 내부를 청소하는 등의 잡일을 한다. 아홉 시가 되면 작업 보고를 한다. 성과가 시원치 않은 자들, 또는 소위 말하는 간부들의 지시에 불복종 한 자들에게는 징계가 내려진다.

설명을 하는 동안에 하늘에 드리워져 있던 석양이 잦아들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저거 되게 말 많네. 사람을 언제까지 세워놓을 생각이야.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일부는 안동역에서 생활하면서 자신이 받게 될 이러한 처우가 불합리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마침내 설명이 끝난 모양이다. 서태혁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을 다시 이었다. 또 말하는 거야? 아주 조동아리가 쉬지를 않는구나.

"사실이다. 나는 안동역의 안전을 위해서 사람들의 기본권을 어쩔 수 없이 상당 부분 제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모든 종류의 제한은 너희가 안동역에 머무르고 있을 때만 성립하는 일이지. 모여있는 전원, 뒤로를 돌아봐라."

"뒤로 돌아!"

서태혁의 말을 아래에 서 있던 간부가 복창하고, 우리는 뒤를 돌아보았다.

"..."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안동 대학교에서 마주해야 했던 살점과 뼈로 뒤덮힌 건물들. 그리고 그 건물에서 주기적으로 쏟아져나오는 살점 덩어리들. 불과 몇 시간 전 일이라서 아직도 머리에 생생히 남아있는 그 장면이 눈 앞에서 다시 펼쳐져 있다.

다만, 이번에는 건물 한 채가 그렇게 기괴하게 잠식된게 아니다.

안동역을 제외한 안동 시의 모든 건물이, 몇 시간 전에 보았던 그 도서관 건물처럼 살덩이에 잠식되고 뒤틀려, 주기적으로 역겨운 살점 덩어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몇 마리나 쏟아져 나왔을까. 수백 단위가 아니라 수천, 더 나아가 수만 단위의 살점 덩어리들이 안동을 돌아다니고 있을거다.

젠장, 저건 너무 많잖아. 쉽게 처리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을 했던 건 도서관 하나 정도가 저런 꼴로 변했을 때의 이야기다. 안동 시에 존재하는 모든 건물이 저런 꼴로 변했을 때가 아니라. 바늘에 한 번 찔리면 잠깐 따끔하는 걸로 끝이지만, 바늘로 수천번 찔리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밤에 안동역 밖으로 나가는 건 죽음을 의미한다.

질이 아니라 양으로 승부하는, 확실하게 다가오는 죽음.

"너희들에 대한 처우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고, 이에 불만이 쌓여 참을 수 없게 된다면 언제든지 말하고 나가라. 우리는 막지 않는다. 다만, 나간 순간부터 안동역은 너희의 밤을 보호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 치과 의사도 드릴로 이빨 갈면서 아프면 왼손 들라고 말하더라. 어차피 멈춰주지도 않을 거면서. 해봤자 의미가 없는 행동과 할 수 없는 행동은 서로 묘한 공통점이 있지.

뒤로 돌아서 안동역 밖의 풍경을 보게 하는 것은 확실하고도 압도적인 효과가 있었다. 여기에 모여있는 그 누구도 안동역 밖에서 밤을 맞이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오늘 밤 중으로 너희가 소속될 작업반이 정해진다. 각 작업반을 담당하는 간부들의 지시와 명령에 복종하고, 안동역 내부의 규율을 준수하도록."

서태혁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돌아가고 나자, 안동역 안에서 사람들 몇 명이 나왔다.

"거기 너! 5번 작업반에 소속되어서 일하게 된다. 나를 따라오도록."

5번 작업반으로 분류된 나는 녀석을 따라서 이동했다. 도착한 곳은 역 안이 아니라, 안동역사 옆에 붙어있는 주차장이었다. 지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휑하게 밤하늘이 드러나 있는 공터.

쾡한 표정에 땀에 절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누울 생각을 하지 않고 곧게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면 시간 이외에는 눕지 않는다. 항상 정좌 한 채로, 만약을 대비하는 자세를 키울 수 있도록."

나 그거 교도소에서 해봤어. 나야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 새끼니까 그런 대우가 합당하다지만, 니들은 멀쩡한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시키는 거냐?

"식수는 각 작업반에 매일 15리터 제공된다. 각 작업반은 열 명으로 구성되는게 원칙이다."

녀석은 나를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다가갔다. 거기에는 이미 정좌한 자세로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반장님, 안녕하십니까!"

나를 데리고 다가가자, 녀석들이 인사를 했다. 인사를 받은 녀석은 귀를 후비며 나를 확 떠밀었다.

"새로 받은 녀석이다. 그래봤자 며칠 차이도 안나지만 먼저 왔으니 녀석에게 안동역 내부 규칙에 대해서 알려주도록."

말을 마친 5번 작업반장이 돌아가고, 나는 자리에 선 채로 좋든 싫든 앞으로 2주 동안은 꼼짝없이 함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살펴보고 말했다.

"오현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거, 구치소 빵에 들어가서 인사할 떄랑 비슷한 느낌인데. 좋지 않은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짐은 좀 들 줄 아냐?"

곧게 앉아있던 녀석 중, 나이가 제법 있어보이는 중년이 나를 향해 말을 건넨다.

"아마 남들 만큼은 들 수 있을 겁니다."

내 말에 녀석이 픽 웃었다.

"그거야 보면 알겠지. 민혁수다. 같이 고생하는 처지니 그렇게 굳어 있을 필요 없어. 간부들 눈치 보기도 괴로워 죽겠는데 우리 사이에서도 서로 눈치보며 스트레스 받을 이유는 없잖아."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뒤편에 앉아있는 녀석 중 하나가 눈에 띄게 불안한 표정을 지은 채로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희은아... 희은아..."

뭐야, 사람 이름이잖아. 나는 잠깐 그를 바라보다가 민혁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사람, 무슨 일 있습니까?"

"3일 전에 여자친구랑 함께 들어왔지. 어제 자기 여자친구 목소리를 우연히 들은 모양이던데. 남자 화장실에서. 간부랑 잉야잉야 하는 소리였나봐. 불쌍한 새끼."

저런, 슬픈 일이군. 사람이 맛이 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리고 여기에 나 대신에 서지현이 들어왔으면 참 여러가지 의미로 큰 사단이 날 뻔했다. 민혁수가 내 앞으로 깡통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왜..."

"니 식판이다."

녀석은 그러면서 자기 옆에 놓인 깡통을 한 번 툭 쳤다. 식판이라니. 무슨 80년대에 품바 부르면서 구걸하던 각설이도 아니고 깡통에 밥을 담아 먹는다니. 야 씨, 교도소도 이러지는 않는다.

저 멀리에서 누가 깡통을 깡깡 두들기는 소리를 냈다.

"식사 해라!"

밥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선다. 식판이라는 이름의 깡통에 뭔가가 부어진다. 도저히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다. 녹말이 들어가서 끈적거리는 국 비슷한 무언가다.

"후딱 퍼먹어. 빨리 먹지 않으면 중간에 먹다 말고 일해야 하는 수가 있어."

즐거운 식사 시간. 어제 먹었던 흰 밥에 장아찌와 참으로 비교되는 식단이지만 어차피 8년 동안 교도소 밥만 먹었는데 뭐.

"맛이 좀 이상하네요."

굳이 표현하자면 니 맛도 아니고 내 맛도 아닌, 그냥 똥맛이다. 내 말에 깡통 안의 음식을 먹던 민혁수가 얼굴을 구긴채로 말했다.

"좀 이상? 임마 나는 처음에 와서 이거 먹고는 토할 뻔했다."

뭐 어때. 어차피 주둥아리 안으로 밀어 넣으면 배탈 나거나 멀쩡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다 먹었습니다. 깡통은 어떻게 닦습니까?"

내 말에 민혁수가 허허헣, 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웃은 다음에 말했다.

"먹성 봐라. 어디 가도 굶어 죽지는 않겠어. 주는 물이 부족해서 깡통은 못 닦아. 이틀 정도 더 쓰면서 새로 식판으로 쓸 깡통을 구해야지."

멋지네. 식판도 자급 자족이냐.

"안전지대 밖은 위험하고, 안전지대 안은 지옥이군요."

그렇게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누군가 다가온다. 딱 봐도 간부로 보이는 녀석이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녀석은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채로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여기 김인철이라고 있냐?"

"저 녀석입니다만..."

민혁수가 앉아있는 사람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저 녀석은 아까 여친 이름 부르면서 넋이 나가있던 놈인데. 간부는 녀석에게 다가가서 뭔가를 툭 던져주고 키들거린다.

"야, 니 여친이 제발 전해달라고 사정하던데. 전해주기만 하면 따로 세 번 해준다면서. 맛나게 먹어라. 나도 맛나게 먹을 게 있어서, 이만."

그리고는 휘파람을 불면서 다시 멀어지기 시작한다.

와, 그냥 차라리 김인철을 죽이지 그러냐.

정신병자로 만들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건가. 불과 며칠 지난 것 같지도 않은데, 사람은 어디까지 잔인해 질 수 있는 건지. 당연히, 떨어진 영양바를 바라보는 녀석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이거 일 한 번 벌어지겠다.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상태잖아. 첫 날부터 이런 일이 발생하는 건 좋지 않은데. 게다가 이런 상황 이런 분위기라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처벌의 형태가 연좌제일 가능성도 배제 할 수가 없다. 저 녀석이 간부 죽이면 나까지 세트로 불이익을 받아서 이동폭에 제한이 생길 수 있지.

"..."

일단 막아야 한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녀석에게로 나는 재빠르게 접근해서 어깨를 눌렀다. 녀석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이미 눈에 초점이 없다. 전문 용어로는 눈깔에 뵈는게 없는 상태.

"이거 놔 새끼야. 저 새끼 죽여버릴거야."

"참아."

"너 나 알아? 아냐고 이 새끼야. 희은이가 나한테 어떤..."

녀석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간단하게 한 마디 했다.

"그래서, 댁이 뭐 어쩌게. 죽이고 쫒겨나려고?"

"그래. 저 새끼 죽여버리고 쫒겨날거다. 내가 씨발, 안동역 밖으로 쫒겨나서 저 괴물딱지들에게 뜯어먹혀 뒤지는 한이 있어도 저 새끼는 데려간다."

그래, 공짜로 몸 내주면서까지 남자친구 뭐라도 먹이려고 기를 쓰는 여자가 너 눈깔 돌아가서 간부 죽이고 내쫒겼다는 이야기 들으면 참 좋아하겠다.

"복수는 새끼야. 원래 10년이 걸려도 빠른거야."

"니가 뭘 안다고 떠들어."

"뭘 아니까 떠드는 거야."

8년을 교도소에서 보내며 이를 갈다, 복수하려고 나온 입장에서 너무나도 잘 알지. 나는 심지어 원래 30년을 참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여자친구, 최소한 아직 살아있다는 거잖아."

내 말에 녀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희은이는 지금, 죽느니만 못한 상태야."

죽는 것만 못한 상태라. 녀석의 말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건 세상에 없어."

죽느니만 못한 상태는 없다. 세상에서 제일 비참한 건 죽음이다. 죽었다는 것은, 이후에 상황이 변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이니까.

내 복수에는 만족감이 없다. 어머니도 죽었고 누나도 죽었다. 최현우를 죽여도 사실 변하는 건 없다. 복수가 끝나도 나아질 것은, 사실 하나도 없다.

누나는 고문에 가까운 성폭력을 당하다 죽었다. 내가 최현우를 죽여도 앞으로도 내 누나는... 지독한 성고문 끝에 목을 매달고 죽은 시체로 영원히 남아있을거다.

이 판국에 내가 굳이 교도소를 기어나와서 살아 돌아다니는 것도 내 손으로 최현우를 죽이겠다는 목표 하나 때문이다. 나는 그 이후에 딱히 해야만 하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 최현우가 내 손에 죽고 난 다음을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야, 생각 할 필요가 없잖아. 원수를 죽이는데 성공한 다음 내 눈 앞에 펼쳐질 것은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죽은, 망해버린 세상 뿐인데.

하지만 이 녀석 여자친구는 아직 살아있잖아. 그 말은 복수를 마치고 나서 할 일이 남아있다는 뜻이다. 애인과 자신이 입었을 상처를 치료하는거.

참나, 처음에는 나한테 피해가 갈까봐 말리려고 했었는데, 이야기를 하다보니 또 이런 애매한 감정이 고개를 들어올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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