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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탈옥했다-27화 (27/237)

# 27

안동역에서

안동 대학교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 앞에 문자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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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 살점과 뼈

목표 : 안동역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안동 대학교를 지나야 한다.

보상 : 700pt 및 통과 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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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가 떠오르자, 우리를 통제하던 녀석이 말했다.

"통과하면 700pt를 받는다. 안동역에 도착하면 50pt를 받겠지. 물과 영양바를 매일 산다면 40pt씩 소모된다. 매일 40pt씩 쓰면 18일 간 매일 영양바와 물을 살 수 있다. 안동역에 도착하면 너희들은 매일 아침 여덟시에 상점에서 물과 영양바를 18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바쳐라."

지독하네. 통과해서 얻게 되는 포인트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게 한다는 건가. 17일 동안 물과 영양바를 살 수 있는 포인트를 벌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17일동안 물건을 바치지 못한다면, 포인트를 다른 곳에 사용했다는 건 자연스럽게 들킨다.

그걸 들키면 좋은 꼴은 못 보겠지.

"대답 안하냐?"

살벌한 목소리에 밧줄에 묶인 사람들은 네! 하고 외쳤다.

대답이 끝나고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지독한 비린내와 썩은내가 콧 속으로 확 밀려든다. 시체 썩는 냄새, 그리고 피비린내.

"뭐야, 이번에는 도서관이냐."

무기를 든 녀석 중 하나가 중얼거리고는 손에 든 검에 힘을 꽉 준다. 밧줄에 묶인 나는 가만히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 옆에 안동 대학교 중앙 도서관이 보인다.

"..."

건물을 바라보던 나는 입을 쩍 벌렸다. 커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정면이 통짜 유리로 되어있는 도서관의 건물 아래에서 시뻘건 살점들이 슬금슬금 담쟁이 덩굴처럼 타고 올라가 건물을 뒤덮기 시작한다.

도서관은 금방 그 시뻘건 살점에 잠식되어버렸다. 어디에서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안동 대학교 주변에 세워진 거대한 육벽과 비슷한 모습이다.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진 덩어리가 중앙 도서관 건물을 먹어치운다. 한때 도서관이었던 육벽 위에, 여드름처럼 눈깔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우욱."

밧줄에 묶여있던 녀석 중 한 명이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만한 광경이다. 육벽에 자리잡은 눈알들이 일제히 우리를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래, 분위기 한 번 살벌하다. 하지만 그래서 뭐. 이게 무슨 놀이공원에 있는 귀신의 집도 아니고. 그냥 무서운 걸로는 부족하잖아.

육벽에 휘감긴 도서관에서 철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커다란 살점 덩어리가 바닥으로 툭툭 떨어진다. 숫자로 치면 30개 정도.

- 그어어어어...

바닥에 떨어진 덩어리들은 꿈틀거리면서 순식간에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다. 하지만 형체가 기괴하다. 박살난 마네킹을 맹인이 더듬거리며 맞춰놓으면 저런 꼴이 될까.

시뻘건 살덩어리들이 꿈틀거리며 만들어진 형상은 뒤죽박죽 엉망진창이었다. 팔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내장이 튀어나와 바닥에 질질 끌리고 있거나, 머리통이 붙어있어야 할 곳에 척추뼈가 박힌 채 덜렁거린다.

사타구니에 눈알이 달라붙어있고, 겨드랑이 아래에서 드러난 심장이 혈관도 연결되지 않은채 맥동하는 모습도 보인다.

사람 한 명을 거대한 프레스기로 찍어서 작살낸 다음에, 그 잔해를 대충 끌어모아 놓은 것 같은 모습. 저 꼴을 해서는 제대로 걸을 수는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녀석들이 우리 쪽으로 달려오는 속도는 신기하게도 꽤 빠른 편이다.

"준비해."

검을 든 녀석들이 녀석들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밧줄에 묶인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채 그 광경을 바라본다. 나도 녀석들이 저 기괴한 살덩이들과 싸우는 걸 살피기 시작했다.

김아은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대학교 앞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의 수준은 김아은을 비롯해서 한옥에 잔류하는 생존자들과 엇비슷한 수준이다.

조금 안심이 된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어젯밤에 상대했던 고릴라에 비하면 굉장히 약한 편이다. 그 고릴라 한 마리가 못해도 저 살정 덩어리 대 여섯 마리는 순식간에 떄려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정도라면 나와 서지현, 둘이서 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어렵지 않게 제압 할 수 있었을거다.

그때, 도서관에서 다시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또 나오는 거냐? 이거 끝이 없을 것 같은데.

"서둘러, 숫자가 더 늘어나기 전에 빨리 도서관 안으로 들어간다!"

녀석들은 다가오는 살점 덩어리들을 제거하면서 우리를 끌고 도서관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벌써 스무 마리는 잡은 것 같은데. 육벽에 잠식된 도서관은 계속해서 살점 덩어리를 바닥으로 쏟아내는 중이다. 건물 안에 들어가서 뭔가를 하지 않으면 계속 저 살점 덩어리들을 생산하는 모양이다.

- 그에에에에엑!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자, 살점 덩어리들이 괴성을 지르며 우리 뒤를 쫒아 따라오기 시작하고, 도서관을 휘감고 있던 육벽이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뼈와 살점으로 틀어 막는다.

"나머지는, 여기 지켜!"

무기를 든 녀석 중 대장을 포함한 서너명 정도가 문을 막고 있는 고기벽을 마구 공격하고, 나머지 녀석들은 자연스럽게 문 앞에 자리잡고 접근하는 괴물들을 도륙하기 시작한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입구를 막고 있던 벽이 무너졌다.

"거의 다 끝났다. 버텨!"

입구를 공격하던 녀석들이 그대로 안으로 진입한다. 나는 눈에 힘을 주고 그 너머를 살폈다.

버스만한 크기의 거대한 심장이, 문 너머에서 마구 맥동하는 중이다. 무너진 살점과 뼈가 다시 서로 뒤엉켜 도서관의 입구를 틀어막는다.

그리고 다시 5분 정도 뒤.

중앙 도서관을 휘감고 있던 육벽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고, 입구 근처에 자리잡은 녀석들과 싸우던 살점 덩어리들도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그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

이거 참, 서지현이 별로 좋아하지 않겠는데. 비위가 좋은 성격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 형체가 무너진 살점 덩어리는 땅에 닿자, 스펀지 위에 떨어뜨린 물방울처럼 바닥에 흡수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지만 주변에 감도는 피비린내와 썩은 시체 냄새는 그대로다.

"후우, 씨벌것."

도서관 안에서 피를 뒤집어 쓴 녀석들이 기어나와 우리는 한 번 보고 바닥에 침을 탁 뱉는다.

"빙신 새끼들 표정 봐라. 밤의 안동을 보면 아주 기절을 하겠네."

그의 말에 다른 녀석들이 키들거린다.

"행님, 오늘 뭐 계집은 한 년도 들어오지 않아서 기분도 좆같은데. 돌아가서 맥주나 한 잔 하시죠?"

"그럴까?"

녀석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누가 시키지 않았건만 녀석들의 뒤를 얌전히 따라갔다.

우리는 안동 대학교를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미션 클리어. 살점과 뼈를 통과하셨습니다.]

이게 전부였어? 조금 김이 빠지는데. 이 정도면 나와 서지현 둘이서도 충분히 통과 할 수 있는 정도다.

아니, 실망 할 건 아니지. 쉽게 통과 할 수 있으면 나쁠 거 없잖아. 서지현이 통과할 수 있을까? 같은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니까.

게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정도만 해도 충분히 어렵다. 어지간해서는 두 눈 뜨고 바라보기도 힘든 괴상망측한 형체를 하고 있는 녀석들이 쉬지 않고 몰려오는 가운데, 그 끔찍한 살덩이들을 마구 뱉어내는 도서관 안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건 쉽지 않겠지.

심지어, 나와 서지현이 거울 미로 안에서 마주쳤던 거울 인간들에 비교하면 분명히 방금 전의 그 살점 괴물들이 더 강하다. 나와 서지현이 처음 마주한 곳이 여기였다면 거울 미로 떄 보다 더 고전했겠지. 죽었을 수도 있다.

"저기... 선생님."

내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자 한 녀석이 인상을 썼다. 그래도 일단 선생님이라는 단어 선택 자체는 꽤 녀석의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뭐야? 쓸데없는 소리라면 말 걸지 마라. 힘들어 죽겠으니까."

녀석의 말에 잠깐 흠칫하는 행세를 하고,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그 도서관... 그냥 무시하고 뛰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선생님께서 그러시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녀석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무시하고 뛰면 다 뒤져. 처음 여기를 통과 할 때 보스께서 그러다 죽을 뻔했다."

보스?

"보스라고 하시면..."

내 말에 녀석이 히죽 웃고는 대답했다.

"안동역의 지도자. 다른 말로 하면 니 주인님 되시는 분이다. 이 새끼야. 이제 귀찮게 굴지 말고 처 걷기나 해."

알았어 임마. 지금은 시키면 따라야지. 문득 하늘을 보니 해가 저무는 중이었다. 우리릍 통제하던 녀석도 그걸 깨달았는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을 보며 외쳤다.

"시간 없다, 부지런히 움직여! 여기에서 밤 보내고 싶어?! 거기 묶인 자식들도 서둘러!"

안동 대학교에서 안동역까지 약 7km. 우리는 한시간 반 정도를 부지런히 걸어서 마침내 도착했다.

건물 꼭대기, 파란 바탕에 하얀 글자로 떡하니 붙어있는 안동역 세 글자. 그리고 그 아래에 붙어있는 한자로 된 현판. 역으로 들어가는 입구 대부분은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저거, 그냥 철판을 세워놓은게 아니라 아예 어디서 용접기를 가져워서 철판을 용접해버린거다.

사실 상 요새라고 해도 이상할게 없겠는 걸.

역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 공터에는 우리와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밧줄로 묶인 사람들이 서 있었다.

"전원 정지. 여기에서 대기한다."

안동역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책상 하나와, 그 앞에 앉아있는 남자 한 명이 보인다.

"여, 바쁘냐? 새로 애들 데리고 왔다."

책상 앞에 앉아있던 녀석이 우리를 슥 보고는 얼굴을 구긴다.

"망할 다 남자야? 늦길래 뭐 좀 괜찮은 년 건졌나 기대했더니만."

"성질 풀다가 늦었다. 계집들은 여기까지 오다가 다 뒤졌나보지. 다른 녀석들은 어때, 뭐 좀 건져왔나?"

"서쪽에 있던 녀석들이 계집 두 명을 건져왔어. 그게 전부지만. 남자 새끼 한 트럭보다야 계집년 하나를 더 반기잖아."

"오올."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른 녀석들과 함께 그냥 서 있어야 했다.

"보스는 언제 내려오시나?"

"문지기들 다 도착했다고 보고 올라갔어. 곧 내려오실거다."

"그렇구만. 우린 들어가서 좀 쉰다. 욕 봐라."

우리를 끌고 온 녀석은 안동역 안으로 들어가고. 책상 앞에 앉아있던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서 있는 공터 쪽으로 다가왔다.

오자마자 대뜸 하는 짓은 내 배에다가 발길질을 가하는 거였다. 왜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을 차고 지랄일가. 아프지는 않지만 기분 더럽네.

"안 일어나?"

그 말에 나는 곧바로 비틀거리며 아픔을 참는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섰다.

"딱 서 있어 쌍놈의 새끼야. 움직이지마. 손가락 하나라도 함부로 까딱하면 뒤질 줄 알아라."

녀석은 내 눈을 응시하면서 말하고 나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곧 보스가 내려오신다. 너희들의 보잘 것 없는 소지품을 압수하는 걸 대가로, 괴물로부터 일신의 안전을 보장해주신 고마운 분이지. 앞에서 함부로 행동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한다. 알았나."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녀석이 다시 우리를 돌아보며 외쳤다.

"알았냐고 이 개새끼들아!"

"네!"

저러는데 어떡하겠어, 대답해야지. 우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자리에 선 채 기다리기 시작했다. 석양이 서서히 저물기 시작하는 가운데, 안동역의 입구가 열리고 남자 한 명이 걸어나왔다.

"보스. 오셨습니까."

우리에게 성질을 부리던 녀석이 곧바로 그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그래, 고생많다. 오늘은 몇 명이나 왔나?"

"총 17명입니다. 여자 두 명은 먼저 안으로 들여서 씻기는 중입니다. 밤 중으로 올려 보내겠습니다."

마흔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살집이 넉넉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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