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안동역에서
서지현이 먼저 샤워를 마치고, 그 다음에는 나도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김아은이 툇마루에 앉아서 서지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왔네."
어깨 위에 두른 수건으로 물을 닦으면서 다가가자 김아은이 살짝 인사를 한다. 여기로 돌아왔다는 건 다른 녀석들에게 우리가 세운 계획을 전달했다는 뜻이겠지.
"다른 녀석들 반응은?"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모든 일이 다 그런 법이지. 걱정하는 사람들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다.
"결론이 궁금한데."
걱정한 사람들이 있냐 없냐는 알 바 아니다. 어차피 어떤 계획이건 실행 전에 걱정하는 사람들은 나올 수 밖에 없다. 김아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행 할 수 있어."
그 대답이면 족하다. 결정이 났으면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오늘 오후 중으로 출발할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서지현이 커흡, 하는 소리를 내고는 시선을 확 내 쪽으로 돌렸다.
"지금 바로? 아무리 그래도 너무 진행이 빠른 것 같은데요."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일이 진행되기로 결정되었으면 이후에는 움직일 일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왜, 안동 대학교에 새내기로 입학해서 졸업장이라도 딸 생각인가봐?"
"그런 건 아니지만."
다소 놀리는 것 같은 내 말투에 서지현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로 했으면 머뭇거릴 시간 없어. 여기에 더 머물러도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
왜 이래 갑자기. 서지현이 내 말을 듣고 나서 김아은을 바라봤다.
"준비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아마... 짧으면 1주, 길면 2주."
대답을 들은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 2주 뒤 실행하는 걸로 하죠. 어차피 오현석 씨도 안동역에 도착하고 나서 조사하고 준비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당연한 말이다. 안에 들어가서 곧바로 뭔가를 실행하는 건 불가능하다. 수긍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김아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해둘게."
"잠시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김아은을 서지현이 제지했다. 김아은이 서지현을 돌아봤다.
"왜?"
"오현석 씨가 오늘 출발하고 나면, 우리가 그와 연락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더 이상 없어요. 즉, 여기에서 2주 뒤에 출발하겠다는 말이 나왔으면 2주 뒤에는 무조건 가야 한다는 뜻이에요."
서지현은 다소 서늘한 표정으로 김아은을 바라봤다.
"이 계획은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일이에요. 김아은 씨의 입에서 길면 2주라는 대답이 나왔으니. 2주 뒤에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식의 말은 하지 말아줬으면 해요."
살짝 바뀐 서지현의 분위기에 김아은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2주면 충분해, 그런 표정 짓지 마."
김아은의 말에도 서지현은 별 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들으니 기쁘네요. 김아은 씨는 제 실력에 대해서 미덥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었죠? 2주가 지나고, 김아은씨 입에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면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제 실력에 대해서 알게 될 거에요."
그걸로 대화는 끝났다. 김아은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서지현에게 말을 걸었다.
"말 한 번 살벌하게 하더만. 김아은과 사이 나빠지면 좋을 게 없다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더라."
김아은이 멀어지는 걸 보고 있던 서지현이 빙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그럼 월남전에 남편 보낸 아내처럼 안동역에서 우리가 이제나 올지, 저제나 올지 기다리며 망부석 놀이라도 하고 계실래요?"
그건 아니지만. 생각해보면 확실히 기한에 대해서는 못박아 두는 편이 좋은 것 같다. 그럼, 해야 하는 일은 전부 마쳤으니.
"내 짐, 넘겨줄테니 방으로 들어와."
내가 서지현에게 내가 소지한 물건들 중에서 중요한 것을 주고 떠난다는 사실을 굳이 김아은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서지현과는 동행이지만, 김아은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공조일 뿐이니까. 신뢰도에 차이가 있다.
우선은 끼고 있던 수호의 고리와 바람개비, 손거울을 서지현에게 넘겨줬다. 그 다음에는 내가 짊어지고 있던 물건들 중에서 의약품 따위를 건네주었다.
"영양바나 식료품 같은 건?"
서지현이 내가 넘겨준 짐을 확인하며 되물었다.
"그런 것 까지 전부 넘겨주면 나는 빈손으로 안동 대학교에 도착하게 되잖아."
맨몸으로 안동 대학교까지 도착했다면 앞을 지키는 녀석들이 의심할거다.
"영양바 같은 경우에는 보존 기간이 기니까 우선적으로 소비되는 식료품은 아니지. 안동역을 점령하고 나서 김아은에게 말해서 빼앗긴 만큼 돌려 받으면 될 일이야."
서지현이 내 말에 수긍하면서 내가 넘겨준 짐을 자기 배낭 안에 밀어넣었다.
"그럼, 고생하세요."
"누가 들으면 나만 고생하는 줄 알겠네."
짐을 정리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지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2주 뒤에 보자고, 서지현."
내 손을 바라보던 서지현이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응시한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간호사 아가씨가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시는 거죠?"
"간호사 아가씨라고 불렀다가 삐져서 안 오면 어떡해. 미리 조심해야지."
서지현이 내 말에 픽 웃고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악수를 했다. 인사는 이걸로 끝났다. 바람개비 대신 서지현의 검을 받아든 나는 한옥을 나와 김아은에게 인사를 건네고 안동 대학교 쪽으로 향했다.
"혼자 걸으려니 뭔가 적적한 느낌이 있기는 하네."
그래도 등에 짊어지고 있던 말통 같은 건 빼서 그런지 훨씬 걸음이 가볍긴 하다. 길을 걸어가던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민에 빠졌다.
안동 대학교 앞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
나와 서지현의 얼굴을 까먹지는 않았을거다. 우리가 안동 대학교를 지나가려다가 포기한게 몇 년 전의 일도 아니니까. 게다가 앞을 지키고 있던 녀석들은 서지현에게 소지품 검사라는 이름의 성희롱을 하고 싶어서 환장하는 얼굴이었으니까.
"그냥 가면 분명히 의심할텐데."
여자는 어디 두고 혼자 왔냐고. 나는 머리를 벅벅 긁고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도리가 있나. 부상은 어제 밤에 고릴라 잡고 나서 서지현이 감아놓은 붕대가 있으니 이걸로 떼운다고 치고...
길 옆의 흙바닥으로 향한 나는 그대로 드러 누워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몸에 흙먼지와 풀 쪼가리들이 달라붙는다. 한 10분 정도 바닥에서 뒹굴었을까.
"이만 하면 되었겠지."
나는 괴물에게 습격 받아서 서지현을 버리고 안동 대학교로 다시 돌아온 거다. 이 정도 시나리오라면 충분할 거다.
준비를 마치고 얼마 걸어가지 않아서 다시 안동 대학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뭐야, 이 녀석 다시 왔네?"
"여자도 있지 않았나?"
연기를 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은 찌질한 척 해야 하는 순간도 있는 법이지.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통과시켜주세요."
그리고 눈물을 주르륵. 내 말에 녀석들이 뭐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
"이 새끼 이거, 상태 왜 이래?"
나는 곧바로 발을 앞으로 내딛었다. 곧장 랜드 클리어 미션에 관련된 문자가 눈 앞에 떠오른다. 이번에는 미션을 수락했고, 바닥에 그어진 선을 넘을 수 있었다. 선을 넘은 나는 곧바로 배낭을 벗어서 녀석들에게 건네주고는 말했다.
"제발, 전부 드릴테니 통과시켜주세요! 더는 못해먹겠습니다. 괴물이... 애인의 머리를 통쨰로...!"
눈물, 콧물, 침. 얼굴에 나 있는 구멍에서 나올 수 있는 액체는 죄다 줄줄 흘리면서 나는 배낭을 녀석들 앞에 내려놓고는 한 녀석의 바짓단을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 씨바, 달라 붙지 말아봐!"
나에게 바지가 잡힌 녀석이 확 다리를 움직여 나를 떨쳐냈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그 기세를 그대로 받아 바닥에 풀썩 엎어져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를 슬쩍 바라본 녀석이 입맛을 다셨다.
"거 씨발, 살아 남을 거면 계집이 살아남을 것이지. 쉰내 나는 남자 새끼가 살아남아서는."
그리고 배낭을 뒤적거리던 녀석 중 하나가 팍 인상을 쓰고는 바닥에 침을 탁 뱉었다.
"완전 개털이잖아."
녀석의 말을 들은 다른 녀석이 바닥에 엎드려서 훌쩍거리고 있는 나를 한 번 보고 말했다.
"어쩝니까?"
"어쩌긴 뭘 어재. 개털이라고 해도 몸뚱아리는 멀정해 뵈니, 부려먹을 수는 있겠지."
그리고 녀석이 나를 잡아 일으키고는 뺨을 몇 대 때렸다. 이런 씨팔, 뺨은 왜 때리고 지랄이야. 나는 맞은 뺨을 손으로 가리고는 멍하니 녀석을 바라봤다.
"따라와."
퉁명스럽게 말한 녀석은 잡고 있던 내 멱살을 놓고는 앞서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따라가지 않고 주춤거리며 되물었다.
"저, 통과하는 겁니까?"
"따라 오라고 임마."
나는 화들짝 놀란 행세를 하며 녀석의 뒤를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녀석은 대학교 입구 근처의 전봇대로 데리고 갔다. 전봇대에는 밧줄이 묶여 있었고, 나를 제외하고도 두어 명 정도가 전봇대에 연결된 밧줄에 굴비처럼 엮여 있었다.
녀석은 그 밧줄로 나도 묶어두었다.
"저기, 이건?"
내가 동공을 덜덜 떨면서 물어보자, 녀석이 대답했다.
"그럼 씨발, 너 한 마리 옮겨주자고 우리가 다 뒤로 빠지리? 기다리고 있어 새끼야. 오후 네 시까지 대기한다."
하긴, 왔다 갔다를 몇 번이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얌전히 기다리기 시작했다. 결국 몸 검사인지 지랄인지는 안 하는군. 대낮에 발가벗겨놓고 신체검사하는 건 XX 염색체를 소유한 사람을 위한 특별 대우 같은 건가.
얼마나 기다렸을까. 녀석들 중 하나가 시계를 확인하고는 다른 녀석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리고 놈들이 전봇대에 엮여 있던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이동한다, 일어나!"
전봇대에 엮여서 몇 시간이나 있었던 다른 사람들은 꽤 지쳐 있었다. 한 녀석이 주춤거리자, 곧바로 녀석의 가슴팍에 발차기가 들어간다.
"빨리 움직여 새끼야."
"이런 씨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이 새끼들아!"
가슴팍으로 발차기를 받은 녀석이 악에 받쳐서 소리쳤다. 그 말을 들은 녀석 중 하나가 픽 웃는다.
"아, 그런가요. 저희가 너무 심하게 대한 건가요?"
녀석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서 밧줄에 묶인 녀석을 흠씬 두들겨 패기 시작한다. 바닥에 툭 하고 떨어진 것은 피가 섞인채로 부러진 이빨 몇 조각.
"으만... 그흐마아..안...."
"야, 고만해라. 애 잡겠다."
뒤편에서 구경하고 있던 녀석이 키들거리면서 한 마디 던지고 다가와서 녀석의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렸다.
"친구, 다음부터는 막 소리치고 그러지마. 나는 간이 작아서 쉽게 놀란단 말이야. 알았지?"
뺨을 툭툭 치자 얻어맞은 사람의 입에서 가늘게 신음소리가 들린다.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은 녀석이 뒤를 보며 말했다.
"이러다 늦겠다. 서두르자고!"
녀석들이 분주히 우리를 묶고 있던 밧줄을 풀고, 각각의 사람들을 따로 따로 밧줄로 묶었다.
"대장, 이 새끼 못 일어나는데?"
아까 얻어맞은 녀석은 자리에서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로 움찔거릴 뿐이다. 대장이라고 불린 녀석이 잠깐 녀석의 눈꺼풀을 뒤집어 상태를 확인하고 말했다.
"그럼 버려 어차피 밤이 되면 잡아 먹힐테니. 움직이는 녀석들만 챙겨서 통과한다."
"오케이!"
그걸로 끝이었다. 말 한 번 잘못했다가 흠씬 두들겨 맞은 녀석은 그대로 버려지고 우리는 안동 대학교로 진입했다.
곧바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밧줄로 묶인 사람들은 두려움에 질린채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나도 놀라고 두려운 연기를 계속하면서 무기를 챙겨 든 녀석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이 친구들 실력이 어느정도인지 한 번 구경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