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들어가지 않는 사람들
다음날이 밝았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접시를 닦고 있으려니, 멈칫멈칫 사람이 다가왔다.
"김아은이 잠깐 보고 싶다고 하는데."
"5분 뒤에 간다고 전해줘."
녀석이 돌아가고, 대충 뒷정리를 마친 나와 서지현은 곧장 김아은이 머무르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왔어? 자, 앉아."
자리에 앉자, 곧바로 김아은이 입을 열었다.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들은 대체로 너희들을 어려워 하고 있어. 알지?"
그건 방금 전에도 느꼈다. 옆에서 서지현이 놀리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누구 덕분에요."
"좀 방법이 과격했지만, 어쨌든 잘 끝났잖아."
내가 기분이 안 좋아서 빨리 썰어버리지 않았다면 이쪽의 피해만 커졌을거다. 안 그래도 안동역에 머무르고 있을 생존자들에 비해서 머릿 수가 적은데, 부상을 입어서 비실거리는 것 보다는 훨신 잘 된 일이잖아.
김아은이 희미하게 웃고는 대답했다.
"맞아. 하지만, 어려워 하는 것 만큼이나 두 사람에게 기대하고 있는 중이야. 안동역을 차지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줄 거라고 믿고 있어."
역할이라. 어제 나무 뿌리 뽑아서 달려드는 고릴라들을 상대로 그 난장을 벌여 놨으니까.
"사람들이 우리에게 기대하는게 있고 없고는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게 아니에요. 중요한 건 제대로 된 계획이니까요."
서지현이 지도를 펼치고는 김아은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제는 안동대학교의 통과에요."
먼저 안에 들어가서 간첩 역할을 해야 하는 나는 몰라도, 서지현을 포함해서 여기에 남은 사람들은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충분히 통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두 사람 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잃으면 아쉬울 게 있는 사람들이니까. 안동 대학교로 진입하는 입구에 자리잡은 녀석들의 실력을 여기에 모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고만고만한 수준이야."
충분히 통과 할 수 있다면야 참 다행이긴 한데.
"통과 할 수 있다고 해도, 안동 대학교에서 시간을 너무 끌면 좋을게 없어."
안동 대학교를 통과하는 동안, 안동역에 남은 생존자들은 우리를 막기 위한 준비를 할 것이다. 녀석들 대학교 입구에 봉화대 비슷한 걸 만들어 놓았었잖아. 김아은은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서지현은 다른 의견이 있는 모양이다.
"글쎄요... 시간이 좀 걸리는 건 괜찮지 않을까요? 어차피 우리가 공략하는 통로는 안동역 입구가 아니라 철도가 이어져 있는 플랫폼이잖아요."
물론 우리가 공략 경로는 철도에서 이어지는 플랫폼이다. 그렇다고 해도, 시간이 오래 걸리면 일이 점점 더 어렵게 꼬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안동역의 생존자들이 우리를 꼭 안전지대 안에서 막아야 하는 건 아니야."
말을 마친 나는 도로를 손가락으로 슥 훑었다. 안동 대학교에서 임청각 군자정까지는 대충 4km 정도의 거리가 있다.
"이 경로에 대충이나마 바리케이트를 급조하고, 방어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목표로 한 철도에 도착하기 힘들 수도 있어."
안동역의 생존자들은 머릿수도 많으니, 바리케이트를 한 개만 만들어 놓지는 않을 거다. 안동 대학교를 통과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녀석들은 더 견고하게 방어를 준비할 거다. 서지현이 으흐흐, 하는 소리를 내며 웃고는 나와 김아은을 바라봤다.
"그렇다면 안동역에서 막을 수 밖에 없도록 하면 될 일이잖아요."
이 여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서지현은 나를 응시했다.
"안동 일대는 해가 지고 밤이 오면 붉은 포식이라는 현상에 시달린다고 하죠?"
"... 그래, 해가 지면 안전지대 바깥은 안전하지 못해. 생각하는 계획이란게 뭔지도 알 것 같다."
평상시에 무슨 생각을 하고 살면 그런 기똥차면서도 위험한 계획이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네. 황당하고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뭐야,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데."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는데 실패한 김아은이 질문을 던졌다. 대답해줘야겠지.
"안동역의 생존자들도, 붉은 포식이라는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을거야. 해가 질 무렵에 우리가 그들을 습격하면."
안동역 바깥에 바리케이트를 만들고 길목을 지키는 방법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공격을 막다가 안동역 밖에서 밤을 맞이해야 할 테니까. 그러면 그 붉은 포식이라고 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따라서, 안동역의 생존자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안동역에 틀어 박혀서 농성하는 것 말고는 없을테고...
안동 대학교를 넘어온 우리편 사람들은 장애물 하나 만나지 않고 바로 목표로 했던 철도까지 달릴 수 있다.
"기가 막힌 방법이잖아. 가능성이 있어."
내 긍정적인 반응에 서지현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엄지를 척 올렸다.
"그렇죠?"
서지현이 스스로의 계획을 자화자찬하고, 내가 엄지를 세워주는 꼴을 보고 있던 김아은이 어렵사리 한 마디를 꺼냈다.
"당신들, 미쳤어?"
"그런 말 자주 들어요."
임동면에서, 소방차로 휘발유 뿌리자는 계획을 말했을 때도 저 비슷한 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시간 계산을 잘못하면? 안동역에 도착하지도 못했는데 밤이 찾아오거나, 철도를 따라 플랫폼에 도착하는게 늦어지면?"
뻔한 대답이 기다리고 있는 질문이 김아은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 붉은 포식이라는 현상이 얼마나 위험한 현상인지 몸으로 체험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겠지."
당연한 걸 뭣하러 물어보는 거야. 원래 계획이라는 게 실패하면 쫄딱 망하기 마련이잖아.
"안돼. 너무 위험해."
김아은의 대답에 서지현이 팔을 꼰 채로 그녀를 바라봤다.
"위험한 일이라는 건 동의해요. 하지만 시간 내에 해낸다면, 가장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에요."
"밤이 다가오고 있으니, 안동역을 통제하고 있는 머리들은 당연히 밖을 싸돌아다니지 않고 전부 안동역에 머무를 거야. 소수의 실력자가 플랫폼을 통해 안동역에 진입하는데 성공하면, 안동역을 통제하는 머리들을 한 번에 싹 쳐낼 수 있어."
김아은이 말했던 것처럼, 머리를 자르면 그 아래는 자연스럽게 무력해질 것이다. 그 뒤에는 지도부를 교체하면 된다. 호빵맨에게 새 머리를 주는 것과 비슷하지.
"안동역의 생존자들을 통제하는 머리를 제압하는데 성공하면 큰 문제 없이 잘 풀릴거야."
김아은이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노골적이고, 다소 모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안동역의 생존자들 입장에서는 주인이 바뀌는 것 뿐이니까."
워우, 아무리 그래도 똑같이 밥 먹고 물 마시고 숨 쉬는 사람들을 노예 취급하다니. 김아은은 다시 주저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런 위험한 방법 말고, 차라리 착실하게 사람을 더 모아서..."
김아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비웃음이 절로 나온다.
"이봐, 어느 세월에? 게다가 여기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동안 안동역의 생존자들은 놀고 있겠냐."
임동면에서 안동으로 향하는 길은, 안동로 향하는 길 중 하나일 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새로 사람을 받는 숫자보다, 안동역에서 새로 생존자를 받는 숫자가 월등히 많을 것이다.
"착실한 방법으로는 실패할게 빤히 보이니까 모험을 시도하는 거에요."
안동 대학교에서 안동역까지 거리는 7km 정도다. 걸어서 가도 2시간이 걸리지 않고, 달린다면 1시간도 지나기 전에 도착 할 수 있다. 다들 레벨은 어느정도 올려두었다고 했으니, 7km 정도 달렸다고 숨이 넘어가지는 않을거다.
"오후 6시 정도까지 안동대학교를 통과하는데 성공하면 그걸로 충분해."
"맞아요. 안동 대학교의 통과를 서둘러서 진행하고, 공략이 끝나자마자 바로 안동대학교 밖으로 뛰쳐나오는게 아니라 안에서 오후 6시까지 쉬면서 전력을 정비하는 거죠."
나와 서지현이 거울 미로를 통과하고 바로 나가지 않고 안에서 쉬었던 것처럼. 안동역의 생존자들이 바리케이트를 치고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해도 저녁이 다가오면 안동역으로 철수 할 수 밖에 없다.
그 때 안동역에서 뛰쳐나와 달리면 된다.
"그럼 저녁 일곱시가 되기 전에 안동역 앞에 도착 할 수 있을거야. 서지현을 포함해 따로 빼돌린 서너명도 철도를 타고 플랫폼 근처에 도착하겠지."
그럼 한참 전부터 안동역에 머무르며 기다리고 있던 내가 플랫폼 쪽에서 서지현과 협조해 길을 연다.
"나는 안동역에서 미리 머무르면서 역을 통제하는 녀석들이 누구고, 어디에 머무는지 미리 파악해놓지."
머무는 곳을 안다면 플랫폼을 넘자마자 헤맬 필요 없이 역을 통제하는 녀석들에게 향할 수 있다.
즉, 플랫폼을 통해 서지현과 일행들을 안동역 안으로 들이는데 성공하면 적이 제대로 대항하기도 전에 머리를 무력화 시킬 수 있다는 소리다. 겸사 겸사, 서지현이 역에 불도 좀 질러주면 딱이네.
지도부를 잃고, 불까지 나게 되면 안동역의 생존자들은 바로 혼란에 빠질 거다.
"그 뒤에 안동역 입구를 지키던 녀석들을 협공으로 치우고, 입구에서 시간을 끌던 사람들을 안동역으로 들이면."
그걸로 끝이다. 안동역은 충분히 차지 할 수 있다.
"..."
김아은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해질 무렵에 안동역으로 향한다는게 어지간히 부담이 되는 모양이다.
"안동시에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는 장소는 썩어 넘쳐. 알잖아? 모텔, 편의점, 상가... 심지어 역 근처에는 대형 마트도 자리잡고 있지. 안동역에 머무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여기에서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막대한 물자를 안동역으로 옮기고 있을거다."
김아은이 나를 바라봤다.
"안전이 보장된 구역과 그 안에 쌓여있는 물자들 거기에 더해서 앞으로 얻게 될 물자까지. 이 일이 성공하면 전부 너희들의 손 안에 들어와."
이게 도박이라면, 판 위에 올려진 돈이 장난이 아니다.
"성공한다면 굴러들어올 이익이 이렇게 많은데, 타임어택 정도의 리스크는 한 번 짊어져 볼 만 하지 않겠어?"
머리를 벅벅 긁던 김아은이 숨을 한 번 깊게 몰아쉬고는 고개를 들어 나와 서지현을 바라봤다.
"알았어, 사람들을 설득 해 볼게."
서지현이 미소를 짓고 김아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을게요."
대화를 마친 우리는 다시 머무르던 한옥으로 돌아갔다.
"김아은이 다른 사람들을 설득 할 수 있을까요?"
"글쎄, 그 정도 능력은 있는 여자로 보이던데."
여기에 사람들을 모여 있는 것은 그녀가 이루어낸 성과다. 그녀의 영향력은 크다.
성공하는게 불가능할 정도로 얼토당토 않은 계획이 아니고, 안동역에 막대한 물자가 쌓여 있을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게다가 여기에 모인 이유도 안동역 빼앗고 싶어서잖아.
"기다리자고."
서지현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 안에서 수건을 하나 챙겨들고 나왔다.
"수건은 뭐하러."
"아, 간이로 만든 샤워실이 있더라고요."
샤워? 전기도 안 들어오는 판국에 샤워를 어떻게 한다는 거야.
"커다란 양동이 바닥에 구멍을 숭숭 뚫고 줄로 매달아 놓은 거에요. 양동이에 물을 쏟아넣으면 위에서 아래로 물이 쏟아지니까."
구멍에서 쏟아지는 물로 샤워 비슷한 걸 할 수 있다는 건가. 물론 뜨신 물은 나오지 않겠지만.
"인간의 창의력이란."
샤워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도 어떻게든 샤워 비슷한 행위를 해내는구나. 강이 있으니까, 정수 하지 않고 강물을 마시는 건 위험하지만, 씻는 물은 조금 더러워도 괜찮잖아.
"저 하고 나서 샤워 하실래요?"
그러지 뭐. 있는데 안 쓸 이유는 없으니까.